나의 스승, 그 치열하고 격렬했던 인연 김남윤 선생님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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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임지영의 스트링
나의 스승님, 김남윤 선생님을 추모하며…
지난 달 3월 12일 한국 바이올린계의 대모이신 김남윤 교수님께서 작고하셨다. 20대부터 스승의 길로 들어선 선생님께서는 약 50년에 걸쳐 수많은 학생들을 배출하였고 그로 인해 우리나라 음악계에 큰 획을 그은 명스승이다. 김남윤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2005년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당시 영재들만 다닌다던 한국예술종합학교 소속 예비학교에 입학하여 전설처럼 말로만 전해 듣던 대선생님이신 김남윤 선생님의 레슨을 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얼마나 긴장이 되던지 웬만한 콩쿠르 보다 떨려 레슨 수일 전부터 무슨 옷과 신발을 신어야 할지, 혹여 질문을 던지실 때 어떤 답변을 해야 할지 등 몇 날을 머릿속으로 레슨 장면을 미리 그려보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간헐적으로 선생님께 레슨을 받다가 고등학교 재학 무렵 선생님께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입학을 권하셨고 시험을 치른 후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김남윤 선생님과의 본격적인 바이올린 공부가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소위 "영재" 와는 거리가 먼 그저 착실하고 무던한 학생이었는데 학교에는 너무나도 반짝이는 재능과 또래에게 보기 힘든 탁월한 자질을 가진 학생들이 넘쳐났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늘 한결같이 열심인 나를 믿어 주셨고 사실은 그 우직함이 연주자로 성장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스스로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고 생각하던 어린 나는 선생님의 무한한 믿음으로 더욱 바이올린 공부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고 선생님께서는 그런 나의 모습을 알아보시고 무섭게 몰아붙이시며 나의 실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향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3년을 하고 나니 선생님께서는 이제는 국제콩쿨에 출전해 보라고 권유하셨고 스스로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지만, 선생님께서는 알 수 없는 확신을 하시듯 이제는 시작해 보아도 될 때라며 완고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국제콩쿨을 나가기 2년 만에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게 되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선생님께서는 그 당시 나의 실력으로 콩쿨 출전을 권유하신 것이 아닌, 나라는 학생이 동기를 던져주었을 때 그 목표를 향해 매진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모습까지 미리 꿰뚫어 보신 것 같다.
퀸엘리자베스콩쿨 우승은 엄청난 쾌거였지만 예기치 못한 시점에 다소 갑작스럽게 연주자로 데뷔하게 되어 연주해 보지 않은 새로운 곡들을 연마해야 할 때는 없는 시간을 쪼개어 레슨을 봐주시곤 하셨다. 외국 연주를 가면 별다른 문제는 없는지, 밥은 잘 먹었는지, 연주는 성공적으로 마쳤는지 등 수시로 연락하시며 엄마처럼 챙겨 주셨다. 행여 내가 확신에 서지 않을 때는 본인 일처럼 고민하시고 함께 눈물을 흘리며 지혜롭게 헤쳐 나가려 고군분투하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렇게 13년 동안 바이올린을 넘어 나의 인생에 길라잡이셨고 갖은 두려움을 견뎌 낼 수 있던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인생을 살며 이토록 치열하고 격렬한 인연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선생님의 학생 사랑은 사제지간의 개념을 넘어 본인의 것을 다 내어주며 한 인간이 무척 잘되기를 바라는 강렬한 바램, 그것이 나의 스승의 사랑이었다.
나는 올해 3월부터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학생을 가르친다는 일은 비단 학문적 지식이나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 이상으로 스승과 제자가 서로 믿음으로 관통하여 깊은 곳에 꿈틀거리는 능력을 최대치로 이끌어 내어 그것을 함께 예술로 승화시키는 그 뜨거운 무언가라는 것을 나의 선생님을 보며 배울 수 있었다. 매일 아침 학교에 출근해 나의 책상 앞에 앉으면 학생 임지영이 선생님께 가르침 받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비록 선생님의 교수실은 아니지만 나의 공간에서 나의 학생들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 속에서 일렁이는 열정을 느낄 때 선생님의 짙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평생 연주 활동만 했다면 아마 느끼기 어려울, 평생을 이 자리에 앉아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가늠할 수 없는 큰 사랑과 열정을 내어주신 김남윤 선생님을 매일 추억 할 수 있어 정말 행운이라 생각한다.
지난 달 3월 12일 한국 바이올린계의 대모이신 김남윤 교수님께서 작고하셨다. 20대부터 스승의 길로 들어선 선생님께서는 약 50년에 걸쳐 수많은 학생들을 배출하였고 그로 인해 우리나라 음악계에 큰 획을 그은 명스승이다. 김남윤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2005년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당시 영재들만 다닌다던 한국예술종합학교 소속 예비학교에 입학하여 전설처럼 말로만 전해 듣던 대선생님이신 김남윤 선생님의 레슨을 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얼마나 긴장이 되던지 웬만한 콩쿠르 보다 떨려 레슨 수일 전부터 무슨 옷과 신발을 신어야 할지, 혹여 질문을 던지실 때 어떤 답변을 해야 할지 등 몇 날을 머릿속으로 레슨 장면을 미리 그려보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간헐적으로 선생님께 레슨을 받다가 고등학교 재학 무렵 선생님께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입학을 권하셨고 시험을 치른 후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김남윤 선생님과의 본격적인 바이올린 공부가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소위 "영재" 와는 거리가 먼 그저 착실하고 무던한 학생이었는데 학교에는 너무나도 반짝이는 재능과 또래에게 보기 힘든 탁월한 자질을 가진 학생들이 넘쳐났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늘 한결같이 열심인 나를 믿어 주셨고 사실은 그 우직함이 연주자로 성장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스스로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고 생각하던 어린 나는 선생님의 무한한 믿음으로 더욱 바이올린 공부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고 선생님께서는 그런 나의 모습을 알아보시고 무섭게 몰아붙이시며 나의 실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향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3년을 하고 나니 선생님께서는 이제는 국제콩쿨에 출전해 보라고 권유하셨고 스스로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지만, 선생님께서는 알 수 없는 확신을 하시듯 이제는 시작해 보아도 될 때라며 완고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국제콩쿨을 나가기 2년 만에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게 되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선생님께서는 그 당시 나의 실력으로 콩쿨 출전을 권유하신 것이 아닌, 나라는 학생이 동기를 던져주었을 때 그 목표를 향해 매진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모습까지 미리 꿰뚫어 보신 것 같다.
퀸엘리자베스콩쿨 우승은 엄청난 쾌거였지만 예기치 못한 시점에 다소 갑작스럽게 연주자로 데뷔하게 되어 연주해 보지 않은 새로운 곡들을 연마해야 할 때는 없는 시간을 쪼개어 레슨을 봐주시곤 하셨다. 외국 연주를 가면 별다른 문제는 없는지, 밥은 잘 먹었는지, 연주는 성공적으로 마쳤는지 등 수시로 연락하시며 엄마처럼 챙겨 주셨다. 행여 내가 확신에 서지 않을 때는 본인 일처럼 고민하시고 함께 눈물을 흘리며 지혜롭게 헤쳐 나가려 고군분투하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렇게 13년 동안 바이올린을 넘어 나의 인생에 길라잡이셨고 갖은 두려움을 견뎌 낼 수 있던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인생을 살며 이토록 치열하고 격렬한 인연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선생님의 학생 사랑은 사제지간의 개념을 넘어 본인의 것을 다 내어주며 한 인간이 무척 잘되기를 바라는 강렬한 바램, 그것이 나의 스승의 사랑이었다.
나는 올해 3월부터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학생을 가르친다는 일은 비단 학문적 지식이나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 이상으로 스승과 제자가 서로 믿음으로 관통하여 깊은 곳에 꿈틀거리는 능력을 최대치로 이끌어 내어 그것을 함께 예술로 승화시키는 그 뜨거운 무언가라는 것을 나의 선생님을 보며 배울 수 있었다. 매일 아침 학교에 출근해 나의 책상 앞에 앉으면 학생 임지영이 선생님께 가르침 받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비록 선생님의 교수실은 아니지만 나의 공간에서 나의 학생들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 속에서 일렁이는 열정을 느낄 때 선생님의 짙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평생 연주 활동만 했다면 아마 느끼기 어려울, 평생을 이 자리에 앉아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가늠할 수 없는 큰 사랑과 열정을 내어주신 김남윤 선생님을 매일 추억 할 수 있어 정말 행운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