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춤은, 마음을 비울 때 비로소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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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용걸의 Balancer-삶의 코어를 찾는 여행
비운다는 것.
국립발레단 입단 5년차였던 1999년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새로운 1000년의 시작인 밀레니엄(millennium), 2000년만을 바라보며 기대와 설렘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국립발레단원 신분으로 도전했었던 1997, 1998년 국제발레콩쿠르에서의 입상들은 나의 자신감을 더욱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높게만 느껴졌던 외국 발레단 입단에 대한 벽도 그리 높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꿈에서만 그리던 외국발레단에 대한 도전도 자연스레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주역이 보장되어 있었던 국립발레단에서의 위치와 과분한 보상들,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 등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었지만, 2000년이라는 해가 와 있을 땐 이미 해외에서 자리를 잡고 있을 내 모습만을 상상했었다. 그렇게 밀레니엄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같이 내 마음도 설레이고 있었다.
당시 지인을 통해 프랑스 파리국립오페라발레단의 견습단원 오디션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는데 순간 “이거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곧장 응시를 결정하게 되었고 1999년 그 해 12월을 끝으로 국립발레단원직을 사임했다. 그 오디션엔 운이 따라주었다. 5개월 계약 조건으로 2000년 초 드디어 파리오페라발레단에 견습 단원으로 입단을 하게 됐다.
하지만 내가 그리도 단단히 각오했었음에도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들은 나의 예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한국에서 비디오 테잎(VHS)영상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던 그 발레단만의 매력적인 발레스타일을 실제로 보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기쁘고 감격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그 스타일들을 섭렵하지 않으면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현실을 맞딱드리자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진다” 는 말의 의미를 그제서야 체감할 수 있었다.
5개월 뒤인 2000년 7월 종신 단원 오디션이 있었지만 자리는 단 하나. 콧대 높은 프랑스인들이 나를 선발할 거라는 기대는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은 매년 한번씩 자체 내 승급 오디션이 있다. 난 2000년 입단 후부터 매년 봐왔던 시험에서 2002년과 2005년에 각각 드미 솔리스트와 솔리스트로 승급을 하게 됐다. 이후 발레단을 사임했던 2009년까지 솔리스트로써 발레단 생활을 계속 해나갈 수 있었다.
한국의 국립발레단을 스스로 사임했었을 때와 파리오페라발레단 견습단원 오디션과 정단원 오디션에 도전했을 때, 그리고 파리오페라발레단 자체 내 승급 오디션에 도전해 승급했던 두 번의 해, 그리고 2009년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있는 이 시간까지 벌어진 모든 일들을 돌아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난 그걸 시간이 꽤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나의 마음 속 가득 차있는 것들을 비우지 않으면 원하는 새로운것으로 채울수 없다는 사실즉, '마음의 비움'이 매 순간마다 있었다는 사실이다.
때론 어떤 일에 대한 집착과 집념이 그 일을 성공으로 이끌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그 집착과 집념을 넘어서는 '비움'이라는 마음의 순수한 의미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 불가능할까.
내가 원하는 결과 그 한 가지만이 아닌 일어날 수 있을 모든 것들에 대한 가능성들을 완전히 열어둔 채,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가장 순수했던 때로 되돌아가 마음을 비운 상태로 현실에 임했을 때, 그런 시간이 존재했다. 그 시간은 내가 가장 원했던 결과들로 돌아왔고, 그렇게 나의 비워졌던 마음 속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원하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취해야만 하는 마음의 자세가 “마음을 비워야만 한다” 라고만 말하고 싶지는 않다.
비운다는 것,
다시 새로워 질 수 있을 나를 원해서만은 아닌,
더 나은 삶을 원해서만도 아닌,
살아가다보면서 채워지게 될 내 안의 많은 것들에 대한 비움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반백년을 살아온 지금,
비운다는 것에 대한 의미와 더불어 비워질 나의 마음속에 어떤 의미를 담아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기대감으로 다시 시작해 보고자 한다.
국립발레단 입단 5년차였던 1999년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새로운 1000년의 시작인 밀레니엄(millennium), 2000년만을 바라보며 기대와 설렘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국립발레단원 신분으로 도전했었던 1997, 1998년 국제발레콩쿠르에서의 입상들은 나의 자신감을 더욱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높게만 느껴졌던 외국 발레단 입단에 대한 벽도 그리 높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꿈에서만 그리던 외국발레단에 대한 도전도 자연스레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주역이 보장되어 있었던 국립발레단에서의 위치와 과분한 보상들,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 등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었지만, 2000년이라는 해가 와 있을 땐 이미 해외에서 자리를 잡고 있을 내 모습만을 상상했었다. 그렇게 밀레니엄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같이 내 마음도 설레이고 있었다.
당시 지인을 통해 프랑스 파리국립오페라발레단의 견습단원 오디션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는데 순간 “이거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곧장 응시를 결정하게 되었고 1999년 그 해 12월을 끝으로 국립발레단원직을 사임했다. 그 오디션엔 운이 따라주었다. 5개월 계약 조건으로 2000년 초 드디어 파리오페라발레단에 견습 단원으로 입단을 하게 됐다.
하지만 내가 그리도 단단히 각오했었음에도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들은 나의 예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한국에서 비디오 테잎(VHS)영상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던 그 발레단만의 매력적인 발레스타일을 실제로 보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기쁘고 감격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그 스타일들을 섭렵하지 않으면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현실을 맞딱드리자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진다” 는 말의 의미를 그제서야 체감할 수 있었다.
5개월 뒤인 2000년 7월 종신 단원 오디션이 있었지만 자리는 단 하나. 콧대 높은 프랑스인들이 나를 선발할 거라는 기대는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은 매년 한번씩 자체 내 승급 오디션이 있다. 난 2000년 입단 후부터 매년 봐왔던 시험에서 2002년과 2005년에 각각 드미 솔리스트와 솔리스트로 승급을 하게 됐다. 이후 발레단을 사임했던 2009년까지 솔리스트로써 발레단 생활을 계속 해나갈 수 있었다.
한국의 국립발레단을 스스로 사임했었을 때와 파리오페라발레단 견습단원 오디션과 정단원 오디션에 도전했을 때, 그리고 파리오페라발레단 자체 내 승급 오디션에 도전해 승급했던 두 번의 해, 그리고 2009년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있는 이 시간까지 벌어진 모든 일들을 돌아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난 그걸 시간이 꽤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나의 마음 속 가득 차있는 것들을 비우지 않으면 원하는 새로운것으로 채울수 없다는 사실즉, '마음의 비움'이 매 순간마다 있었다는 사실이다.
때론 어떤 일에 대한 집착과 집념이 그 일을 성공으로 이끌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그 집착과 집념을 넘어서는 '비움'이라는 마음의 순수한 의미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 불가능할까.
내가 원하는 결과 그 한 가지만이 아닌 일어날 수 있을 모든 것들에 대한 가능성들을 완전히 열어둔 채,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가장 순수했던 때로 되돌아가 마음을 비운 상태로 현실에 임했을 때, 그런 시간이 존재했다. 그 시간은 내가 가장 원했던 결과들로 돌아왔고, 그렇게 나의 비워졌던 마음 속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원하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취해야만 하는 마음의 자세가 “마음을 비워야만 한다” 라고만 말하고 싶지는 않다.
비운다는 것,
다시 새로워 질 수 있을 나를 원해서만은 아닌,
더 나은 삶을 원해서만도 아닌,
살아가다보면서 채워지게 될 내 안의 많은 것들에 대한 비움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반백년을 살아온 지금,
비운다는 것에 대한 의미와 더불어 비워질 나의 마음속에 어떤 의미를 담아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기대감으로 다시 시작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