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7년 전 성폭행 의혹과 관련해 제기된 민사 소송에서 패소했다.

9일(현지시간) AP통신 등은 E. 진 캐럴이 트럼프 전 대통령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 재판에서 뉴욕남부연방지방법원 배심원들이 성추행, 폭행, 명예훼손 등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만장일치로 판단했고, 총 500만달러(한화 약 66억원) 배상을 명령했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판결에 영국 가디언은 "미국 전직 대통령을 성범죄자로 규정한 최초의 판결"이라고 평가했고, CNN은 "배심원단이 캐럴의 주장을 만장일치로 믿었다는 것이 중요하다"며 "캐럴은 익명의 남성 6명과 여성 3명으로 구성된 배심원 그룹을 상대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시했다"고 전했다.

패션잡지 엘르의 칼럼니스트였던 캐럴은 1996년 봄 봄 뉴욕 맨해튼의 고급 백화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여성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데 조언해달라"며 유인했고, 이후 탈의실에서 성폭행을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캐럴 측 변호인은 "이 사건으로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려던 캐럴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었다"며 "이번 재판은 정의를 구현하고 캐럴이 자신의 인생을 되찾을 기회"라고 소송을 제기한 이유를 밝혔다.

이어 "증거를 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번 재판과 관련해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서 성폭행 시도 과정에서 발생한 폭행에 대한 피해보상과 함께 징벌적 배상을 요구했다.

소송이 제기된 후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난 그 여자가 누군지 모른다", "마녀사냥이다", "성범죄를 저리를 만큼 충분히 예쁘지 않다" 등의 발언을 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법률대리인 역시 재판에서 "캐럴이 자신의 책을 팔기 위해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강간 혐의를 날조한 것"이라며 "돈, 지위, 정치적인 이유로 허위 주장을 하면서 사회적인 시스템을 남용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지난달 25일 시작된 재판에 트럼프 전 대통령은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재판에 출석해 입장을 밝히는 대신 SNS를 통해 "모두 허구인 사기이며, 그녀의 변호인은 거물 정치 후원자에게 돈을 받는 정치꾼"이라는 주장을 이어가는 트럼프에게 담당 판사인 루이스 캐플런은 "배심원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행위가 선을 넘었다"며 "부적절한 행위"라고 경고했다. 그뿐만 아니라 법정 모욕죄 등을 적용할 수 있다는 암시까지 전하면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변호인은 "그런 행위를 자제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의 민사소송은 엄격한 증거를 기반으로 유·무죄를 가리는 형사 소송과 달리 원고와 피고 중 더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출하는 측이 승소하게 된다. 이번 재판에서 배심원단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폭행과 성적 학대가 있었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인정된다고 봤지만, 성폭행 혐의에 관해서는 판단할 수 없다고 봤다.

하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의 성추문 중 법원에서 성적 비위를 인정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또한 배심원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SNS를 통해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는 과정에서 '사기', '거짓말' 등의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 "캐럴에 대한 명백한 명예훼손 행위"라고 판단했다. 또한 그 행위가 "고의적이고 증오와 악의에 따른 행위"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부과된 500만달러의 보상액 중 200만 달러(약 26억5천만 원)는 성추행과 폭행에 대한 보상이고, 이와는 별도로 2만 달러(2천600만 원)는 성추행에 대한 징벌적 배상이었다.

또한 명예훼손에 대한 보상액은 270만 달러(약 35억8000만 원)였고, 명예훼손에 대한 징벌적 배상액은 28만달러(약 3억7000만원)로 책정됐다.

다만 이번 재판은 민사소송이었기 때문에 트럼프 전 대통령은 수감 등 형벌은 받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재판이 현재 진행 중인 '성추문 입막음' 형사재판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관심이 쏠리는 상황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대선 직전 자신과의 성관계 사실을 폭로하려던 성인 배우에게 거액을 지급하면서 회사 기록을 위조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미국의 전·현직 대통령 중 최초의 형사 기소다.

해당 사건의 핵심은 전직 포르노 배우 스토미 대니얼스에게 2006년 혼외 성관계 발설을 막으려고 대선 직전 13만 달러(약 1억7000만원)를 지급했다는 혐의다. 또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친구가 경영하던 타블로이드지를 통해 한때 불륜 관계였던 플레이보이 모델 캐런 맥두걸에게 15만달러(약 2억원)를 지급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또한 이를 숨기기 위해 허위 자료를 만들고, 개인 변호사 비용을 가족 기업인 트럼프 그룹을 통해 변제하면서 회사 장부에 '법률자문료'라고 기재한 혐의도 받는다.

해당 혐의 역시 트럼프 전 대통령은 SNS를 통해 무죄를 주장하며 정치적인 의도라는 취지의 글을 게재했고, 재판부는 "SNS로 대중을 선동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이 재판은 내년 이후에 진행될 것으로 관측된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