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 전무, 배상 일부 그쳐…"한전에 피해보상 요구" 비대위 출범
막대한 예산 없인 전선 지중화 엄두 못 내…"위험 구간부터 필요"
송전선 주변 나무베기 강화·전신주 주변 침엽수는 내화수종으로
[강릉산불 한달] ③ 계속되는 '전선 단선' 산불…불보듯 뻔한 책임 공방
강릉산불 원인이 '강풍에 쓰러진 나무에 의한 전선 단선'임이 유력한 가운데 책임 소재를 두고 소송전으로 비화할 공산이 크다.

이재민들이 약 한 달 만에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한국전력공사(한전)를 상대로 피해보상을 요구하기로 하면서 집단소송의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전선 단선으로 말미암은 산불만 네 차례 발생하는 등 전선 단선이 더는 간과할 수 없는 산불의 직간접적인 원인으로 가세하면서 이를 막을 근본적인 대책 마련도 시급하다.

◇ 처벌도 책임도 제한적…'과실과 산불 간 인과관계'가 쟁점
이번 산불의 원인을 수사 중인 경찰은 현재까지 강풍으로 나무가 부러지면서 전선을 단선시켰고, 그 결과 전기불꽃이 발생해 산불을 일으킨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장에 단선된 전선과 발화지점이 일치하는 점과 지역 주민들도 비슷한 시간에 정전이 일어났다고 이야기하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감식 결과가 아직 나오진 않았으나 다른 원인이 있을 확률은 희박하다.

강풍과 전선 단선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산불이 발생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9년 4월 축구장 면적(0.714㏊) 1천700배가 넘는 산림 1천260㏊(1천260만㎡)를 잿더미로 만든 고성산불 역시 그 원인이 전선 단선으로 밝혀졌다.

이에 수사기관은 한전 직원들에게 전신주 관리를 소홀하게 한 혐의(업무상실화 등)를 적용해 법정에 세웠으나 1·2심에서 모두 무죄가 내려져 대법원 재판이 진행 중이다.

[강릉산불 한달] ③ 계속되는 '전선 단선' 산불…불보듯 뻔한 책임 공방
이보다 1년 앞선 2018년 3월 고성에서 발생한 산불 원인도 '전선 단선'으로 밝혀져 전기 설비시설 기준에 따른 안전조치를 미흡하게 한 혐의로 채석장 업체 대표 등 2명이 재판에 넘겨졌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4년 3월 속초시 청대산에서 발생한 대형산불의 원인 역시 '고압선에서 발생한 불꽃'이라는 수사 결과가 나왔으나 경찰은 인위적인 과실로 인한 범죄혐의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내사 종결했다.

결국 앞선 사례로 미루어봤을 때 쟁점은 '과실 여부'와 '과실과 산불 간 인과관계'로 요약된다.

형사처벌이 전무한 가운데 죗값을 묻는 일은 차치하더라도 손해배상을 두고 치열한 법정 다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강릉산불 피해 이재민 180명은 지난달 29일 강릉 아레나에서 '강릉산불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비대위는 한전 측에 과실이 있다고 보고, 최근 법률 전문가들과 2차 면담을 마치는 등 소송과 관련한 자문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이재민들의 요구를 충족할 만한 보상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2019년 고성산불의 경우 이재민들이 한전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지만, 청구액(265억여원) 중 3분의 1 수준인 87억여원만 인용돼 법정 다툼이 2심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최양훈(48) 비대위원장은 "가장 중요한 건 한전의 피해보상과 진정한 사과를 받아내는 일"이라며 "고성산불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피해를 온전히 보상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강릉산불 한달] ③ 계속되는 '전선 단선' 산불…불보듯 뻔한 책임 공방
◇ 예산 장벽에 지중화율 답보…송전선로 주변 나무 제거부터
이런 산불을 막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으로는 전선을 땅속에 묻고 전신주를 없애는 지중화가 꼽힌다.

강원도에 따르면 전신주를 통해 연결되는 배전 선로의 도내 지중화율은 지난해 10월 기준 10.6%로 전국 평균(20.1%)을 밑돈다.

시군별로 살펴보면 춘천(22.56%)과 원주(22%)만이 유일하게 20%를 넘겼다.

동해안 6개 시군은 강릉(16.2%), 동해(13.53%), 양양(12.83%), 속초·고성(11.55%), 삼척(9.48%)로 10% 안팎에 불과하고, 나머지 시군은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문제는 예산이다.

전기사업법상 지방자치단체장은 전선 지중화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전기사업자에게 이를 요청할 수 있다.

다만 공익적인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비용의 절반을 부담해야 한다.

지중화는 비용이 지상 설치보다 20배 수준이다.

불과 500m 구간도 적게는 수억원에서 많게는 수십억원이 든다.

서울에서도 자치구 간 지중화율이 2∼3배 격차가 나는 이유다.

김진태 강원지사가 "국민으로부터 전기료를 받아 운영하는 공기업이 이런 재난에 나 몰라라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지중화 사업에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촉구한 바 있으나 현실은 지자체의 결심과 예산확보가 맞물려야 한다.

이시영 강원대 방재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예산 문제 등을 고려하더라도 국가중요시설이나 인명피해가 우려되는 위험지역을 우선해서 전선을 지중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강릉산불 한달] ③ 계속되는 '전선 단선' 산불…불보듯 뻔한 책임 공방
전신주 주변 나무 제거도 대안으로 검토되고 있다.

전기사업법은 선로고장과 재해가 우려되면 다른 사람이 소유한 식물을 변경하거나 제거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단 식물 주인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변경 또는 제거한 뒤에는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

한국전기설비규정에 따라 특고압 가공전선은 22.9kV(킬로볼트)의 경우 1.5m, 765kV의 경우 10.52m 이상 간격을 둬야 한다.

산업통상자원부, 산림청, 한전은 최근 '전력망 인근 산불 방지 및 산림 보호를 위한 업무협력 간담회'를 열고 송전선 주변 나무 벌채를 강화하기로 했다.

간담회에서는 대규모 송전 선로가 통과하는 강원 영동 6개 시·군을 '나무에 의한 전기설비 화재 위험 집중점검 지역'으로 선정하는 방안이 우선 마련됐다.

이들 기관은 해당 지역을 통과하는 전력선 주변의 나무 상태를 대대적으로 재점검하고 땅 소유주의 동의를 구해 벌채 작업을 진행키로 했다.

또 송·배전선로 일대에서 불이 잘 붙어 산불 위험이 큰 침엽수를 잘 타지 않는 수종으로 바꾸는 '산불 예방 숲 가꾸기'를 지속 확대해 나가고, 산불 초기 발견을 위한 지능형 영상 감시시스템 도입도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이시영 명예교수는 "사유림은 개인재산권 침해 때문에 진행이 어렵겠지만 국유림이나 공유림은 훨씬 수월할 것"이라며 "재해 위험 구간부터 전력 설비와 나무 간 최소한의 이격 공간을 두는 방안부터 먼저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강릉산불 한달] ③ 계속되는 '전선 단선' 산불…불보듯 뻔한 책임 공방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