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장소서 물 마시는 동작해라'…영화 같은 철통 보안 속 접선
국내 이슈별 행동 지시…21대 국회의원 연락처도 북한에 넘겨

간첩 활동을 한 혐의로 10일 구속 기소된 민주노총 전직 간부들이 받은 북한 지령문에는 대남 공작을 위한 조직 결성과 세부적인 활동에 관한 지시 사항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날 검찰에 따르면 전직 민주노총 조직쟁의국장(2021∼2023년 3월) A(52) 씨 등과 북한 공작원들이 주고받은 '대북통신문 약정 음어'에는 초월적인 존재라는 의미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총회장님'으로 표기됐다.

'김정은이 총회장님'…北 지령문 통해 드러난 조직적 공작 활동(종합)
북한 문화교류국은 '본사'로, 지하조직은 '지사' 등으로 불렸는데, 민주노총은 지하조직 지사의 지도를 받는 조직이라는 의미로 '영업1부'로 지칭됐다.

각각 지사장과 팀장으로 불린 A씨 등은 지하조직으로 새 인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북한이 지령한 5단계 절차인 '친교 관계 형성→사회 부조리에 대한 불만 촉발→사회주의 교양→비밀조직 참여 제안→적극적 투쟁 임무 부여' 과정을 그대로 실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포섭 과정은 대상자의 가정을 직접 방문해 경제 상황을 구체적으로 확인한 뒤 북한 문화교류국(본사)의 검열을 통해 최종 승인 받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북측은 A씨 등과 접선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요령을 지시하기도 했다.

그 내용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을 연상시킬 정도로 철통 보안 속에 이뤄졌다.

2019년 7월 10일자 지령문을 보면 지사장은 약속 시간 5분 전에 약속 장소 위치에서 대기하다가 정시에 '손에 들고 있는 생수 물병을 마시는 동작을 실행하라'고 적혔다.

이어 북측 공작원이 지사장의 동작을 확인한 뒤 7∼8m 거리에서 손에 들고 있던 선글라스를 손수건으로 두세차례 닦는 동작을 하면 양측이 은밀히 접선하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만약 미행이 포착되면 전화로 '두통이 오는데 병원이 가겠다'고 알려주겠다며, 지사장에게 미리 고지한 2차(예비) 장소로 갈 것을 지시했다.

통화하기 어려운 상황일 경우 북측 공작원이 담배를 피워 물면 미행이 달렸다는 신호로 알고 자연스럽게 장소를 이탈하라는 강령도 전파했다.

검찰 관계자는 "영화 시나리오처럼 북측이 특정 행동을 정해줬다"며 "그에 따라 접선이 이뤄진 게 확인된 최초 사례"라고 밝혔다.

민주노총 홈페이지와 유튜브도 대북 연락 수단으로 활용됐다.

상대 조직원의 활동 여부나 의사 등을 확인해야 하는데 이메일이나 클라우드 등 암호화 프로그램이 제대로 잘 작동하지 않는 경우를 대비한 방법이다.

수사 당국은 실제 민주노총 홈페이지에서 북한이 지령한 단어인 '실개천' 명의의 게시글을 확인한 것으로 파악됐다.

북측은 A씨 등에게 유튜브 동영상 링크 주소를 보낸 뒤 해외 접선이 불가능하다면 댓글에 '오르막길' 단어를 포함한 글을 매달 18∼20일에 올리고 출장이 가능한 두 달 전엔 '토미홀' 단어를 올려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밖에 북한은 민주노총을 내세워 주요 사회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물리적·폭력적 수단을 동원해 투쟁을 전개하라고도 주문했다.

2019년 2월엔 당시 야당 인사의 5·18 망언을 계기로 농성 투쟁 및 촛불 시위를 진행할 것과 같은 해 4월에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대비해 계란 투척, 화형식, 성조기 찢기 등의 방법을 연구해 실천하라고 했다.

북측은 그해 7월 국내에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일어나자 일장기 화형식, 일본인 퇴출 운동, 대사관 및 영사관에 대한 기습 시위 등 반일 투쟁도 적극적으로 벌여달라고도 요구했다.

2021년 5월과 7월 지령문에는 특정 보수 언론매체를 가짜뉴스 전파 소굴로 간주하는 서명운동과 구독 거부, 시청 거부 운동 등을 전개하는 등 신문사 폐간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해달라고 적시됐다.

A씨 등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제21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의 휴대전화 번호 등 개인정보도 전달한 것으로 파악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