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로 '좀비'의 원조..카리브해의 빛나는 섬, 아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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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박정원의 글로 떠나는 중남미여행
퀭한 눈을 드러내며 피로 얼룩져 뒤틀린 사지를 위태롭게 움직이는 좀비들의 르네상스! 과거 일부 마니아의 B급 취향으로 여겨졌던 좀비가 21세기 대중문화를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이 유행은 드라마와 영화, 소설과 웹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좀비는 이미 우리 일상 깊숙이에 침투해 있다.
주체성을 상실한 채 영혼 없이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존재를 상징하며, 그 존재의 쓸모없음이나 혐오를 드러내기 위해 좀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좀비사회’ ‘좀비기업’ ‘청년좀비’ 등의 신조어가 한국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등장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좀비 열풍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는 좀비의 역사적 기원에 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미국 문화의 창조물로 파악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은 국적 불명의 괴물이나 그 변종으로 생각한다. 우리에게 좀비는 탈역사화된 잉여 존재인 셈이다. 하지만 이 흉측한 돌연변이는 아름다운 해변으로 알려진 카리브 지역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보여주는 역사 속의 존재다. 이야기는 17세기 카리브의 섬나라 아이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인들이 제일 먼저 도착한 이 섬에는 ‘타이노(Tainos)’라고 불리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식민화 과정에서 이들은 노역으로 인해, 그리고 <총·균·쇠>라는 역사 서적에서 설명해주듯이 유럽인과 함께 들어온 전염병으로 인해 전멸하고 말았다.
사라져버린 원주민을 대체할 노동 인력이 필요했던 정복자들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공수해 오는 것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흑인 노예무역은 이렇게 시작됐고, 이후 노예선에 실려 아이티섬에 도착한 흑인들은 노예상인들에 의해 북으로는 미국으로, 남으로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까지 보내졌다. 17세기 중반 아이티는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라는 세 대륙을 이어주는 삼각무역의 중심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잡혀 온 엄청난 숫자의 흑인이 사고 팔리는 노예시장과 함께 당시 유럽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설탕의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플랜테이션 농업이 번창했다. 백인 농장주들이 강제 고용한 흑인들의 노동으로 생산된 사탕수수는 다시 유럽으로 수출됐다.
하지만 유럽 전체 설탕 소비의 약 절반을 생산하며 막대한 부의 창출에 기여한 흑인들에게 돌아오는 몫은 없었다. 이들은 주로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거주하다 아메리카로 건너온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됐다. 대서양을 건너는 디아스포라의 경험 속에서 상당수는 목숨을 잃었으며, 생존한 이들도 신대륙의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만 했다. 노예 상태라는 조건 속에서 이들이 기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프리카에서 함께 건너온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 풍속, 종교였다.
카리브의 부두교(voodoo)는 이런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 서구에서는 인형을 찌르며 증오하는 상대에게 저주를 퍼붓는 원시적인 미신으로 치부되지만, 이 종교는 서아프리카로부터 유래한 다양한 토속신앙의 일부였다. 신대륙에 온 흑인들은 원래 ‘영혼’을 뜻하는 이 부두를 자신들의 삶을 의탁하는 유일한 종교이자, 동시에 일종의 비밀 결사체로 발전시켰다.
부두교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 공동체의 생존과 결속을 위해 지도자인 주술사를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문화와 규율을 만들었다. 그리고 때로는 백인 농장주들의 학대와 억압에 대항해 저항과 반란을 일으키곤 했다.
농장주들에게 이는 골칫거리이자 잠재적 위협이었다. 이들은 흑인 노예들이 아무런 불만 없이, 즉 ‘영혼’ 없이 복종하고 일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영리하게도 흑인들의 전통을 역으로 활용해 지배를 공고히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좀비 형벌이다.
부두교 전통에서는 공동체의 규범을 위반하고 해악을 유발하는 이들에게 복어의 독을 주성분으로 한 약물을 이용해 뇌의 판단 기능을 마비시키도록 했다. 이를 통해 명령과 통제를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무의지적 존재로 변하고 마는데 이렇게 영혼을 상실한 유령, 혹은 죽은 자의 영혼을 좀비(zombie)로 부르게 됐다.
백인 농장주들은 부두교의 지도자격인 주술사를 대리 통치자로 이용하곤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흑인들을 좀비 상태로 만들도록 사주했다. 이들을 충직한 노예 상태로 영속화하는 것이 대농장 제도와 식민 통치를 유지하는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전략이 끝까지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인구의 90%가 흑인이었던 아이티는 1804년 발생한 혁명을 통해 독립 공화국이 수립됐다. 식민 모국이었던 프랑스혁명이 내걸었던 자유, 평등, 박애라는 가치를 받아들이고,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피부색과 인종적 차이로 발생하는 식민주의와 차별까지 철폐하려는 정신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마침내 흑인들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노예제 폐지를 선포했다. 비유하자면 과거 좀비 상태로 살아온 흑인들의, 말하자면 ‘좀비의, 좀비에 의한, 좀비를 위한’ 반란이었던 셈이다. 그 후 최초의 혁명 정신은 내부 분열과 서구 열강의 경제적 봉쇄로 퇴색됐고, 섬은 엄청난 부침과 혼란의 소용돌이를 겪게 됐다. 하지만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 혁명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부정할 수 없는 유산으로 남아 있다.
좀비 탄생의 기원이 된 아이티의 역사는 우리에게 좀비에 대한 조금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좀비는 아무런 이유 없이 영혼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유령이나 잉여가 아니다. 좀비의 몸은 그냥 피 흘리고 뒤틀린 것이 아니다.
그리고 좀비는 이유 없이 선량한 이들을 위협하고 뒤쫓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좀비는 억압과 구속이라는 감춰진 서구의 역사를 증언하며,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는 시대의 낙오자이자 유령일 수도 있다는 점을. 오늘날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좀비 서사가 각양각색의 스토리를 보여주지만, 그 배경에는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우리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주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좀비 열풍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는 좀비의 역사적 기원에 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미국 문화의 창조물로 파악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은 국적 불명의 괴물이나 그 변종으로 생각한다. 우리에게 좀비는 탈역사화된 잉여 존재인 셈이다. 하지만 이 흉측한 돌연변이는 아름다운 해변으로 알려진 카리브 지역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보여주는 역사 속의 존재다. 이야기는 17세기 카리브의 섬나라 아이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인들이 제일 먼저 도착한 이 섬에는 ‘타이노(Tainos)’라고 불리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식민화 과정에서 이들은 노역으로 인해, 그리고 <총·균·쇠>라는 역사 서적에서 설명해주듯이 유럽인과 함께 들어온 전염병으로 인해 전멸하고 말았다.
사라져버린 원주민을 대체할 노동 인력이 필요했던 정복자들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공수해 오는 것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흑인 노예무역은 이렇게 시작됐고, 이후 노예선에 실려 아이티섬에 도착한 흑인들은 노예상인들에 의해 북으로는 미국으로, 남으로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까지 보내졌다. 17세기 중반 아이티는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라는 세 대륙을 이어주는 삼각무역의 중심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잡혀 온 엄청난 숫자의 흑인이 사고 팔리는 노예시장과 함께 당시 유럽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설탕의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플랜테이션 농업이 번창했다. 백인 농장주들이 강제 고용한 흑인들의 노동으로 생산된 사탕수수는 다시 유럽으로 수출됐다.
하지만 유럽 전체 설탕 소비의 약 절반을 생산하며 막대한 부의 창출에 기여한 흑인들에게 돌아오는 몫은 없었다. 이들은 주로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거주하다 아메리카로 건너온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됐다. 대서양을 건너는 디아스포라의 경험 속에서 상당수는 목숨을 잃었으며, 생존한 이들도 신대륙의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만 했다. 노예 상태라는 조건 속에서 이들이 기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프리카에서 함께 건너온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 풍속, 종교였다.
카리브의 부두교(voodoo)는 이런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 서구에서는 인형을 찌르며 증오하는 상대에게 저주를 퍼붓는 원시적인 미신으로 치부되지만, 이 종교는 서아프리카로부터 유래한 다양한 토속신앙의 일부였다. 신대륙에 온 흑인들은 원래 ‘영혼’을 뜻하는 이 부두를 자신들의 삶을 의탁하는 유일한 종교이자, 동시에 일종의 비밀 결사체로 발전시켰다.
부두교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 공동체의 생존과 결속을 위해 지도자인 주술사를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문화와 규율을 만들었다. 그리고 때로는 백인 농장주들의 학대와 억압에 대항해 저항과 반란을 일으키곤 했다.
농장주들에게 이는 골칫거리이자 잠재적 위협이었다. 이들은 흑인 노예들이 아무런 불만 없이, 즉 ‘영혼’ 없이 복종하고 일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영리하게도 흑인들의 전통을 역으로 활용해 지배를 공고히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좀비 형벌이다.
부두교 전통에서는 공동체의 규범을 위반하고 해악을 유발하는 이들에게 복어의 독을 주성분으로 한 약물을 이용해 뇌의 판단 기능을 마비시키도록 했다. 이를 통해 명령과 통제를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무의지적 존재로 변하고 마는데 이렇게 영혼을 상실한 유령, 혹은 죽은 자의 영혼을 좀비(zombie)로 부르게 됐다.
백인 농장주들은 부두교의 지도자격인 주술사를 대리 통치자로 이용하곤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흑인들을 좀비 상태로 만들도록 사주했다. 이들을 충직한 노예 상태로 영속화하는 것이 대농장 제도와 식민 통치를 유지하는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전략이 끝까지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인구의 90%가 흑인이었던 아이티는 1804년 발생한 혁명을 통해 독립 공화국이 수립됐다. 식민 모국이었던 프랑스혁명이 내걸었던 자유, 평등, 박애라는 가치를 받아들이고,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피부색과 인종적 차이로 발생하는 식민주의와 차별까지 철폐하려는 정신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마침내 흑인들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노예제 폐지를 선포했다. 비유하자면 과거 좀비 상태로 살아온 흑인들의, 말하자면 ‘좀비의, 좀비에 의한, 좀비를 위한’ 반란이었던 셈이다. 그 후 최초의 혁명 정신은 내부 분열과 서구 열강의 경제적 봉쇄로 퇴색됐고, 섬은 엄청난 부침과 혼란의 소용돌이를 겪게 됐다. 하지만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 혁명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부정할 수 없는 유산으로 남아 있다.
좀비 탄생의 기원이 된 아이티의 역사는 우리에게 좀비에 대한 조금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좀비는 아무런 이유 없이 영혼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유령이나 잉여가 아니다. 좀비의 몸은 그냥 피 흘리고 뒤틀린 것이 아니다.
그리고 좀비는 이유 없이 선량한 이들을 위협하고 뒤쫓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좀비는 억압과 구속이라는 감춰진 서구의 역사를 증언하며,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는 시대의 낙오자이자 유령일 수도 있다는 점을. 오늘날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좀비 서사가 각양각색의 스토리를 보여주지만, 그 배경에는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우리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주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