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님은 어떤 맥주를 좋아하세요?" 최근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관객과 함께하는 공개리허설로 진행했는데, 중간중간 관객과의 대화 중 한 관객이 나에게 물어봤다. 분명 그 사람은 맥주의 종류 혹은 맥주회사의 이름을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질문을 듣는 순간, 내 머리 위에는 연주 후의 나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의 답은 엉뚱하지만 시원하게 나왔다. "공연을 마치고 바로 마시는 맥주요."
'지휘자님은 어떤 맥주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든 생각들
나는 연주 전 음식을 별로 먹지 않는다. 징크스 같은 것은 아니고, 그저 연주 중 발생할 수 있는 생리현상에 신경이 쓰여서다. 오랜시간 그렇게 해오다 보니 습관이 됐다. 하지만 바그너 오페라 '로엔그린'을 지휘할 때처럼 예외는 있다. 이 오페라 연주에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역시나 생리현상 걱정 때문에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로엔그린을 지휘했다. 하지만 긴 시간과 많은 체력 소모 탓에 기운이 빠져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긴 작품을 할 때는 공연 전 식사를 하곤 한다.

유럽에선 대개 무대 뒤에 출연자들을 위한 카페테리아가 운영된다. 여기서 맥주 등 주류와 식사거리를 판매하기에 연주 후 출연자들이 무대 뒤에서 바로 잔을 부딪힐 수 있다. (한국의 공연장에는 아쉽게도 무대 뒤에 출연자들을 위한 이런 카페테리아가 없다) 어찌되었든 식사를 하지 않고 연주를 한 후 고요한 대기실로 돌아와 맥주를 마시는 순간은 힐링 그 자체다. 연주 뒤에도 일부 아드레날린은 남아 있지만, 갑자기 밀려드는 피로와 갈증, 허기로 지친 몸과 마음을 맥주가 치유해주는 것이다.
'지휘자님은 어떤 맥주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든 생각들
2021년 서울시립교향악단 정기연주회를 처음 지휘했을 때의 일이다. 첫날 연주를 마치고 객석의 박수소리를 뒤로한 채 지휘자 대기실로 들어왔다. 정확히 그 해로부터 20년전 서울시향에 피아노 파트 객원단원으로 참여했던 기억부터, 지휘자로 20년만에 서울시향을 다시 만나 몇일 간 리허설하며 보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여러 복잡한 감정과 가슴뜨거워지는 감정들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그런데 아뿔사!
맥주가 없었다. 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갈증과 아드레날린을 식혀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순간, 나의 대기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는지 오랜 친구가 나타나 말한다. "어이~ 마에스트로, 냉장고에 맥주 식혀놨다. 수고했다. 친구가 우리 오케스트라 와서 함께 하니 좋네.조금 과장해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던 맥주였고, 눈물까지 핑도는 맥주였다. 모든 것이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치유. 실로 맥주는 수천년 간 인류와 함께 했다. 수천년 전 맥주는 술이라기보다 자연적으로 발효된 곡물, 묽은 죽같은 형태였다. 사람들 식사나 신들을 위한 제사음식으로 쓰였다. 그렇게 오랜시간이 지나 유럽의 중세시기에 들어서야 술과 비슷한 음료로 사람들이 마시기 시작했다.
'지휘자님은 어떤 맥주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든 생각들
맥주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로 호프가 있다. 이 호프의 암꽃 성분이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 역할을 하고 맥주 특유의 쓴 맛과 향기를 낸다. 500여 년 전 신성로마제국(훗날 독일지역)이 '맥주 순수령'을 공포해 맥주의 주 재료들을 정해놓기 이전에는 상당히 많은 재료들이 호프를 대신해 쓰였다. 중세시대 몇 백년 간 민간에서도 양조를 했지만, 약초를 전문적으로 다루던 수도원 등이 맥주를 심도있게 연구했다. 서양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의학(약초와 관련해)에 관해서도 지금까지 영향력 있는 인물인 성녀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 역시 맥주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성 힐데가르트는 여성의 사회활동이 거의 불가능했던 시대에 전대미문의 여성의 삶을 살았다. 그는 수녀원 두 곳의 원장을 맡아 수녀원을 이끌었고, 작곡가
·시인·자연과학자·의사·약초학자·작가·언어학자·예언가 등으로 방대한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천년 전에 작곡된 그의 성가곡들은 온전하게 악보로 남아 후대의 음악에 영향을 미치고 현재까지 불려진다. 그의 작품 중 '오르도 비르투툼'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음악으로, 오페라의 시초로 여겨진다.

그는 또 약초들을 연구하며 먼 미래에 호프가 맥주에 중요하게 쓰일 것을 알고 있었다. 성 힐데가르트는 호프가 가진 방부효과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호프로 만든 맥주가 곡물의 힘과 그 수분으로 사람을 살찌우게 하고 얼굴에 아름다운 색을 준다고 알고 있었다. 나아가 우울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영혼의 힘이 재생되는 것을 촉진시킨다고 했다.

물론 모든 것은 과하면 안 된다. 1000년 전 성 힐데가르트의 맥주는 현재의 맥주보다 알코올 도수가 현저히 낮았었던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연주 후 맥주 한 잔에서 얻는 치유의 순간이면 족하다. 성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작품 'Causae et Curae'에서 외쳤다. "Cerevisiam bibat!"(맥주를 마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