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예술에 화답한 침묵의 경의 [클래식 리뷰]
지난 1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서울시향 마르쿠스 슈텐츠의 바그너 반지' 공연의 막이 올랐다. 이번 공연 프로그램은 작곡가에게 새로운 출발점이 된 작품들로 꾸며졌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우울증으로 오랜 기간 절필했던 그가 다시금 용기를 갖고 내놓은 작품이며, 바그너는 <니벨룽의 반지>로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에서 벗어나 음악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음악극’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그런 만큼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의 극한을, 바그너는 서사의 극한을 시도하며 과감한 표현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프로그램에서 지휘자 마르쿠스 슈텐츠와 피아니스트 박재홍은 매우 훌륭한 조합이었다. 슈텐츠는 서울시향과의 연주마다 호평을 받았으며, 특히 독일 레퍼토리로 많이 기억되고 있어 이번 바그너 연주는 프로그램을 공개할 때부터 큰 기대를 모았다.

박재홍은 2021년 부소니 콩쿠르 우승자로, 1999년생의 젊은 에너지가 가득한 피아니스트다. 작년에 서울시향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던 그는 올해는 2번으로 그 감동을 이어갔다,

전반부는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이 먼저 연주됐다. 이 곡은 아름다운 선율과 서정적인 화음이 넘실대는가 하면, 거칠고 야성적인 리듬으로 감정을 폭발시키는 등 다양한 감정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대작이다.

피아니스트 박재홍은 1악장부터 음악을 이끌어가는 키를 잡았다. 홀로 연주하는 도입부터 최고조에 이르는 마무리까지 힘 있는 타건과 명료한 음향으로 내러티브를 주도했다. 그러면서도 극적으로 만들려고 애쓰기보다는 음악이 스스로 흘러가도록 하는 진행했다. 매우 인상적이었다.

반면 관현악은 한발 물러서서 공간적 판타지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 이러한 전략은 대규모로 세팅된 관현악이 공간을 공명시키며 작은 음량에서도 매우 압도적으로 다가왔고, 피아노가 멈춘 순간에는 축적된 에너지를 쏟아냈다. 그런데 이 포효는 사납고 거친 공격이 아닌, 준엄하고 유순한 포용이었다.

2악장은 부분에 따라 자유로운 템포로 진행한 것으로 보이며, 피아노와 관현악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기보다는 두 세계가 자연스레 공존하며 자유를 누렸다.

3악장에서 박재홍은 적극적으로 나서는 관현악에 더욱 밝고 선명한 소리로 대응했다. 그리고 아홉 뮤즈를 이끌고 파르나소스산으로 향하는 아폴로와 같이 관현악을 대단원으로 이끌었으며, 화려하고 절도 있는 신성한 축제로 마무리했다. 앙코르곡은 바흐의 <잘 조율된 건반 작품집 1권> 중 ‘전주곡 10번’으로, 라흐마니노프의 조카인 알렉산드르 실로티의 편곡이 연주됐다.
소리의 예술에 화답한 침묵의 경의 [클래식 리뷰]
후반부에 연주된 <반지: 관현악 모험>은 네덜란드의 음악가 헨크 더 플리허르(Henk de Vlieger)가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에서 발췌하고 편곡해 엮은 작품으로, 2017년에 서울시향이 연주한 적이 있었다. 이 곡은 음악적 내러티브 뿐만 아니라 원곡의 줄거리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네 개의 음악극에 걸친 대서사시를 오로지 기악만으로 70분 만에 전달해야 하는 작품이다.

슈텐츠가 지휘하는 서울시향은 ‘좋은 소리’를 만드는 데 중점을 두었다. 무대를 빈틈없이 채운 관현악단은 지휘봉에 맞춰 거대한 음향의 조화를 들려줬고, 유기적인 오케스트라를 구현했다.

낭만 시대에 관심을 모았던 음색의 구분도 돋보였다. 호른과 바그너튜바의 호른 앙상블, 트럼펫과 베이스트럼펫의 트럼펫 앙상블, 트롬본과 콘트라베이스트롬본의 트롬본 앙상블의 구분은 소리만으로도 극을 구성할 정도로 섬세했다. 특히 독특한 음색을 지닌 베이스트럼펫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

또 무반주로 객석에서 연주된 호른 솔로와 역시 무반주로 진행된 제1바이올린의 연주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극적인 밀도가 비교적 낮은 ‘신들의 황혼’이 거이 후반부 절반을 차지하면서 긴장감이 느슨해졌다.

마지막 대단원에 이른 후 모든 관악기가 화음을 연주하며 전곡을 마친 직후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예술의 숭고함에 대한 경의! 그곳에 함께 했던 모든 감상자는 이번 공연에서 받은 압도적인 감동을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송주호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