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인생을 포착하는 각자의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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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정소연의 탐나는 책
미하엘 하우스켈러 지음
김재경 옮김
<왜 살아야 하는가> (청림출판, 2021)
미하엘 하우스켈러 지음
김재경 옮김
<왜 살아야 하는가> (청림출판, 2021)
지금처럼 세상이 복잡하고 휙휙 바뀌어 갈 때, 뉴스에서는 리스크가 커진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세상의 위기를 금으로 만드는 모험가들은 리스크의 불확실성에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정답을 찾는 교육만 받아온 대다수 사람들에게, 급격한 변화는 여간 불편하고 불안한 게 아니다. 차라리 이렇게 이름을 바꿔 부르고 싶다. ‘우연’이라 불러본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현재 직업과 사업의 장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도 떨어진다. 점점 인간계도 자연세계처럼 목적이나 법칙이 희소해지고 있다. 요즘 나는 위대한 학자의 이론부터 한낱 인생철학까지, ‘법칙과 원칙은 드물고 대개는 여러 가지의 스토리다’라는 생각에 빠져 지냈다. 알고 보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기억 속에서 슬쩍 변신한 결과일지 모른다. <사피엔스>는 한마디로 말해, “인간은 상상의 성채를 쌓아올렸을 뿐” 아닌가.
건강한 삶이란, 우연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인정하고 자기 관점과 시선으로 스토리를 써나가는 일이라는 생각은 에너지가 되어준다. 거인의 성채 같았던 기성 지식의 중압감에 압도되지 않고 제 마음껏 생각과 행동을 표현할 용기가 솟아난다.
당위나 합리적 구실 없이 개연성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숙명 앞에 바이러스까지 평등하다. 그 속에서도 여느 생명체와는 다르게 의미망을 조직하며 살아가려는 인간에게는 스토리가 숨 쉴 공기나 마찬가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우연한 세상’을 첨예하게 사고해낸 철학자들을 서치했다. 그것이 유튜브에서 발견한 책 <왜 살아야 하는가(The Meaning of Life and Death)>이다. 다행히 신뢰할 만한 인문학 연구자들의 추천 목록에도 비교적 신간인 이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왜 살아야 하는가>는 근현대 인물 10인이 예리하게 간파해낸 우주의 스토리를 담아냈다. 이럴 땐 파티에 누구를 초대했느냐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니체,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부터 <모비 딕>의 허먼 멜빌과 <이방인>의 카뮈 등 소설가도 포함되었다. 자기계발서의 원조 윌리엄 제임스도 초대장을 받았으니, 이 책의 저자인 철학자 미하엘 하우스켈러는 퍽 개방적인 인물이다.
근대에 들어와, 인간은 신이 정해준 세계를 믿지 않게 되면서 ‘왜 존재해야 하는지, 무엇을 붙잡고 살아갈지’ 깊은 고민에 빠져들게 되었다. <왜 살아야 하는가>의 첫 장을 차지한 쇼펜하우어의 ‘세상 읽기’는 예상하다시피 매우 절망스럽다. 세상은 온통 고통뿐이라고 절규하며 좀처럼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한다. 현대인들은 우리 뇌 속에서 생각이 수시로 왜곡된다는 인지편향은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이 뚜렷한 이유 없이 게다가 수시로 무너져 내린다는 사실은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에 대한 충격 요법으로 쇼펜하우어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은 어떨지.
하우스켈러도 지적하듯이,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너무 난해해서 읽기가 고통스러운데, 여기서 책을 덮어서는 안 된다. 다음 장에서 다루는 키에르케고르의 철학도 퍽 흥미롭다. 세상 쿨 하게 즐거움을 만끽하며 진지한 관계에 구속받지 않고 살아가는 심미적인 태도를 그가 왜 비판하는지, 그런 식의 삶이 왜 적어도 한번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더 알아보자. 이어서, 현대인이 선망하는 철학자 니체 편에 와서는, “신은 죽었다”는 선언을 만나게 된다.
소설가에 대해서라면, 이들은 삶을 체에 쳐서 딱딱한 이론으로 만드는 데는 관심이 적고, 세계를 꿰뚫는 통찰 위에 작고 약한 인간들의 인생을 재구성해준다. 1956년에 발표된 일본 소설 <금각사>에 당대 유럽에서 출발한 카뮈 등의 실존주의와 부조리가 깊이 새겨진 것처럼, 뛰어난 문학은 시대정신과 철학을 품고 있거나 넘어서는 것 같다.
하우스켈러는 열 명의 세계관을 소개하며, 누구의 철학이 정답은 아니라고 싱거운 서문을 달았다. 그런 점이 여러 가지를 모은 엔솔로지 구성의 한계일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열 개의 곡을 담은 사운드트랙을 얻은 기분이 들었다. 보라색을 만드는 데는 빨강도 필요하고 파랑도 있어야 한다. 인쇄기의 4가지 색으로 구성하자면, 뜻밖에 노랑도 필수적이다.
불교와 주역에 익숙한 동아시아에서는 “인생은 고통, 집착하지 말고 순간을 살라”는 태도와 “우연성”이 낯설지 않다. 다만, 급격하게 뿌리가 뽑히며 물질 사회로 휩쓸려온 지금에 와서는, 다음 시대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동아시아가 예의 부지런한 태도로 ‘확고한 목표, 지속적인 도전, 오직 긍정주의’에 포위당하고 있다. 우연한 세상을 살아가는 해독제는 오히려 우연한 화학적 결합을 반기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 내일에 벌어질 일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것이다.(당장 출근도 힘든데, 너무 과한가?)
우선은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불안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늘 어깨를 짓누르던 알 수 없는 의무감을 내려놓아보자. 눈앞의 시간에 몰입해본다. 그럴듯한 여행지나 뭔가에 취한 상태가 아니더라도,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노래에 온전히 박자를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여름에 마셔볼 와인 칵테일의 레시피를 온 마음으로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현재 직업과 사업의 장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도 떨어진다. 점점 인간계도 자연세계처럼 목적이나 법칙이 희소해지고 있다. 요즘 나는 위대한 학자의 이론부터 한낱 인생철학까지, ‘법칙과 원칙은 드물고 대개는 여러 가지의 스토리다’라는 생각에 빠져 지냈다. 알고 보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기억 속에서 슬쩍 변신한 결과일지 모른다. <사피엔스>는 한마디로 말해, “인간은 상상의 성채를 쌓아올렸을 뿐” 아닌가.
건강한 삶이란, 우연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인정하고 자기 관점과 시선으로 스토리를 써나가는 일이라는 생각은 에너지가 되어준다. 거인의 성채 같았던 기성 지식의 중압감에 압도되지 않고 제 마음껏 생각과 행동을 표현할 용기가 솟아난다.
당위나 합리적 구실 없이 개연성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숙명 앞에 바이러스까지 평등하다. 그 속에서도 여느 생명체와는 다르게 의미망을 조직하며 살아가려는 인간에게는 스토리가 숨 쉴 공기나 마찬가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우연한 세상’을 첨예하게 사고해낸 철학자들을 서치했다. 그것이 유튜브에서 발견한 책 <왜 살아야 하는가(The Meaning of Life and Death)>이다. 다행히 신뢰할 만한 인문학 연구자들의 추천 목록에도 비교적 신간인 이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왜 살아야 하는가>는 근현대 인물 10인이 예리하게 간파해낸 우주의 스토리를 담아냈다. 이럴 땐 파티에 누구를 초대했느냐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니체,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부터 <모비 딕>의 허먼 멜빌과 <이방인>의 카뮈 등 소설가도 포함되었다. 자기계발서의 원조 윌리엄 제임스도 초대장을 받았으니, 이 책의 저자인 철학자 미하엘 하우스켈러는 퍽 개방적인 인물이다.
근대에 들어와, 인간은 신이 정해준 세계를 믿지 않게 되면서 ‘왜 존재해야 하는지, 무엇을 붙잡고 살아갈지’ 깊은 고민에 빠져들게 되었다. <왜 살아야 하는가>의 첫 장을 차지한 쇼펜하우어의 ‘세상 읽기’는 예상하다시피 매우 절망스럽다. 세상은 온통 고통뿐이라고 절규하며 좀처럼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한다. 현대인들은 우리 뇌 속에서 생각이 수시로 왜곡된다는 인지편향은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이 뚜렷한 이유 없이 게다가 수시로 무너져 내린다는 사실은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에 대한 충격 요법으로 쇼펜하우어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은 어떨지.
하우스켈러도 지적하듯이,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너무 난해해서 읽기가 고통스러운데, 여기서 책을 덮어서는 안 된다. 다음 장에서 다루는 키에르케고르의 철학도 퍽 흥미롭다. 세상 쿨 하게 즐거움을 만끽하며 진지한 관계에 구속받지 않고 살아가는 심미적인 태도를 그가 왜 비판하는지, 그런 식의 삶이 왜 적어도 한번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더 알아보자. 이어서, 현대인이 선망하는 철학자 니체 편에 와서는, “신은 죽었다”는 선언을 만나게 된다.
소설가에 대해서라면, 이들은 삶을 체에 쳐서 딱딱한 이론으로 만드는 데는 관심이 적고, 세계를 꿰뚫는 통찰 위에 작고 약한 인간들의 인생을 재구성해준다. 1956년에 발표된 일본 소설 <금각사>에 당대 유럽에서 출발한 카뮈 등의 실존주의와 부조리가 깊이 새겨진 것처럼, 뛰어난 문학은 시대정신과 철학을 품고 있거나 넘어서는 것 같다.
하우스켈러는 열 명의 세계관을 소개하며, 누구의 철학이 정답은 아니라고 싱거운 서문을 달았다. 그런 점이 여러 가지를 모은 엔솔로지 구성의 한계일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열 개의 곡을 담은 사운드트랙을 얻은 기분이 들었다. 보라색을 만드는 데는 빨강도 필요하고 파랑도 있어야 한다. 인쇄기의 4가지 색으로 구성하자면, 뜻밖에 노랑도 필수적이다.
불교와 주역에 익숙한 동아시아에서는 “인생은 고통, 집착하지 말고 순간을 살라”는 태도와 “우연성”이 낯설지 않다. 다만, 급격하게 뿌리가 뽑히며 물질 사회로 휩쓸려온 지금에 와서는, 다음 시대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동아시아가 예의 부지런한 태도로 ‘확고한 목표, 지속적인 도전, 오직 긍정주의’에 포위당하고 있다. 우연한 세상을 살아가는 해독제는 오히려 우연한 화학적 결합을 반기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 내일에 벌어질 일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것이다.(당장 출근도 힘든데, 너무 과한가?)
우선은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불안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늘 어깨를 짓누르던 알 수 없는 의무감을 내려놓아보자. 눈앞의 시간에 몰입해본다. 그럴듯한 여행지나 뭔가에 취한 상태가 아니더라도,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노래에 온전히 박자를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여름에 마셔볼 와인 칵테일의 레시피를 온 마음으로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