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소리의 질감을 갖고 씨름을 해야 하는 날이 있다. 들꽃잎처럼 여린 소리와 그 꽃의 줄기처럼 강인하게 이어져야 하는 라인의 상반된 의지가 완벽한 비율로 공존해야 하는 슈베르트 판타지의 오프닝을 붙들고 머리를 싸매는 나날들이 그렇다.

활 털이 아슬아슬하게 줄을 간질거리는 마찰을 만들어 내려면 팔꿈치의 위치와 오른팔이 열리는 속도와 각도, 그리고 손안에서 느껴지는 활의 밸런스를 1그램의 단위로 느껴내며 천천히, 민감하게 소리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런 날에는 신경이 머리 끝까지 곤두설 수 밖에 없다. 머리는 과열되고, 아주 작은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 귀에는 날이 선다. 오른팔을 계속 높게 들고 서있다 보면 어깨에 경련이 오기도 하고, 왼쪽으로 몸의 무게를 맞추고 활을 컨트롤 하다보면 상체가 비틀어져 왼팔까지 찌릿찌릿 전기가 온다. 무엇보다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변모하는 마음을 견디기가 힘들다.

이렇게 섬세하고, 연약하고, 여리고, 우아한 소리를 하루종일 연습한 날엔 클래식 특유의 자연스러운 소리가 정말이지 지겨워 죽을 것 같은 순간이 온다. 자, 락큰롤을 들어야 하는 시간이다.

메탈리카 (Metallica)나 메가데스 (Megadeth) 같은 클래식(?)한 메탈밴드도 좋지만, 1988년생인 나는 나인 인치 네일 (Nine Inch Nails)이나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 (Rage Against the Machine) 같은 랩, 힙합, 펑크, 일렉트로닉이 모두 섞여있는 장르 메탈이 좀 더 가까운 감성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깊은 베이스의 소리가 리듬의 그루브를 만들고, 그 위에 일렉트릭 기타의 시원하고 중후한 소리가 영혼을 울린다. 쿵, 쿵, 슈베르트 덕분에(?) 머리 끝까지 올라갔던 긴장감이 점점 땅으로 내려온다. 위로, 위로, 하늘로, 우주로 정화되어 날아가는 바이올린 소리만 맴돌던 머리에 거침없이 랩을 뱉어내는 거친 질감의 소리를 수혈하면, 어느샌가 일렉 기타의 그런지함에 최면되어 아래로, 아래로, 땅으로, 지구로 돌아오는 안정감을 느낀다.
슈베르트 연주가 꼬이는 날, 난 하드락 명반 RATM을 듣는다
RATM의 가장 영향력 있는 앨범이라면 누가 뭐래도 데뷔 앨범 ‘Rage Against the Machine’ 이다. 밴드 이름이 곧 앨범 이름인 셈인데, 특유의 반항아적인 사운드가 가장 날 것의 느낌으로 표현된, 그야말로 틴스피릿의 집약체라고 봐도 좋을 듯 하다.

‘F**K YOU, 니가 하라는 대로는 안해' 라는 가사처럼, 그들의 사운드는 정제되어 있지 않으며, 분노로 가득 차 있고, 자유를 갈망한다. 이 불량한 반란자들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나도 연주의 관습, 또는 전통의 굴레에서 벗어나 음악 그 자체, 그러니까 작곡자의 텍스트 그 자체를 나만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를 얻는 것만 같다.

이 앨범의 도발적인 사운드와 가사, 그리고 기저에 깔려있는 분노를 그저 젊음의 불안정성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자유를 갈망하며 주체적 사상을 강조하는 그들이 대표하는 것은 아마도 상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불만이리라.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큼 화나는 일은 없으니까.

이러한 좌절감을 표현하는 RATM의 음악적 방식은 바로 반복이다. 이 앨범의 모든 곡은 중독적인 베이스의 그루브, 혹은 파워풀하고 쫄깃한 기타 리프를 반복, 변형, 고조시키며 진행된다. 말하자면 씸 앤 베리에이션(Theme and Variation) 이다.

작곡자가 반복을 이용한다는 것은 같은 틀을 유지하면서 이야기의 맥락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는 음악적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반복은 또한 극적 요소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한번 말했을 때, 그리고 두번 말했을 때, 그리고 세번 말했을 때, 그리고 16번 말했을 때의 의미는 다르니까 말이다.
슈베르트 연주가 꼬이는 날, 난 하드락 명반 RATM을 듣는다
이쯤 되면 RATM과 슈베르트의 궁합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마저 든다. 슈베르트 또한 무한 반복을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작곡자이기도 하고, 또 상당히 반골적인 정치적 성향을 가진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정권에 저항하는 가곡을 만들기도 했고 청년들의 모임을 제한하는 경찰에 대항해 욕설을 내뱉다가 체포되기도 했던 시대의 반항아였다.

그는 결국 음악의 출판이 제한되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일평생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고 동시대의 관객에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동시대 음악인의 사랑은 듬뿍 받아 가히 음악인의 음악인으로서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예고되어 있는 반항아의 비극적 결말이기도 하다.

결국 반항아는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될 수는 있다. 누군가 나의 영역을 침범하는 날, 정당하지 않은 일을 감내해야 하는 날, 왠지 모든 것이 답답하고 우울해 다른 세상으로 훌쩍 떠나고 싶은 날, 닥친 일이 너무 막막해 숨이 막히는 날, 그런 날은 RATM, 혹은 슈베르트가 이끄는 판타지의 세계로 나를 맡겨보자. 상반되는 그들의 음악 중 어떤 것이 위안을 선물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내 안의 꼬인 감정을 풀어내든,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 오늘을 살아내 내일로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니까.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라면 그것이 랩이든, 바이올린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