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예술이란 비포장도로를 스스로 개척하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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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윤한결의 지휘와 작곡 사이
내내 바빴던 지난 5년, 특히나 바빴던 올해 2023년, 여러 큰 일들을 겪고 잠깐 숨 돌릴 시간이 생겨, 단 한번도 크게 돌아보지 않았던 지난 날들을 회상해보았습니다.
22년 전 2001년, 초등학교 입학 후 학교앞 피아노 학원을 다니던 도중 ㅡ연습은 안하고 이상한것만 만들어 쳐서ㅡ 작곡을 배우라고 권유를 받은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 날이 바로 음악가의 길이 저의 길이란 것을 처음 느낀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당연한듯 이 길을 걸어왔습니다.
2006년, 초등학교 졸업을 1년 앞둔 저는 중학생이 되면 음악을 배우러 서울로 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주변에 음악가는 아무도 없었고 그러라고 시킨 사람도 없습니다. 어릴적 가족과 친척들, 동네 친구들을 너무나도 좋아해서 고향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무엇에 홀린 듯 그렇게 당연한듯 홀로 길을 떠났습니다.
예원학교 입학식때 만난 친구들이 평생 처음으로 만난 또래 음악가와 예술가였습니다. 개울, 하천, 뒷산, 앞산, 피시방, 운동장밖에 없었던 제 주변이 갑작스럽게 음악과 예술로 뒤덮인 순간이었습니다. 겁이날만도 했지만 오히려 되게 신났던 기억이 납니다. 축구공 들고 정동길을 걷던 기억이 가장 많이 남습니다.
서울에서의 삶도 대구 외곽 작은 촌동네에서 자란 저에게는 큰 변화였고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특수한 입시제도와 그로 인해 제가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던 교육방식으로 인해 저는 당연한듯 자퇴를 하고 한국을 떠나 독일로 향하는 비행길에 올랐습니다.
뮌헨에서 작곡을 공부하게 되었고, 여러 작곡가들이 그렇듯 무대에 서는 일도 관심이 생겨 피아노와 지휘도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5년전부터는 여러 극장에서 일하다가 1년반 전 마지막 직장을 그만두고 현재 프리랜서 지휘자로 활동중입니다. 집을 떠난지 16년, 한국을 떠난지 12년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되돌아보니 저는 집과 가족을 떠나는 것 외에 큰 선택의 기로에 선 적도 없고, 물 흐르듯 언제나 당연하게, 길을 훤히 다 아는듯이 걸어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저는 매순간 전혀, 단 하나도 모르는 미지의 길들만 굳이 찾아 걸어왔더군요.
중학교 시절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 기악을 전공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다수의 친구들이 어릴 적부터 교류를 하며 음악 세계를 일찍부터 잘 아는 것이 부러웠고, 무엇보다 기악과에게는 배우고 발전할 수 있게 도와줄 좋은 교육 시스템이 무수히 많은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그 친구들도 어마어마한 연습량과 힘든 생활패턴, 부담감 등등 어려운 점이 많았겠지만, 그 친구들에겐 대회, 연주, 정기연주회 오디션 등등 눈 앞에 보이는 목표들이 있었죠. 반면 시골에서 올라와서 갑자기 작곡전공 학생이 된 저에게는 아무도 목표를 정해주지도, 뭘 해야할지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아마 선생님들도 모르셨을겁니다. 대회도, 오디션도, 연주기회도 당연히 없었습니다. 작곡이란 것 자체가 여전히 그 당시에는 모두에게 미지의 세계였던 것 같습니다. 3-4년 내내 예고, 대학교 입시준비라는 막연한 목표밖에 없었습니다. 이렇듯 제 첫 유학생활의 시작은 뭘 해야할지 하나도 모르는 미지의 연속이었습니다.
음악 세계에 대해 완전히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시 상황에 일찍부터 반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기악과 친구들은 솔리스트 오디션 준비하는데, 작곡전공이란 이유로 정기연주회 때 강제로 합창을 해야하는게 싫어서 교향곡 하나를 제멋대로 써갔다가 퇴짜를 맞기도 했고, 실기시험에서 작곡을 가장한 문제풀이에 정해진 틀을 지키지 않고 나만의 창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점수는 역시 바닥을 쳤고요. 그래도 원하지 않는 작곡(혹은 문제풀이)을 하고 좋은 점수 받던 것 보다 훨씬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렇게 급격하게 점수가 깎인 적이 이전에 없었는지 한 선생님께서 엄청 걱정하셨던 기억도 납니다.
예고에서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저는 자퇴를 하였고, 독일 유학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는 독일을 가본적도 독일에 지인도 없었습니다. 만 16살의 나이에 작곡과 학사로 독일 유학을 준비한 사람은 제가 아는 한, 제가 처음입니다. 어릴 때 독일로 유학을 간 기악과, 성악과 학생들은 많았고 여전히 많지만, 작곡과는 당시까지 정말 처음이라 음대 유학 준비 대행업체(?)도 저로 인해 처음으로 작곡과 학사 요강 및 미성년자 입시제도 등을 공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하면 오랜 시간 헤맸던 미지의 세계에서 길이 뻥 뚫리고 훤히 보일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더 미궁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좋은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많았지만 저를 위한 길잡이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던 길을 더 많이 보여주셔서 더욱이 혼란스럽게 되었습니다.
작곡은 창작이기에 물론 매우 주관적입니다. 이러한 작곡 세계에서도 아이디어나 기법이 좋으면 음악이 맘에 들지 않더라도 인정을 하는 등 암묵적 규칙이 있습니다. 오히려 지휘의 세계가 이보다도 훨씬 주관적인것 같습니다. 뚜렷히 보이는 지휘자의 음악적, 외적인 요소들과 능력들을 다 제외하고도 성격, 인상, 말투, 목소리, 문장구성능력, 상황대처능력, 재정관리능력 등 직접 이 세계에 뛰어들기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요소들이 모두에게 매순간 다르게 적용되는 걸 느낍니다. 지휘를 하면 할수록 더욱 뚜렷히 느끼게 됩니다.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바로 음악 자체가 무한한 미지의 세계이며 미궁속이라는 것입니다. 어릴 적 어떠한 정답, 성공이라는 단 하나의 혹은 특정한 길만 있을 줄 알았지만, 예술에는 무수히 많은 무한한 작은 비포장도로가 있고 예술가는 스스로 그 길을 개척해나가는 것이란 것입니다. 현재와 과거의 대가들과 그들이 남긴 명작들이 표지판으로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표지판들을 배치하고 길을 완성시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라는 것도요.
이 글을 쓰다보니 음악을 시작한 이후 평생을 매순간 맨땅에 헤딩하며 살아왔구나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삶이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어서 더이상 특별히 느끼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한편으론 제가 걸어온 길들이 저에게 언제나 완전한 미지의 세계의 미지의 길이었기에 오히려 주저하지 않고 마음 편히 부딪혀보고 발을 디딜 수 있었던게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면 저는 아마 단순하게 새로운 길,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좋아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부턴 많은분들이 모르실법한 지휘자로서 느끼고 겪는 미지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2006년, 초등학교 졸업을 1년 앞둔 저는 중학생이 되면 음악을 배우러 서울로 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주변에 음악가는 아무도 없었고 그러라고 시킨 사람도 없습니다. 어릴적 가족과 친척들, 동네 친구들을 너무나도 좋아해서 고향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무엇에 홀린 듯 그렇게 당연한듯 홀로 길을 떠났습니다.
예원학교 입학식때 만난 친구들이 평생 처음으로 만난 또래 음악가와 예술가였습니다. 개울, 하천, 뒷산, 앞산, 피시방, 운동장밖에 없었던 제 주변이 갑작스럽게 음악과 예술로 뒤덮인 순간이었습니다. 겁이날만도 했지만 오히려 되게 신났던 기억이 납니다. 축구공 들고 정동길을 걷던 기억이 가장 많이 남습니다.
서울에서의 삶도 대구 외곽 작은 촌동네에서 자란 저에게는 큰 변화였고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특수한 입시제도와 그로 인해 제가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던 교육방식으로 인해 저는 당연한듯 자퇴를 하고 한국을 떠나 독일로 향하는 비행길에 올랐습니다.
뮌헨에서 작곡을 공부하게 되었고, 여러 작곡가들이 그렇듯 무대에 서는 일도 관심이 생겨 피아노와 지휘도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5년전부터는 여러 극장에서 일하다가 1년반 전 마지막 직장을 그만두고 현재 프리랜서 지휘자로 활동중입니다. 집을 떠난지 16년, 한국을 떠난지 12년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되돌아보니 저는 집과 가족을 떠나는 것 외에 큰 선택의 기로에 선 적도 없고, 물 흐르듯 언제나 당연하게, 길을 훤히 다 아는듯이 걸어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저는 매순간 전혀, 단 하나도 모르는 미지의 길들만 굳이 찾아 걸어왔더군요.
중학교 시절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 기악을 전공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다수의 친구들이 어릴 적부터 교류를 하며 음악 세계를 일찍부터 잘 아는 것이 부러웠고, 무엇보다 기악과에게는 배우고 발전할 수 있게 도와줄 좋은 교육 시스템이 무수히 많은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그 친구들도 어마어마한 연습량과 힘든 생활패턴, 부담감 등등 어려운 점이 많았겠지만, 그 친구들에겐 대회, 연주, 정기연주회 오디션 등등 눈 앞에 보이는 목표들이 있었죠. 반면 시골에서 올라와서 갑자기 작곡전공 학생이 된 저에게는 아무도 목표를 정해주지도, 뭘 해야할지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아마 선생님들도 모르셨을겁니다. 대회도, 오디션도, 연주기회도 당연히 없었습니다. 작곡이란 것 자체가 여전히 그 당시에는 모두에게 미지의 세계였던 것 같습니다. 3-4년 내내 예고, 대학교 입시준비라는 막연한 목표밖에 없었습니다. 이렇듯 제 첫 유학생활의 시작은 뭘 해야할지 하나도 모르는 미지의 연속이었습니다.
음악 세계에 대해 완전히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시 상황에 일찍부터 반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기악과 친구들은 솔리스트 오디션 준비하는데, 작곡전공이란 이유로 정기연주회 때 강제로 합창을 해야하는게 싫어서 교향곡 하나를 제멋대로 써갔다가 퇴짜를 맞기도 했고, 실기시험에서 작곡을 가장한 문제풀이에 정해진 틀을 지키지 않고 나만의 창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점수는 역시 바닥을 쳤고요. 그래도 원하지 않는 작곡(혹은 문제풀이)을 하고 좋은 점수 받던 것 보다 훨씬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렇게 급격하게 점수가 깎인 적이 이전에 없었는지 한 선생님께서 엄청 걱정하셨던 기억도 납니다.
예고에서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저는 자퇴를 하였고, 독일 유학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는 독일을 가본적도 독일에 지인도 없었습니다. 만 16살의 나이에 작곡과 학사로 독일 유학을 준비한 사람은 제가 아는 한, 제가 처음입니다. 어릴 때 독일로 유학을 간 기악과, 성악과 학생들은 많았고 여전히 많지만, 작곡과는 당시까지 정말 처음이라 음대 유학 준비 대행업체(?)도 저로 인해 처음으로 작곡과 학사 요강 및 미성년자 입시제도 등을 공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하면 오랜 시간 헤맸던 미지의 세계에서 길이 뻥 뚫리고 훤히 보일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더 미궁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좋은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많았지만 저를 위한 길잡이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던 길을 더 많이 보여주셔서 더욱이 혼란스럽게 되었습니다.
작곡은 창작이기에 물론 매우 주관적입니다. 이러한 작곡 세계에서도 아이디어나 기법이 좋으면 음악이 맘에 들지 않더라도 인정을 하는 등 암묵적 규칙이 있습니다. 오히려 지휘의 세계가 이보다도 훨씬 주관적인것 같습니다. 뚜렷히 보이는 지휘자의 음악적, 외적인 요소들과 능력들을 다 제외하고도 성격, 인상, 말투, 목소리, 문장구성능력, 상황대처능력, 재정관리능력 등 직접 이 세계에 뛰어들기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요소들이 모두에게 매순간 다르게 적용되는 걸 느낍니다. 지휘를 하면 할수록 더욱 뚜렷히 느끼게 됩니다.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바로 음악 자체가 무한한 미지의 세계이며 미궁속이라는 것입니다. 어릴 적 어떠한 정답, 성공이라는 단 하나의 혹은 특정한 길만 있을 줄 알았지만, 예술에는 무수히 많은 무한한 작은 비포장도로가 있고 예술가는 스스로 그 길을 개척해나가는 것이란 것입니다. 현재와 과거의 대가들과 그들이 남긴 명작들이 표지판으로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표지판들을 배치하고 길을 완성시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라는 것도요.
이 글을 쓰다보니 음악을 시작한 이후 평생을 매순간 맨땅에 헤딩하며 살아왔구나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삶이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어서 더이상 특별히 느끼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한편으론 제가 걸어온 길들이 저에게 언제나 완전한 미지의 세계의 미지의 길이었기에 오히려 주저하지 않고 마음 편히 부딪혀보고 발을 디딜 수 있었던게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면 저는 아마 단순하게 새로운 길,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좋아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부턴 많은분들이 모르실법한 지휘자로서 느끼고 겪는 미지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