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 뜬 핏빛 포스터…마이크 넬슨의 '압도적 디스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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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박신영의 런던통신
사우스뱅크 센터 헤이워드갤러리
'멸종의 손짓: Extinction Beckons' 전
현실과 비현실, 사실과 허구의 복합적 경험
터너 프라이즈 두 차례 후보 올랐던 마이크 넬슨
2018년 광주 비엔날레 땐 국군광주병원을 예술로
사우스뱅크 센터 헤이워드갤러리
'멸종의 손짓: Extinction Beckons' 전
현실과 비현실, 사실과 허구의 복합적 경험
터너 프라이즈 두 차례 후보 올랐던 마이크 넬슨
2018년 광주 비엔날레 땐 국군광주병원을 예술로
지하철 전광판에 붙은 붉은 조명의 공포스러운 방의 이미지에 홀려 사우스뱅크 센터(Southbank Center)로 향했다. 그 곳에서는 마이크 넬슨(Mike Nelson, 1967년생)의 전시 ‘멸종의 손짓: Extinction Beckons’이 한창이었다.
마이크 넬슨은 영국을 대표하는 조각가이자, 장소 특정적 공간을 재건축하는 예술가이다. 그는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참여했으며, 2001년과 2007년 두 차례나 터너 프라이즈(Turner Prize) 후보로 선정될 만큼 영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알려진 현대미술가이다. 국내에서는 2018년 광주비엔날레에 초대되어 옛 국군광주병원을 예술작품으로 탈바꿈시킨 바가 있다.
‘멸종의 손짓’이라는 전시 제목은 넬슨이 오토바이 헬멧에서 발견한 ‘날 것 그대로’의 오브제라는 뜻의 ‘오브제 트루베’(Objet Trouvé) 에서 영감받은 것이다. 전시 제목이 말하듯 전시 공간은 오브제의 쇠퇴와 절망의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번 전시는 타 전시와 달리 ‘공포’를 하나의 테마로 잡았다. 핏빛에 물든 듯한 포스터에 홀려 찾은 전시장이지만, 입장 전부터 수차례 적힌 ‘답답함을 호소할 수도 있다’는 다수의 경고장이 지레 겁을 먹게 만든다.
전시장에 입장하자마자 맞이한 붉은 조명의 창고. 창고 선반에는 먼지가 쌓인 온갖 잡동사니들이 올려져 있었다. 막대 그릴, 고대 자물쇠가 달린 참나무, 강화 금속, 페인트를 칠하다 만 패널 등 창고에 있을 법한 물건들이 가득 놓여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 밝혀진 붉은 색의 조명이 아니었다면, 순간 ‘전시장을 잘못 입장했나?’라고 착각할 듯한 수준의 고증이었다. 이처럼 마이크 넬슨은 주로 가상의 공간을 재구축해 관람자로 하여금 현실과 비현실의 낯익은 낯설음(uncanny)를 느끼게 만든다.
관객들은 넬슨이 만든 창고에서 물건들을 관찰하며 각각이 지닌 역사와 공간이 담은 이야기를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넬슨의 상상적 서사를 공간으로 실현하는 데에 그가 중점을 두는 것은 오브제이다. 그의 작품에서 오브제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 공간에 기억과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단서이자, 재구성된 환경에 몰입하게끔 현실과 비현실을 이어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전달과 기다림’(The Deliverance and The Patience (2001))은 마치 차원의 이동을 하듯, 문으로 연결된 새로운 복도나 방을 지나다니는 포털 공간이다. 모든 공간에는 문이 있었고, 그 문을 열면,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마치 인셉션 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넬슨은 평소에도 SF소설을 자주 읽으며 소설로부터 상당한 예술적 영감을 받는다고 밝힌 바 있다. 그 역시 작품을 통해 현실이 반영된 비현실의 경계적 공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상상적 공간은 섬뜩할 만큼 친숙하면서도 인간의 존재가 결여된, 과거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작품은 1609년 버뮤다에서 버지니아로 향하던 난파선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그래서인지 여행사의 사무실을 모티브로 한 공간, 난파된 사람들의 옷가지를 모아둔 듯한 복도와 같은 역사적 단서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문을 연다는 행위는 일상적인 경험을 그대로 반영한 행위이다. 하지만 넬슨은 그 경험을 복제하되, 동시에 관람자를 위해 만들어진 이 공간 속에서 현실과 비현실, 사실과 허구를 복합적으로 경험하게 만들었다. 영화 속 한 장면과도 같았던, ‘트리플 블러프 캐니언(목간)’(Triple Bluff Canyon (the woodshed) (2004))은 대지미술의 대표 미술가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의 ‘목간’(Woodshed)(1970)을 넬슨 식으로 해석한 작품이다. 모래바람이 불어 흙, 먼지로 뒤덮인 넬슨의 목간은 켄트주립대학의 작품 창고건물을 형상화한 것이었고, 그 앞으로 펼쳐진 모래 위로 찢어진 타이어와 석유 드럼통이 놓여 있었다. 목간의 내부는 복도를 지나 암실을 거쳐 갈 수 있었다. 암실에 걸린 사진들은 이 작품이 걸프전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목간이 형상한 대학건물은 걸프전 반대 시위에 참여한 학생 4명이 살해된 곳이며, 암실 속 사진은 당시 시위 현장의 사진과 걸프전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이크 넬슨의 디스토피아적인 세계에 방문한 소감을 말하자면, 이번 전시는 전반적으로 압도적이고 몰입감이 있었다. 마이크 넬슨의 작품은 공상 과학 소설, 실패한 정치 운동, 어두운 역사 및 반문화를 엮어 하나의 일상적 공간을 재구성하는 일종의 수수께끼와도 같았다. 관객들은 그가 남긴 단서를 조합하고 각자의 이야기로 해석함으로써 넬슨이 남긴 미완의 서사를 마무리 지었기 때문이다.
전시의 테마가 공포인 이유 역시 납득이 되었다. 물론 공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관객마다 다르겠지만. 누군가는 붉은 조명에서 공포를 느낄 수도, 누군가는 인물이 없는 텅 빈 현실적 공간에서 공포를 느낄 수도, 또 누군가는 넬슨이 숨겨놓은 단서를 조합하며 밝혀지는 역사적 사실과 정치적 음모에서 공포를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이크 넬슨은 영국을 대표하는 조각가이자, 장소 특정적 공간을 재건축하는 예술가이다. 그는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참여했으며, 2001년과 2007년 두 차례나 터너 프라이즈(Turner Prize) 후보로 선정될 만큼 영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알려진 현대미술가이다. 국내에서는 2018년 광주비엔날레에 초대되어 옛 국군광주병원을 예술작품으로 탈바꿈시킨 바가 있다.
‘멸종의 손짓’이라는 전시 제목은 넬슨이 오토바이 헬멧에서 발견한 ‘날 것 그대로’의 오브제라는 뜻의 ‘오브제 트루베’(Objet Trouvé) 에서 영감받은 것이다. 전시 제목이 말하듯 전시 공간은 오브제의 쇠퇴와 절망의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번 전시는 타 전시와 달리 ‘공포’를 하나의 테마로 잡았다. 핏빛에 물든 듯한 포스터에 홀려 찾은 전시장이지만, 입장 전부터 수차례 적힌 ‘답답함을 호소할 수도 있다’는 다수의 경고장이 지레 겁을 먹게 만든다.
전시장에 입장하자마자 맞이한 붉은 조명의 창고. 창고 선반에는 먼지가 쌓인 온갖 잡동사니들이 올려져 있었다. 막대 그릴, 고대 자물쇠가 달린 참나무, 강화 금속, 페인트를 칠하다 만 패널 등 창고에 있을 법한 물건들이 가득 놓여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 밝혀진 붉은 색의 조명이 아니었다면, 순간 ‘전시장을 잘못 입장했나?’라고 착각할 듯한 수준의 고증이었다. 이처럼 마이크 넬슨은 주로 가상의 공간을 재구축해 관람자로 하여금 현실과 비현실의 낯익은 낯설음(uncanny)를 느끼게 만든다.
관객들은 넬슨이 만든 창고에서 물건들을 관찰하며 각각이 지닌 역사와 공간이 담은 이야기를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넬슨의 상상적 서사를 공간으로 실현하는 데에 그가 중점을 두는 것은 오브제이다. 그의 작품에서 오브제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 공간에 기억과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단서이자, 재구성된 환경에 몰입하게끔 현실과 비현실을 이어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전달과 기다림’(The Deliverance and The Patience (2001))은 마치 차원의 이동을 하듯, 문으로 연결된 새로운 복도나 방을 지나다니는 포털 공간이다. 모든 공간에는 문이 있었고, 그 문을 열면,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마치 인셉션 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넬슨은 평소에도 SF소설을 자주 읽으며 소설로부터 상당한 예술적 영감을 받는다고 밝힌 바 있다. 그 역시 작품을 통해 현실이 반영된 비현실의 경계적 공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상상적 공간은 섬뜩할 만큼 친숙하면서도 인간의 존재가 결여된, 과거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작품은 1609년 버뮤다에서 버지니아로 향하던 난파선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그래서인지 여행사의 사무실을 모티브로 한 공간, 난파된 사람들의 옷가지를 모아둔 듯한 복도와 같은 역사적 단서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문을 연다는 행위는 일상적인 경험을 그대로 반영한 행위이다. 하지만 넬슨은 그 경험을 복제하되, 동시에 관람자를 위해 만들어진 이 공간 속에서 현실과 비현실, 사실과 허구를 복합적으로 경험하게 만들었다. 영화 속 한 장면과도 같았던, ‘트리플 블러프 캐니언(목간)’(Triple Bluff Canyon (the woodshed) (2004))은 대지미술의 대표 미술가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의 ‘목간’(Woodshed)(1970)을 넬슨 식으로 해석한 작품이다. 모래바람이 불어 흙, 먼지로 뒤덮인 넬슨의 목간은 켄트주립대학의 작품 창고건물을 형상화한 것이었고, 그 앞으로 펼쳐진 모래 위로 찢어진 타이어와 석유 드럼통이 놓여 있었다. 목간의 내부는 복도를 지나 암실을 거쳐 갈 수 있었다. 암실에 걸린 사진들은 이 작품이 걸프전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목간이 형상한 대학건물은 걸프전 반대 시위에 참여한 학생 4명이 살해된 곳이며, 암실 속 사진은 당시 시위 현장의 사진과 걸프전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이크 넬슨의 디스토피아적인 세계에 방문한 소감을 말하자면, 이번 전시는 전반적으로 압도적이고 몰입감이 있었다. 마이크 넬슨의 작품은 공상 과학 소설, 실패한 정치 운동, 어두운 역사 및 반문화를 엮어 하나의 일상적 공간을 재구성하는 일종의 수수께끼와도 같았다. 관객들은 그가 남긴 단서를 조합하고 각자의 이야기로 해석함으로써 넬슨이 남긴 미완의 서사를 마무리 지었기 때문이다.
전시의 테마가 공포인 이유 역시 납득이 되었다. 물론 공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관객마다 다르겠지만. 누군가는 붉은 조명에서 공포를 느낄 수도, 누군가는 인물이 없는 텅 빈 현실적 공간에서 공포를 느낄 수도, 또 누군가는 넬슨이 숨겨놓은 단서를 조합하며 밝혀지는 역사적 사실과 정치적 음모에서 공포를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