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영화 너머의 음악영화, '위플래쉬'를 다시 봐야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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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윤성은의 Cinema 100
한국 관객들이 음악영화를 좋아한다는 속설은 사실일까. 근 10년간 있었던 몇몇 박스오피스들의 사례들만 봐도 근거는 확실해 보인다. ‘겨울왕국’(2013)은 북미를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린 영화고, ‘보헤미안 랩소디’(2018)는 퀸의 본고장인 영국보다 한국 관객들이 더 많이 관람했다.
국내에서만 약 1270만명을 동원하며 외화 역대 최다 관객수 4위에 랭크된 ‘알라딘’(2018)도 속설을 뒷받침한다. 국내의 ‘알라딘’ 신드롬은 북미에서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실사판 중 ‘미녀와 야수’(2017), ‘라이온 킹’(2018)이 더 흥행했다는 점과 확실히 대비되기도 한다. ‘위플래쉬’(2014) 또한 비교적 작게 개봉했으나 입소문을 타고 스크린수를 계속 늘려가며 약 160만 명을 동원한 음악영화로 데미언 셔젤 감독의 차기작인 ‘라라랜드’(2016)를 있게 한 중요한 작품이다.
그러나 ‘위플래쉬’는 앞서 언급한 영화들과는 다른 데가 있으니, 드러머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흥행한 음악영화들은 장르가 아예 뮤지컬이거나 가수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삽입곡의 유행과 함께 관람객수도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원스’(2006)도 ‘비긴 어게인’(2013)도 마찬가지다. ‘위플래쉬’에는 관객들이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나 대중적으로 알려진 음악이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의 새삼스러운 재즈 사랑 때문에 흥행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유명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의 히트작을 고루 들을 수 있는 ‘본 투 비 블루’(2015)나 재즈계의 전설, 마일스 데이비스에 관한 영화, ‘마일스’(2015)는 호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각각 약 10만 명, 약 1만 명 정도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쳤으니까.
즉, ‘위플래쉬’의 흥행 요인은 음악영화라는 장르 너머에 있다. 미국 최고의 음악학교를 배경으로 신입생 ‘앤드류’가 연습을 하는 데서 시작해 최고의 연주를 완성시키는 데서 끝나고, 그 사이에 그가 드럼세트에 앉아 있지 않은 신이나 드럼 소리가 끊기는 신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도 말이다.
‘위플래쉬’를 분석적으로 접근해 본 사람에게 어쩌면 이것은 대수롭지 않은 발견일 것이다. 이 영화는 음악을 느긋이 감상하게 만드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앤드류는 학교 최고의 지휘자이자 폭군으로 알려진 ‘플래쳐’ 교수를 만난다. 이후, ‘위플래쉬’는 폭군 선생과 소심한 제자라는 캐릭터 및 그 관계의 변화로 러닝타임 내내 관객들을 강하게 몰입시킨다. ‘위플래쉬’는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작품이지만, 플래쳐의 교육 방식과 앤드류의 자극된 욕망은 어릴 때부터 치열한 입시 전쟁을 겪어야 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한국 사회에서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요인이었다. 플래쳐는 학생들이 자신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1초 이상 연주를 듣는 경우가 없는 인물이다. 그는 반복해서 연주를 시키며 인신공격과 모욕은 물론 따귀에 물건 던지기까지 서슴지 않는데, 그 강도는 갈수록 더 심해진다.
대부분의 음악영화들이 음악을 정서적 안정감 혹은 해방감을 주도록 사용하는 것과는 반대로, ‘위플래쉬’의 연주장면들에서 발생되는 심리적 효과는 공포와 긴장감이다. 감독은 이것을 스릴러 장르의 형식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일례로 첫 번째 숏에서 카메라는 드럼 연습을 하는 앤드류에 천천히 다가간다. 깜짝 놀라며 연습을 멈추는 앤드류의 대사로부터 그 카메라는 플래쳐의 시점임을 알게 되는데 여기서 관객들에게 히치콕이 말하는 일종의 서프라이즈가 발생한다. 다음 장면에서 플래쳐가 시키는 연주에 몰입하던 앤드류가 앞을 쳐다봤을 때 그는 이미 사라지고 난 후이며, 앤드류와 마찬가지로 관객들의 기대는 한 번 더, 어긋나 있다. 이 강렬하면서도 싸늘한 오프닝 신은 말 그대로 시작일 뿐이다.
다음 신부터 이어지는 밀당, 즉 앤드류를 자극하는 플래쳐와 메인 드러머 자리를 따내기 위한 앤드류 사이에서의 크고 작은 사건들은 계속 관객들의 예측을 배신하고 미지의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대부분 앤드류를 띄웠다 추락시켰다를 반복하는 플래쳐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갈수록 자신의 욕망을 주체할 수 없어진 앤드류가 스승과 똑같이 폭력적으로 변하는 장면들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폭풍이 지나가고 둘 다 학교에서 쫓겨난 후, 두 사람이 인간적인 대화를 나눌 때는 더 이상의 갈등이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감독은 마지막 신까지 반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앤드류가 앤드류의 비열함을 뛰어넘어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고 최고의 연주를 들려주는 데서 영화가 끝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쾌감은 ‘위플래쉬’의 유일한 음악적 카타르시스와 정밀하게 조합되어 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재즈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의 ‘위플래쉬’는 상상할 수 없다. 이 영화의 모든 장면들은 재즈의 리듬에 맞추어 촬영되고 편집되었으며, 극대화된 영상과 사운드의 일체감은 완벽한 음악을 추구하는 서사와 함께 빈 틈 없이 드라마를 진행시킨다.
데미언 셔젤과 음악감독인 저스틴 허위츠의 재즈 사랑은 이러한 형식으로써도 충분히 표현된다. 이것이 음악영화로서 ‘위플래쉬’의 가치이며 ‘위플래쉬’가 음악영화여야만 하는 이유다. 데미언 셔젤의 다른 연출작들, ‘퍼스트맨’(2018), ‘바빌론’(2022)은 물론, 많은 인기를 누린 ‘라라랜드’도 ‘위플래쉬’만큼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는 우리가 언제든 ‘위플래쉬’를 다시 한 번 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이 아직 불혹도 되지 않은 감독의 최고작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국내에서만 약 1270만명을 동원하며 외화 역대 최다 관객수 4위에 랭크된 ‘알라딘’(2018)도 속설을 뒷받침한다. 국내의 ‘알라딘’ 신드롬은 북미에서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실사판 중 ‘미녀와 야수’(2017), ‘라이온 킹’(2018)이 더 흥행했다는 점과 확실히 대비되기도 한다. ‘위플래쉬’(2014) 또한 비교적 작게 개봉했으나 입소문을 타고 스크린수를 계속 늘려가며 약 160만 명을 동원한 음악영화로 데미언 셔젤 감독의 차기작인 ‘라라랜드’(2016)를 있게 한 중요한 작품이다.
그러나 ‘위플래쉬’는 앞서 언급한 영화들과는 다른 데가 있으니, 드러머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흥행한 음악영화들은 장르가 아예 뮤지컬이거나 가수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삽입곡의 유행과 함께 관람객수도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원스’(2006)도 ‘비긴 어게인’(2013)도 마찬가지다. ‘위플래쉬’에는 관객들이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나 대중적으로 알려진 음악이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의 새삼스러운 재즈 사랑 때문에 흥행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유명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의 히트작을 고루 들을 수 있는 ‘본 투 비 블루’(2015)나 재즈계의 전설, 마일스 데이비스에 관한 영화, ‘마일스’(2015)는 호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각각 약 10만 명, 약 1만 명 정도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쳤으니까.
즉, ‘위플래쉬’의 흥행 요인은 음악영화라는 장르 너머에 있다. 미국 최고의 음악학교를 배경으로 신입생 ‘앤드류’가 연습을 하는 데서 시작해 최고의 연주를 완성시키는 데서 끝나고, 그 사이에 그가 드럼세트에 앉아 있지 않은 신이나 드럼 소리가 끊기는 신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도 말이다.
‘위플래쉬’를 분석적으로 접근해 본 사람에게 어쩌면 이것은 대수롭지 않은 발견일 것이다. 이 영화는 음악을 느긋이 감상하게 만드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앤드류는 학교 최고의 지휘자이자 폭군으로 알려진 ‘플래쳐’ 교수를 만난다. 이후, ‘위플래쉬’는 폭군 선생과 소심한 제자라는 캐릭터 및 그 관계의 변화로 러닝타임 내내 관객들을 강하게 몰입시킨다. ‘위플래쉬’는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작품이지만, 플래쳐의 교육 방식과 앤드류의 자극된 욕망은 어릴 때부터 치열한 입시 전쟁을 겪어야 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한국 사회에서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요인이었다. 플래쳐는 학생들이 자신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1초 이상 연주를 듣는 경우가 없는 인물이다. 그는 반복해서 연주를 시키며 인신공격과 모욕은 물론 따귀에 물건 던지기까지 서슴지 않는데, 그 강도는 갈수록 더 심해진다.
대부분의 음악영화들이 음악을 정서적 안정감 혹은 해방감을 주도록 사용하는 것과는 반대로, ‘위플래쉬’의 연주장면들에서 발생되는 심리적 효과는 공포와 긴장감이다. 감독은 이것을 스릴러 장르의 형식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일례로 첫 번째 숏에서 카메라는 드럼 연습을 하는 앤드류에 천천히 다가간다. 깜짝 놀라며 연습을 멈추는 앤드류의 대사로부터 그 카메라는 플래쳐의 시점임을 알게 되는데 여기서 관객들에게 히치콕이 말하는 일종의 서프라이즈가 발생한다. 다음 장면에서 플래쳐가 시키는 연주에 몰입하던 앤드류가 앞을 쳐다봤을 때 그는 이미 사라지고 난 후이며, 앤드류와 마찬가지로 관객들의 기대는 한 번 더, 어긋나 있다. 이 강렬하면서도 싸늘한 오프닝 신은 말 그대로 시작일 뿐이다.
다음 신부터 이어지는 밀당, 즉 앤드류를 자극하는 플래쳐와 메인 드러머 자리를 따내기 위한 앤드류 사이에서의 크고 작은 사건들은 계속 관객들의 예측을 배신하고 미지의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대부분 앤드류를 띄웠다 추락시켰다를 반복하는 플래쳐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갈수록 자신의 욕망을 주체할 수 없어진 앤드류가 스승과 똑같이 폭력적으로 변하는 장면들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폭풍이 지나가고 둘 다 학교에서 쫓겨난 후, 두 사람이 인간적인 대화를 나눌 때는 더 이상의 갈등이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감독은 마지막 신까지 반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앤드류가 앤드류의 비열함을 뛰어넘어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고 최고의 연주를 들려주는 데서 영화가 끝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쾌감은 ‘위플래쉬’의 유일한 음악적 카타르시스와 정밀하게 조합되어 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재즈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의 ‘위플래쉬’는 상상할 수 없다. 이 영화의 모든 장면들은 재즈의 리듬에 맞추어 촬영되고 편집되었으며, 극대화된 영상과 사운드의 일체감은 완벽한 음악을 추구하는 서사와 함께 빈 틈 없이 드라마를 진행시킨다.
데미언 셔젤과 음악감독인 저스틴 허위츠의 재즈 사랑은 이러한 형식으로써도 충분히 표현된다. 이것이 음악영화로서 ‘위플래쉬’의 가치이며 ‘위플래쉬’가 음악영화여야만 하는 이유다. 데미언 셔젤의 다른 연출작들, ‘퍼스트맨’(2018), ‘바빌론’(2022)은 물론, 많은 인기를 누린 ‘라라랜드’도 ‘위플래쉬’만큼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는 우리가 언제든 ‘위플래쉬’를 다시 한 번 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이 아직 불혹도 되지 않은 감독의 최고작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