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가을, '야수파'의 역사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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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찬희의 너무 몰랐던 요즘 미술
파리 그랑팔레서 열린 제 3회 '가을 살롱전'
논란의 제 7 전시실 … 앙리 마티스와 앙리 망갱 등
젊은 작가의 거칠고 파격적인 '해방된 색채' 사용
자연 그대로를 옮기는 표현 방법 연구한 '인상파'
'야수파'는 자연의 법칙 벗어나 작가의 영감에 의존
루이 보셀 "마치 야수 우리에 있는 도나텔로 같았다"
파리 그랑팔레서 열린 제 3회 '가을 살롱전'
논란의 제 7 전시실 … 앙리 마티스와 앙리 망갱 등
젊은 작가의 거칠고 파격적인 '해방된 색채' 사용
자연 그대로를 옮기는 표현 방법 연구한 '인상파'
'야수파'는 자연의 법칙 벗어나 작가의 영감에 의존
루이 보셀 "마치 야수 우리에 있는 도나텔로 같았다"
프랑스 제3회 가을 살롱전(Salon d’automne)이 1905년 10월 18일에 개최됐다. 그런데 개막식을 며칠 앞두고 에밀 루베(Emile Loubet)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행사 개최를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유는 미리 출품작들을 살펴봤던 언론에서 이번 살롱전에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작품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며 비판하는 기사들을 써냈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좋지 않은 소문들이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그랑팔레(Grand-Palais). 1905년 가을살롱전이 개최된 장소이며, 지금까지도 각종 문화·예술행사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열여덟 개의 전시실로 구성된 이 살롱전에는 70대 중반의 르누아르와 세잔, 기요맹 등 인상주의 화가들도 참여했다. 인상파가 대중에게 소개된 지 30여 년이 지났고,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비판과 조롱의 시선을 받았지만 이제는 예술계의 한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미술비평가로 여겨졌던 루이 보셀(Louis Vauxcelles)은 제1전시장에 걸린 르누아르, 세잔, 로댕의 작품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모네가 이번 살롱에 출품을 하지 않아 아쉬워 하기까지 했다. 이미 인상주의 화풍은 당시 회화를 평가하는 데에 하나의 기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제7전시실에는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작가들의 모든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앙드레 드랑(André Derain),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샤를 카무앙(Charles Camoin), 앙리 망갱(Henri Manguin), 그리고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가 그 주인공이다. 주로 젊은 작가들로 구성된 이 전시실에는 다듬어지지 않는 상태의 색들이 날 것 그대로 표현되고 있었다. 가장 주목을 받았던 작품은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이다.
여인의 얼굴에 초록색 물감을, 목에는 붉은색 물감을 칠하는 등 이성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색을 사용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해방된 색채의 사용이 형태를 압도한 것이다. 이를 두고 르 피가로(Le Figaro)지의 까미유 모클레르 기자는 ‘관람객의 머릿속에 던져 버려진 물감통 같다’고 평가했다.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Femme au chapeau)>, 1905년, 캔버스에 유채,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소장. 당시 프랑스 주간지 ‘L’Illustration’에서 살롱전 주요 작품 중 하나로 소개되었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도 거칠고 두꺼운 색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관람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우연히 앙드레 드랑을 만나 스물넷에 그림을 시작한 블라맹크는 앙리 마티스를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로 한다. 이후 반 고흐의 회고전에서 <별이 빛나는 밤>과 <아를의 침실>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아 고흐의 신랄한 색채와 생동감 넘치는 붓질을 닮아갔다. 색이 더욱 순수하고 선명하게 드러나길 원했던 블라맹크는 최초로 튜브물감을 캔버스 위에 직접 짜서 사용한 작가가 되었다. 팔레트 위에서 다른 색들을 섞어가며 채도를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 위에서 순수한 물감의 색상 그대로를 사용하고자 했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가 그린 <샤투의 집들 (Maisons à Chatou)> (1905)을 확대해 보면 캔버스 위에다가 바로 짜낸 물감을 붓으로 펼쳐내는 방식으로 화면을 채워간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거칠고 파격적으로 표현된 회화 작품들이 걸린 공간 중앙에는 이들과 함께 활동했던 알베르 마르크(Albert Marque)의 조각상 두 점도 전시되어 있었다. 루이 보셀은 르네상스 대표 조각가 도나텔로(Donatello)에 빗대어 “적나라한 색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 순진무구한 조각상들이 나를 놀라게 했다. 마치 야수 우리에 있는 도나텔로 같았다”라고 이 전시실을 평가한다. ‘야수파(Les Fauves)’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다.
인상파는 자연에서 본 그대로를 전달하기 위해 새로운 표현 방법을 연구했다면, 야수파의 회화에서는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난 색들이 사용됐다. 그 선택에는 어떠한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며, 작가는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두고 떠오르는 영감에 의존한다. 이는 색채의 과학성을 강조했던 신인상주의와도 구분된다. 야수파는 단순한 스케치와 자유로운 색채의 사용으로 실재하는 대상과 묘사된 형체의 간극을 발생시키는 순수한 회화적 실험의 성격을 띤다.
비록 ‘야수파’는 제7전시실 작가들에게 우연히 붙여진 이름이었기 때문에 약 3년간의 활동으로 끝이 났다고 역사에 기록됐지만, 이들의 소식은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유럽 전역에서 표현주의 화가들이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7전시실 중앙에 설치된 알베르 마르크(Albert Marque)의 조각상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야수파 작가들. “야수들에게 둘러싸인 도나텔로”라고 혹평했던 루이 보셀의 비평이 떠오른다.
신인상파 테오 반 리셀베르그(Théo Van Rysselberghe)와 야수파 앙리 망갱(Henri Manguin)이 같은 지역에서 1904년과 1906년에 각각 그린 작품 <카발리에르의 소나무 숲> (Pinède à Cavalière).
열여덟 개의 전시실로 구성된 이 살롱전에는 70대 중반의 르누아르와 세잔, 기요맹 등 인상주의 화가들도 참여했다. 인상파가 대중에게 소개된 지 30여 년이 지났고,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비판과 조롱의 시선을 받았지만 이제는 예술계의 한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미술비평가로 여겨졌던 루이 보셀(Louis Vauxcelles)은 제1전시장에 걸린 르누아르, 세잔, 로댕의 작품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모네가 이번 살롱에 출품을 하지 않아 아쉬워 하기까지 했다. 이미 인상주의 화풍은 당시 회화를 평가하는 데에 하나의 기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제7전시실에는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작가들의 모든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앙드레 드랑(André Derain),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샤를 카무앙(Charles Camoin), 앙리 망갱(Henri Manguin), 그리고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가 그 주인공이다. 주로 젊은 작가들로 구성된 이 전시실에는 다듬어지지 않는 상태의 색들이 날 것 그대로 표현되고 있었다. 가장 주목을 받았던 작품은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이다.
여인의 얼굴에 초록색 물감을, 목에는 붉은색 물감을 칠하는 등 이성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색을 사용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해방된 색채의 사용이 형태를 압도한 것이다. 이를 두고 르 피가로(Le Figaro)지의 까미유 모클레르 기자는 ‘관람객의 머릿속에 던져 버려진 물감통 같다’고 평가했다.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Femme au chapeau)>, 1905년, 캔버스에 유채,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소장. 당시 프랑스 주간지 ‘L’Illustration’에서 살롱전 주요 작품 중 하나로 소개되었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도 거칠고 두꺼운 색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관람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우연히 앙드레 드랑을 만나 스물넷에 그림을 시작한 블라맹크는 앙리 마티스를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로 한다. 이후 반 고흐의 회고전에서 <별이 빛나는 밤>과 <아를의 침실>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아 고흐의 신랄한 색채와 생동감 넘치는 붓질을 닮아갔다. 색이 더욱 순수하고 선명하게 드러나길 원했던 블라맹크는 최초로 튜브물감을 캔버스 위에 직접 짜서 사용한 작가가 되었다. 팔레트 위에서 다른 색들을 섞어가며 채도를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 위에서 순수한 물감의 색상 그대로를 사용하고자 했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가 그린 <샤투의 집들 (Maisons à Chatou)> (1905)을 확대해 보면 캔버스 위에다가 바로 짜낸 물감을 붓으로 펼쳐내는 방식으로 화면을 채워간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거칠고 파격적으로 표현된 회화 작품들이 걸린 공간 중앙에는 이들과 함께 활동했던 알베르 마르크(Albert Marque)의 조각상 두 점도 전시되어 있었다. 루이 보셀은 르네상스 대표 조각가 도나텔로(Donatello)에 빗대어 “적나라한 색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 순진무구한 조각상들이 나를 놀라게 했다. 마치 야수 우리에 있는 도나텔로 같았다”라고 이 전시실을 평가한다. ‘야수파(Les Fauves)’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다.
인상파는 자연에서 본 그대로를 전달하기 위해 새로운 표현 방법을 연구했다면, 야수파의 회화에서는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난 색들이 사용됐다. 그 선택에는 어떠한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며, 작가는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두고 떠오르는 영감에 의존한다. 이는 색채의 과학성을 강조했던 신인상주의와도 구분된다. 야수파는 단순한 스케치와 자유로운 색채의 사용으로 실재하는 대상과 묘사된 형체의 간극을 발생시키는 순수한 회화적 실험의 성격을 띤다.
비록 ‘야수파’는 제7전시실 작가들에게 우연히 붙여진 이름이었기 때문에 약 3년간의 활동으로 끝이 났다고 역사에 기록됐지만, 이들의 소식은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유럽 전역에서 표현주의 화가들이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7전시실 중앙에 설치된 알베르 마르크(Albert Marque)의 조각상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야수파 작가들. “야수들에게 둘러싸인 도나텔로”라고 혹평했던 루이 보셀의 비평이 떠오른다.
신인상파 테오 반 리셀베르그(Théo Van Rysselberghe)와 야수파 앙리 망갱(Henri Manguin)이 같은 지역에서 1904년과 1906년에 각각 그린 작품 <카발리에르의 소나무 숲> (Pinède à Cavaliè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