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점차 떨어진 행시, 그뒤로 5번 낙방…"명문대 자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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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험때 운좋게 2차까지 간뒤로 매년 낙방
"사무관 되서 대학 오겠다" 큰소리 쳤지만 …
대인기피증 심해 … 포기 못하고 매달리는 중
ㄴ씨는 초시 때 운 좋게 2차 시험장까지 갔다. 1~2점 차이로 아쉽게 떨어졌지만 조금만 더 준비하면 금방 붙을 줄 알았다. 그렇게 5년이 속절없이 흘렀다.
ㄴ씨는 2년 전 서울에서 고향인 경남 거제로 돌아와 고시 생활을 꾸역꾸역 이어나가고 있다. 매일 아침 독서실로 걸어가는 30분 동안 캠퍼스 생활을 추억하며 산다. 안타깝게도 이젠 과거로도, 학교 생활을 한 캠퍼스로도 돌아갈 수 없게 됐다. ㄴ씨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패배자’로 낙인을 찍을까 두려워 결국 올 3월 학교를 그만뒀다. ▷고시 준비 기간은 얼마나 되나요?
국가직 5급 공개채용시험(행정고시)에 총 다섯 번 도전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1차에는 매년 붙고 있습니다. 저 같은 이과 계열 학생은 보통 기술고시를 준비하는데 기술 쪽을 선택하면 승진 기회가 적을 것 같아서 행정 분야를 택했습니다.
▷고시 준비는 어떤 계기로 시작했나요?
직장을 구하려면 시험으로 승부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무 살 때까지 우리 인생의 성공 여부는 ‘대입’ 결과로 판가름 나잖아요. 수능이라는 제도 안에서 성공을 경험해봤으니 시험이라면 자신 있었죠.
초시(시험을 본 첫해) 때 1차를 통과했어요. 조금만 더 해보면 될 것 같았는데 매년 착실히 낙방했어요. ‘내년에는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버텼어요. 어떻게 보면 초시 때의 경험을 붙잡고 구질구질하게 시험에 매달린 거죠. 과감하게 포기도 못 하고 있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고시생의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고시 생활 5년 차에 접어드니 많이 느슨해질 때도 있어요. 지금은 정신적으로도 많이 망가져 있는 상태고요.
아침 7시 전에 일어나려고 노력은 해요. 아침밥으로 누룽지를 챙겨 먹은 다음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독서실로 향해요. 조간신문을 빠르게 읽고 요일·시간대별로 과목을 나눠서 답안 작성 연습을 합니다.
요즘엔 운동을 꾸준히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신체가 무너지면 마음도 쉽게 무너지잖아요. 보디프로필 찍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고시생 주제에 몸짱까진 아니더라도 배 나온 건 용납할 수 없어요. 집에서 혼자 운동하려고 ‘홈트’용 운동화 한 켤레를 장만했어요.
▷학교로 돌아가기 어려운 이유는 뭔가요?
제일 무서운 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에요. 이 상태로 돌아가면 모두가 저를 실패자 취급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요. 괜한 피해의식이란 걸 알면서도요.
학창 시절 선·후배와 동기들에게 예비 사무관이 돼서 꼭 캠퍼스로 돌아오겠다고 큰소리를 자주 쳤어요. 5년이 지났는데 저는 아직 아무것도 못 됐어요. 어느 순간 학교에 있는 친구들과 저는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 같더라고요.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결국 자퇴서를 냈죠. ▷누군가를 위해 사는 삶도 아닌데 다른 사람의 시선은 무시하면 그만 아닌가요?
그게 마음처럼 되던가요. 제가 속한 집단에선 비교하는 문화가 팽배해요. 어떤 동기가 최근 대기업에 갔다거나 유학하러 갔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 조바심이 나요.
아주 가끔 들어가 보던 SNS 앱도 이제는 휴대폰에서 삭제해버렸어요. 사람들은 다 잘살고 있는 것만 같거든요. 에브리타임 등 교내 익명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을 보면 온통 연봉 얘기예요. 인생에서 돈, 지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들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요.
▷마음 건강은 괜찮나요?
한동안 정신과 진료를 받았어요. ADHD 약, 항우울제, 항불안제, 수면제는 종류별로 먹고 있고요. 시험을 준비하면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충동적인 생각도 여러 번 했어요. 뉴스에 나오는 청년 고독사가 왜 일어나는지 알겠더라고요.
▷가족이 아닌 타인을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쯤인가요?
석 달 전에 선배 한 명이 밥 사준다고 해서 만난 게 마지막이에요. 2차 시험이 다가오면서 심리적으로 쫓기다 보니까 시간을 일부러 더 안 내려고 해요. 이젠 만나면 할 얘기도 없죠. 2년 전 고향으로 오고 나서부터는 지인들 만나기도 어려워요.
▷사무관이 되면 어떤 일을 제일 하고 싶나요?
이왕이면 청년들의 마음 건강을 지키는 일에 힘쓰고 싶어요. ‘히키코모리(은둔·고립자)’들은 참 모순적이거든요. 알아서 살게 놔두라는 태도를 가졌으면서 동시에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갈구해요. 지금의 고된 경험이 어쩌면 저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을 위해 쓰이는 데 활용될 날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해요.
정부 주관으로 사적 모임을 열어보고 싶어요. 메타버스 형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온라인상에서라도 은둔·고립 청년들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방식도 좋을 것 같아요.
최해련 기자 haeryon@hankyung.com
"사무관 되서 대학 오겠다" 큰소리 쳤지만 …
대인기피증 심해 … 포기 못하고 매달리는 중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 걸까. 생애주기별 '숙제'에 발목 잡힌 대한민국 청년들. 대입, 취업, 연애, 결혼까지. 하나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낙오된다? “이번 생은 망했다”고 생각하는 대한민국 청년들이 그 어디서도 말할 수 없었던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익명을 요청한 명문대생 ㄴ씨(25)는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 세상에서 없어지는 상상을 열 번도 더 넘게 했다고 말했다. 군 제대 후 처음 본 시험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그것이 그를 옥죄는 불안의 시작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ㄴ씨는 초시 때 운 좋게 2차 시험장까지 갔다. 1~2점 차이로 아쉽게 떨어졌지만 조금만 더 준비하면 금방 붙을 줄 알았다. 그렇게 5년이 속절없이 흘렀다.
ㄴ씨는 2년 전 서울에서 고향인 경남 거제로 돌아와 고시 생활을 꾸역꾸역 이어나가고 있다. 매일 아침 독서실로 걸어가는 30분 동안 캠퍼스 생활을 추억하며 산다. 안타깝게도 이젠 과거로도, 학교 생활을 한 캠퍼스로도 돌아갈 수 없게 됐다. ㄴ씨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패배자’로 낙인을 찍을까 두려워 결국 올 3월 학교를 그만뒀다. ▷고시 준비 기간은 얼마나 되나요?
국가직 5급 공개채용시험(행정고시)에 총 다섯 번 도전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1차에는 매년 붙고 있습니다. 저 같은 이과 계열 학생은 보통 기술고시를 준비하는데 기술 쪽을 선택하면 승진 기회가 적을 것 같아서 행정 분야를 택했습니다.
▷고시 준비는 어떤 계기로 시작했나요?
직장을 구하려면 시험으로 승부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무 살 때까지 우리 인생의 성공 여부는 ‘대입’ 결과로 판가름 나잖아요. 수능이라는 제도 안에서 성공을 경험해봤으니 시험이라면 자신 있었죠.
초시(시험을 본 첫해) 때 1차를 통과했어요. 조금만 더 해보면 될 것 같았는데 매년 착실히 낙방했어요. ‘내년에는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버텼어요. 어떻게 보면 초시 때의 경험을 붙잡고 구질구질하게 시험에 매달린 거죠. 과감하게 포기도 못 하고 있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고시생의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고시 생활 5년 차에 접어드니 많이 느슨해질 때도 있어요. 지금은 정신적으로도 많이 망가져 있는 상태고요.
아침 7시 전에 일어나려고 노력은 해요. 아침밥으로 누룽지를 챙겨 먹은 다음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독서실로 향해요. 조간신문을 빠르게 읽고 요일·시간대별로 과목을 나눠서 답안 작성 연습을 합니다.
요즘엔 운동을 꾸준히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신체가 무너지면 마음도 쉽게 무너지잖아요. 보디프로필 찍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고시생 주제에 몸짱까진 아니더라도 배 나온 건 용납할 수 없어요. 집에서 혼자 운동하려고 ‘홈트’용 운동화 한 켤레를 장만했어요.
▷학교로 돌아가기 어려운 이유는 뭔가요?
제일 무서운 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에요. 이 상태로 돌아가면 모두가 저를 실패자 취급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요. 괜한 피해의식이란 걸 알면서도요.
학창 시절 선·후배와 동기들에게 예비 사무관이 돼서 꼭 캠퍼스로 돌아오겠다고 큰소리를 자주 쳤어요. 5년이 지났는데 저는 아직 아무것도 못 됐어요. 어느 순간 학교에 있는 친구들과 저는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 같더라고요.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결국 자퇴서를 냈죠. ▷누군가를 위해 사는 삶도 아닌데 다른 사람의 시선은 무시하면 그만 아닌가요?
그게 마음처럼 되던가요. 제가 속한 집단에선 비교하는 문화가 팽배해요. 어떤 동기가 최근 대기업에 갔다거나 유학하러 갔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 조바심이 나요.
아주 가끔 들어가 보던 SNS 앱도 이제는 휴대폰에서 삭제해버렸어요. 사람들은 다 잘살고 있는 것만 같거든요. 에브리타임 등 교내 익명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을 보면 온통 연봉 얘기예요. 인생에서 돈, 지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들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요.
▷마음 건강은 괜찮나요?
한동안 정신과 진료를 받았어요. ADHD 약, 항우울제, 항불안제, 수면제는 종류별로 먹고 있고요. 시험을 준비하면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충동적인 생각도 여러 번 했어요. 뉴스에 나오는 청년 고독사가 왜 일어나는지 알겠더라고요.
▷가족이 아닌 타인을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쯤인가요?
석 달 전에 선배 한 명이 밥 사준다고 해서 만난 게 마지막이에요. 2차 시험이 다가오면서 심리적으로 쫓기다 보니까 시간을 일부러 더 안 내려고 해요. 이젠 만나면 할 얘기도 없죠. 2년 전 고향으로 오고 나서부터는 지인들 만나기도 어려워요.
▷사무관이 되면 어떤 일을 제일 하고 싶나요?
이왕이면 청년들의 마음 건강을 지키는 일에 힘쓰고 싶어요. ‘히키코모리(은둔·고립자)’들은 참 모순적이거든요. 알아서 살게 놔두라는 태도를 가졌으면서 동시에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갈구해요. 지금의 고된 경험이 어쩌면 저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을 위해 쓰이는 데 활용될 날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해요.
정부 주관으로 사적 모임을 열어보고 싶어요. 메타버스 형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온라인상에서라도 은둔·고립 청년들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방식도 좋을 것 같아요.
최해련 기자 haery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