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사람 숨소리도 연주다…클래식 머글이 덕후가 되는 '실황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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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글’을 자처하는 자로서 실황 연주를 자주 찾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실황 연주는 음악과 연주자, 관객이 모두 함께 만들어가기에 특별하다. 고도의 테크닉을 집중해서 발휘하는 순간, 연주 중 다급하게 악보를 넘기는 소리, 고요한 가운데 들려오는 숨소리, 심지어는 기침 소리나 휴대폰 소리까지도 실황 연주의 일부다. 없었으면 더 좋았을 부분이지만 그 덕분에 연주회의 기억이 쉬이 휘발되지 않기도 한다.
2013년 서울시향이 정명훈 지휘자와 함께 말러 교향곡 9번을 연주하던 날, 1악장이 거의 끝날무렵 처연함으로 가득한 순간에 관객석에서 ‘벚꽃엔딩’이 등장했다. 악단의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을 명연주였고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을 단 채 음반으로도 발매됐지만 그 현장에 있었던 관객 1인으로서 ‘벚꽃엔딩’을 항상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웃지못할 소동을 이끄는 쪽은 보통 관객이지만 연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임은 연주자도 관객도 모두 동의할 것이다. 연주자들은 음악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만큼 실황 연주는 음악을 표현하는 연주자들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 연주가 관객에게 어떤 종류의 감정으로 기억될지는 연주자들이 음악에 부여하는 의미와 그를 대하는 태도에 크게 좌우된다.
전공자도 아니고 관계자도 아닌 일개 머글이지만 관객으로서 한가지 확신해 말할 수 있다. 연주자들이 음악을 어떻게 체화해 드러내는 지는 관객에게 굉장히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모든 실황 연주에서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틀린 음이 한번도 없었다거나 템포가 잘 맞았다는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음표와 소리의 향연 속에서 연주자는 어떤 방향성을 갖고 있는지, 몰입하고 있는지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지, 표현하고자 하는 포인트들이 퍼즐 조각처럼 잘 맞춰지는지 다소 허우적대는 중인지는 ‘음알못'이더라도 알 수 있다. 이런 일련의 요소들이 관객에게 화살처럼 명료하게 꽂히는지 뭉게구름처럼 두리뭉실하게 떠다니는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연주자가 곡을 연주하는 그 시간을 어떤 의미로 어떻게 채워나가는지가 바로 음악이 연주자를 만나 관객에게 전달되는 순간을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다.
피아니스트 니콜라스 안겔리치가 2018년 KBS교향악단과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오랫동안 따뜻한 여운으로 남아있다. 이 피아니스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태였고 사실은 교향악단이 연주할 바그너를 들을 요량으로 참석한 연주회였다. 특히 ‘탄호이저’ 서곡에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5번 ‘황제'에 비해 자주 연주되지 않으니 한번 실황을 들어볼 만 하겠다라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바그너를 들으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찾았지만 뜻밖에 니콜라스 안겔리치라는 연주자를 발견했다 .
여느 바그너 실황 연주가 그렇듯 벼르고 온 관객들을 만족시키기란 결코 쉽지 않다. 탄호이저 서곡도 그랬던 것 같다. 어떠한 서사나 감정이 전달되지 않고 음표들이 뻣뻣하게 나열되어 공중에 흩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피아니스트의 협연 이후 연주될 ‘신들의 황혼' 에 대한 기대감까지도 내려놓을 찰나 무대에는 큰 체구의 피아니스트가 등장했고 의자에 앉자마자 거의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서주 없이 바로 피아니스트의 독주로 시작하는 곡이다. 담담하게 울리는 첫 몇 마디를 듣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연주자는 음악에 진심이다. 음악 앞에 한없이 겸손하고 음악 속에서 조용히 그리고 담담히 스스로를 표현하는구나. 게다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이라면 이런 태도가 더없이 잘 어울리지 않는가. 니콜라스 안겔리치는 몇초만에 다소 체념한 마음이던 나를 고요하고 절제된 우아한 세계로 단번에 이끌었다. 그의 연주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아 CD플레이어가 없으면서도 CD를 샀다. 이 CD는 아직도 뜯지 않은 상태이다.
더욱 놀라웠던 점은 협연자의 이런 태도가 오케스트라에도 전달되어 곡이 진행됨에 따라 서서히 협주곡이 완성되는 순간들을 목격했다는 점이었다. 가뭄으로 버석하게 말라있던 숲이 니콜라스 안겔리치의 피아노를 만나 촉촉함을 되찾고 서서히 불어오는 바람으로 식목의 푸른 내음마저 내뿜는듯 했다. 그는 투명한 소리로 섬세하지만 분명하게 베토벤을 표현하고 있었다. 인위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지만 곡 전체에서 피아노는 거대한 산처럼 존재했고 일정한 흐름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곡의 극적이고 강건한 요소들도 자연스럽고 설득력있게 제시했다. 실연을 찾아 듣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던 연주자이자 음악이었다.
바로 이런 순간들이 머글을 연주회장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오늘 실망하더라도 내일은 뜻밖의 발견을 할 지 모르는 일이다. 수많은 연주자들이 무대에 오르고 어쩌면 오늘이 해당 연주자의 연주를 실황으로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나에게 소중한 기억을 선사한 니콜라스 안겔리치는 지금은 고인이 되었기에 2018년 그가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연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2013년 서울시향이 정명훈 지휘자와 함께 말러 교향곡 9번을 연주하던 날, 1악장이 거의 끝날무렵 처연함으로 가득한 순간에 관객석에서 ‘벚꽃엔딩’이 등장했다. 악단의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을 명연주였고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을 단 채 음반으로도 발매됐지만 그 현장에 있었던 관객 1인으로서 ‘벚꽃엔딩’을 항상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웃지못할 소동을 이끄는 쪽은 보통 관객이지만 연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임은 연주자도 관객도 모두 동의할 것이다. 연주자들은 음악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만큼 실황 연주는 음악을 표현하는 연주자들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 연주가 관객에게 어떤 종류의 감정으로 기억될지는 연주자들이 음악에 부여하는 의미와 그를 대하는 태도에 크게 좌우된다.
전공자도 아니고 관계자도 아닌 일개 머글이지만 관객으로서 한가지 확신해 말할 수 있다. 연주자들이 음악을 어떻게 체화해 드러내는 지는 관객에게 굉장히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모든 실황 연주에서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틀린 음이 한번도 없었다거나 템포가 잘 맞았다는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음표와 소리의 향연 속에서 연주자는 어떤 방향성을 갖고 있는지, 몰입하고 있는지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지, 표현하고자 하는 포인트들이 퍼즐 조각처럼 잘 맞춰지는지 다소 허우적대는 중인지는 ‘음알못'이더라도 알 수 있다. 이런 일련의 요소들이 관객에게 화살처럼 명료하게 꽂히는지 뭉게구름처럼 두리뭉실하게 떠다니는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연주자가 곡을 연주하는 그 시간을 어떤 의미로 어떻게 채워나가는지가 바로 음악이 연주자를 만나 관객에게 전달되는 순간을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다.
피아니스트 니콜라스 안겔리치가 2018년 KBS교향악단과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오랫동안 따뜻한 여운으로 남아있다. 이 피아니스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태였고 사실은 교향악단이 연주할 바그너를 들을 요량으로 참석한 연주회였다. 특히 ‘탄호이저’ 서곡에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5번 ‘황제'에 비해 자주 연주되지 않으니 한번 실황을 들어볼 만 하겠다라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바그너를 들으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찾았지만 뜻밖에 니콜라스 안겔리치라는 연주자를 발견했다 .
여느 바그너 실황 연주가 그렇듯 벼르고 온 관객들을 만족시키기란 결코 쉽지 않다. 탄호이저 서곡도 그랬던 것 같다. 어떠한 서사나 감정이 전달되지 않고 음표들이 뻣뻣하게 나열되어 공중에 흩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피아니스트의 협연 이후 연주될 ‘신들의 황혼' 에 대한 기대감까지도 내려놓을 찰나 무대에는 큰 체구의 피아니스트가 등장했고 의자에 앉자마자 거의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서주 없이 바로 피아니스트의 독주로 시작하는 곡이다. 담담하게 울리는 첫 몇 마디를 듣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연주자는 음악에 진심이다. 음악 앞에 한없이 겸손하고 음악 속에서 조용히 그리고 담담히 스스로를 표현하는구나. 게다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이라면 이런 태도가 더없이 잘 어울리지 않는가. 니콜라스 안겔리치는 몇초만에 다소 체념한 마음이던 나를 고요하고 절제된 우아한 세계로 단번에 이끌었다. 그의 연주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아 CD플레이어가 없으면서도 CD를 샀다. 이 CD는 아직도 뜯지 않은 상태이다.
더욱 놀라웠던 점은 협연자의 이런 태도가 오케스트라에도 전달되어 곡이 진행됨에 따라 서서히 협주곡이 완성되는 순간들을 목격했다는 점이었다. 가뭄으로 버석하게 말라있던 숲이 니콜라스 안겔리치의 피아노를 만나 촉촉함을 되찾고 서서히 불어오는 바람으로 식목의 푸른 내음마저 내뿜는듯 했다. 그는 투명한 소리로 섬세하지만 분명하게 베토벤을 표현하고 있었다. 인위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지만 곡 전체에서 피아노는 거대한 산처럼 존재했고 일정한 흐름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곡의 극적이고 강건한 요소들도 자연스럽고 설득력있게 제시했다. 실연을 찾아 듣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던 연주자이자 음악이었다.
바로 이런 순간들이 머글을 연주회장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오늘 실망하더라도 내일은 뜻밖의 발견을 할 지 모르는 일이다. 수많은 연주자들이 무대에 오르고 어쩌면 오늘이 해당 연주자의 연주를 실황으로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나에게 소중한 기억을 선사한 니콜라스 안겔리치는 지금은 고인이 되었기에 2018년 그가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연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