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판1'(2023).
'광고판1'(2023).
인물화나 정물화, 풍경화는 이해할 수 있지만 추상화만큼은 잘 모르겠다는 사람이 많다. 한발 더 나아가 "추상화는 사기"라는 과격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뭘 표현했는지 모르는데 그림을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주장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개념미술가 윤동천(66·서울대 서양화과 명예교수)은 마음이 아프다. “추상화가 사실 별 게 아닌데….이게 다 현대미술의 죄과(罪科)다.”

윤 작가가 추상화에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전시를 준비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서울 인사동 갤러리밈에서 열리고 있는 윤 작가의 개인전 ‘추상에 관하여’다.

윤 작가는 서울대 미대에서 30년간 교수로 재직하다 지난해 정년 퇴임했다. 후학을 가르치면서도 회화·판화·설치미술·조각·사진·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장르에서 사회 비판적인 작품을 만들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여 왔다.

현대미술 작품 중에서도 그의 작품은 ‘친절한’ 편이라는 평가다. 관람객들의 해석을 돕기 위한 단서를 제목에 표시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쳐도 소리가 나지 않는 북을 만든 뒤 ‘울리지 않는 신문고’라는 이름을 붙이는 식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2023).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2023).
이번 전시도 친절하다. 주제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눠 관객의 추상화에 대한 거리감을 조금씩 좁힌다. 먼저 5·6층에는 속담과 어록을 주제로 한 작품을 모아 ‘추상에 관하여’라는 소제목을 붙였다.

갖가지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은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가 대표적이다. 2014년 명동 신세계백화점의 초청을 받아 연 전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연상시키는 작업이다. 당시 윤 작가는 폐지와 쓰레기 등을 모아 쇼윈도를 채운 뒤 유리에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크게 새겨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나의 유소년기 연작'(2023).
'나의 유소년기 연작'(2023).
4층 전시장에는 ‘추상에 관하여: 기억(나의 유소년기)’라는 소제목이 붙었다. 작가의 경험을 담은 그림일기와 이를 소재로 한 간략한 추상화를 붙였다. 이런 식이다. 하늘색 바탕에 붉은 직사각형이 그려진 번듯한 추상화지만, 아래에 적혀 있는 설명을 읽으면 웃음이 나온다.

“지나가다 서울역 부근에서 우연히 발길에 채이는 ‘빨간책’을 주웠다. 몰래 읽으며 얼마나 설레고 벅찼던지 한동안 간직하다 들킬까봐 겁이 나 태워버렸다. 그때부터도 나는 용기가 없었다. 다른 친구에게 줄 걸 후회가 된다.”

윤 작가는 “추상은 어려운 게 아니라, 이렇게 일상적인 마음의 풍경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그물'(2023).
'그물'(2023).
마지막 3층 전시장 소제목은 ‘추상에 관하여: 발췌/번안(옮기기, 베끼기)’이다. 광고판을 소재로 한 ‘광고판 1’, 그물을 소재로 한 ‘그물’ 등이 나와 있다. 윤 작가는 “이번 전시를 본 관람객들이 추상화를 친근하게 여기고 각자의 미감(美感)을 키워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시는 6월 16일까지 열린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