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의 대상 vs 미식의 권력자…음식평론가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서 음식평론가란 직업은 아직까진 생소하다. 해외에서 K-푸드가 주목받고 있고 무엇보다 먹는 것에 진심인 나라치고는 전문적인 평론가를 자처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렇다 보니 여러 추측이 난무한다. 해설이 필요한 다른 분야와 달리 먹는 데 있어선 전 국민이 저마다 식견을 갖고 있기에 감히 전문성을 내세우기 어렵다거나, 남의 밥그릇에 이렇다 저렇다 딴지를 거는 걸 용납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급속한 경제발전 속도 탓에 식문화가 제대로 체계적으로 자리잡기 힘들었다는 식이다. 평론할 대상과 평론을 소비할 대중은 있지만, 정작 스스로를 내세우는 평론가가 거의 없는 기묘한 분야가 바로 음식의 세계다.

평론의 정의는 분야나 시대에 따라 상이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론 대상을 분석하고 해설하는 일임에는 차이가 없다. 평론가들은 대상이 가진 시대적 의미를 짚거나 창작자의 의도나 현상에 담긴 함의를 저마다의 논리로 펼쳐낸다. 여기서 방점은 저마다에 찍힌다. 평론가는 본인이 가진 걸 바탕으로 대상의 심연에서 의미를 길어 올린다. 대상의 가치를 명징하게 결정짓는 절대적인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숙명을 안은채 세상에 나온 평론은 나름대로의 생명력을 갖는다. 창작자를 고무시키기도 하면서 동시에 절망에 빠뜨리기도 한다. 누군가는 명예를 얻고 돈을 벌기도 하고, 누군가는 명예도 잃고 돈도 잃는다. 그렇기에 분야를 막론하고 평론은 권력화되기 쉽고, 그만큼 조롱받기도 쉬운 면을 태생적으로 갖는다.

평론의 이 같은 속성으로 인해 음식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음식 평론가는 늘 클리셰로서 존재한다. 멀쩡한 레스토랑을 단숨에 폐업시킬 만한 권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마치 먹이사슬 정점에 있는 상위포식자처럼 군림하는 듯한 인상으로 표현된다. 어떤 식으로든지 주인공에게 시련을 주는 역할이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에서 주인공 칼 캐스퍼는 자신의 음식을 혹평한 평론가 앞에서 욕을 날리다가 직장을 잃고 푸드트럭을 운영하게 된다. ‘라따뚜이’에선 레스토랑을 벌벌 떨게 하는 악명 높은 음식평론가 안톤 이고가 등장해 극 중 긴장감을 높인다.
조롱의 대상 vs 미식의 권력자…음식평론가란 무엇인가
현실의 세계에선 어떨까. 음식평론가는 정말로 영화 속 인물처럼 무시무시하게 까탈스러운 사람들일까. 서구에서 음식평론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18세기를 기점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외식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식당이나 음식에 대한 정보에 대한 수요도 높아졌다. 주로 먹고 마시데 대한 특별한 애정이 있으면서 부유하고 시간이 많으며 문학적 소양을 가진 전문직 종사자들이 음식에 대한 저작물들을 남겼다. 소위 고급 음식을 제공하는 레스토랑에 대한 글이 대부분이었고, 글을 원하는 독자도 그런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이름을 얻는 음식평론가들은 독자들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떠오르는 가볼 만한 레스토랑을 발굴해 냈고, 동시에 스타 셰프들도 탄생시켰다. 레스토랑 비즈니스에 있어 일종의 권력을 행사하다보니 성숙지 못한 행태를 보여주는 평론가들도 존재했고, 이 때문에 음식평론가란 속물에 까탈스러운 사람이라는 선입견도 함께 생겨났다.

오늘날엔 더 복잡하고 다양한 음식들과 마주해야 하고 과거와 달리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보량이 많아진 만큼 평론의 성격과 역할도 그만큼 다양해졌다. 감정사 마냥 음식이나 서비스의 수준을 정량적으로 평가하는 음식평론가도 있지만,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다양한 국적과 장르를 표방하는 식당의 음식을 사람들이 이해하거나 접근하기 쉽도록 해설해 주는 음식평론가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2018년 타계한 미국 LA의 음식평론가 조나단 골드다.

그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LA에서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길거리 음식, 소규모 식당, 소수인종이 운영하는 식당에 대한 평론을 꾸준히 남겼다. 영화평론가가 영화의 재미에 대해, 음악평론가가 음악의 좋음에 대해 논하지 않듯 음식평론가도 음식이 맛이 있고 없음을 논하지 않는다. 골드는 맛을 논하는 대신 그들의 사연과 문화적 의미에 더 관심을 두었다. 음식평론가의 역할이란 스스로가 얼마나 대단한 미식가임을 증명하는 데 있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발견하고 모험하며 또 즐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데 있다는 걸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조롱의 대상 vs 미식의 권력자…음식평론가란 무엇인가
‘아메리칸 셰프’와 라따뚜이’에 등장하는 음식평론가는 주인공을 성장시키는 영화적 장치인 동시에 평론가의 의의를 정의해 보여준다. 누군가 나를 평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끊임없는 긴장을 가져오며, 그런 긴장감을 주는 존재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외적 압력을 극복해야지만 무언가 성취할 수 있다는 걸 두 영화는 이야기하지만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있다. 누군가는 권위 있는 이들의 인정을 받고자, 또는 직업적으로 성공하려 분투하지만 음식을 만드는 모든 이들이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두 영화 속에 등장하는 두 평론가가 나중엔 셰프들의 후원자이자 레스토랑 투자자로 변모하는 공통의 결말로 마무리된다. ‘결국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준 사람은 나의 적이었다’는 대통합의 훈훈한 마무리 같아 보이지만, 평론가란 직업윤리가 그토록 가벼웠던 것인가 싶어 어딘가 개운치 않은 면이 있다.

두 영화의 결말을 보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고 그것을 기쁘게 먹는 이들을 위해 살아간다고 한다면, 음식평론가는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무엇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요리사가 앞으로 나아가게끔 채찍을 든 평론가일까, 사람들이 음식을 제대로 잘 볼 수 있게끔 횃불을 든 평론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