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말보로의 추억
“말안장을 짊어지고 입에는 담배를 물고 있다. 물고 있는 담배는 윈스턴도 카멜도 아니고, 물론 말보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말보로맨의 고독’에 나오는 문구다. 하루키에게도 매력적인 소재였던 담배 말보로는 ‘고독한 남성’ ‘절대적인 마초’의 상징으로 많이 인용된다.

말보로 탄생의 역사에는 반전이 있다. 말보로는 원래 영국에서 탄생한 여성 전용 담배였다. 제조사 필립모리스인터내셔널(PMI)의 창업자인 필립 모리스가 1847년 런던에 담배가게를 열고 ‘여성의 기호품’이란 슬로건을 앞세워 팔기 시작했다. 1922년 미국에 진출하면서는 ‘5월처럼 부드러운(Mild as May)’이란 슬로건을 내걸기도 했다. 하지만 판매는 신통찮았다.

1954년 필립모리스는 마케팅 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주 소비자층을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꾸고, 소방관 경찰 군인 카우보이 등을 광고에 등장시켜 남성적인 이미지를 강조했다. 서부영화의 유명한 배우들을 ‘말보로맨’으로 기용했다. 이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담배로 급부상했다. 말보로는 밋밋한 담뱃갑에 뚜껑을 달아 위를 젖힌 뒤 담배를 빼는 플립 톱 박스도 처음으로 적용했다. 강렬한 특유의 레드 디자인과 플립 톱 박스는 20세기 산업 디자인 역사에, 말보로맨은 마케팅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말보로는 1972년부터 지난해까지 50년간 세계 판매량 1위를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 브랜드 가치는 40조원이 넘는다. 그런데 필립모리스가 말보로의 종말을 예고했다. 야체크 올자크 필립모리스 회장이 “말보로를 박물관 유물로 보내겠다”고 선언했다. 건강에 해로운 담배 시장이 정체하자 고심 끝에 내놓은 전략이다.

필립모리스는 대신 건강에 덜 해로운 전자담배 아이코스에 집중하기로 했다. 2025년까지 전체 담배 매출 중 비연소 담배 비중을 50%로 끌어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최근에는 한발 더 나아가 덴마크 의료용 껌 제조업체, 영국 흡입 의료기 제조업체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헬스케어 사업에 진출했다.

미래 생존을 위해 100년이 넘은 1등 브랜드를 과감하게 포기한 필립모리스의 전략은 한국 기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말보로를 박물관에서나 보게 될 날이 올지 궁금하다.

전설리 논설위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