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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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피해가 발생한 사고에서 가해자의 책임보험 한도가 적어 모든 손해를 보상할 수 없는 경우 피해자의 보험금 청구권이 보험사의 구상권보다 우선한다는 첫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는 한화손해보험이 삼성화재해상보험과 DB손해보험을 상대로 낸 구상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인천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인천 통일공단의 세척유 제조기업 이레화학은 2018년 4월 폐유를 아세톤과 알코올로 분리하는 과정에서 작업자의 실수로 큰 화재를 냈다. 이 화재로 이레화학 공장뿐만 아니라 A, B사를 비롯한 인근 다른 사업장에까지 불길이 번져 손해를 입혔다.

이레화학은 삼성화재와 DB손보 등 3개 회사에 각 3억원 한도의 책임보험을 가입했다. 당시 약 23억원으로 추산된 화재 피해액을 보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이 사건의 원고인 한화손보는 A, B사와 화재보험을 체결했고, 이 사고 이후 A사에 1억2000만원, B사에 1600만원을 보험금으로 지급했다. 한화손보는 이후 "A·B사에 손해보험금을 지급하면서 직접청구권을 대위 취득(제3자가 법률적 지위를 대신하는 것)했다"며 이레화학 측 책임보험사인 삼성화재와 DB손보를 상대로 13억5000만원의 구상금을 청구했다.

하지만 삼성화재와 DB손보는 해당 화재로 피해를 본 다른 업체들에 이미 보험금으로 각각 16억원과 3억원을 지급했다며 구상금 지급을 거부했다. 민법 제507조에서 규정한 '혼동' 발생으로 인해 한화손보에 대한 지급 의무가 자신들에겐 없다고 주장했다. '혼동'이란 채권·채무처럼 서로 대립하는 2개의 법률상 지위가 동일인에게 귀속하는 경우로, 일반적으로 한 편이 다른 편에 흡수돼 소멸하는 게 원칙이다. 삼성화재와 DB손보는 "(피해 업체들에) 화재보험금을 지급해 직접청구권을 대위 취득했다"며 "이 직접청구권과 삼성화재와 DB손보가 부담해야 할 책임보험금 지급 의무는 혼동으로 소멸했다"고 맞섰다.

1심에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이 나왔다. 2심 재판부 역시 "피고들 또한 이 사건 화재의 다른 피해자들에게 보험금을 지급해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채권을 대위 취득했더라도 피고들의 원고에 대한 책임보험금을 지급할 의무가 혼동으로 소멸했다고 볼 수 없다"며 피고들의 상고를 기각했다.

대법원은 책임보험 한도액이 피해자들의 손해액보다 적은 탓에 피해자의 직접청구권과 화재보험사가 대위 취득한 직접청구권이 경합하는 경우 어떤 권리가 우선하는지를 이 사건의 쟁점으로 봤다.

대법원은 "화재보험자는 직접청구권을 행사하는 다른 피해자들보다 우선해 책임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없고,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피해자들에 대한 책임보험금 지급이 이뤄진 다음 책임보험 한도액에 남은 금액이 있다면 이에 대해서 지급받을 수 있을 뿐"이라고 판시했다.

다만 대법원은 삼성화재와 DB손보의 혼동 주장을 모두 배척한 원심판결은 다시 심리하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직접청구권을 행사한 피해자가 없다면 피고들이 대위 취득한 손해배상채권과 손해배상채무는 동일인에게 귀속돼 혼동의 법률효과가 발생한다"며 "이 사건 청구의 정당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직접청구권을 행사한 피해자들의 손해액과 원고 및 피고들이 직접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를 심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책임보험 한도액이 다수 피해자의 손해 합계액에 미치지 못해 피해자의 직접청구권과 화재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한 후 보험자대위로 취득한 직접청구권이 경합하는 경우 원칙적으로 피해자의 직접청구권이 우선한다는 점을 최초로 명시한 판결"이라고 밝혔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