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첫 남자 골프 메이저대회였던 지난달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미국 언론들이 보여준 보도 행태를 보면 브룩스 켑카(33·미국)가 자신의 나라에서 얼마나 미움을 받고 있는지 확연하게 드러난다. 미국 언론과 골프계는 자국 선수인 켑카가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쌤통’이라며 환호했다. 스페인 출신 욘 람(29)의 우승 소식은 뒷전이었다. 켑카에 대한 미국 골프계의 배신감이 그만큼 컸다는 얘기다.

켑카가 누구였나. ‘장타자’ 켑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후원으로 이뤄지는) LIV 골프로는 가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의 수호자였고 슈퍼맨이었다. 그랬던 켑카가 지난해 돌연 LIV 골프로 이적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인들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켑카는 미국을 위협하는 ‘빌런’이 돼버렸다.

22일(한국시간) 끝난 PGA 챔피언십에서 켑카는 미국 골프계에 또다시 비수를 꽂았다. 미국 PGA 투어 소속 슈퍼스타들이 총출동한 대회를 제패하면서다. 그는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의 오크힐CC(파70·7380야드)에서 열린 총상금 1750만달러의 남자 골프 메이저대회 PGA 챔피언십에서 최종 합계 9언더파 271타를 쳐 우승했다. PGA 투어를 대표하는 빅토르 호블란(26·노르웨이)과 스코티 셰플러(27·미국)는 켑카에게 2타가 모자랐다. 지난해 6월 LIV 골프로 이적한 켑카가 PGA 투어 대회에서 우승한 건 2021년 2월 피닉스오픈 이후 2년3개월 만이다. 우승 상금은 315만달러(약 41억8000만원)다.

켑카의 이번 우승은 PGA 투어에 여러모로 뼈아픈 장면이다. 일단 PGA 투어와 대립각을 세우는 LIV 골프 선수로는 최초로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한 선수가 됐다. ‘LIV는 한물간 선수들의 리그’라고 비판하는 사람들 앞에서 켑카는 골프 대회에서 가장 유명한 우승 트로피인 ‘워너메이커’를 들어 올리는 상징적인 장면을 남겼다. ‘메이저 사냥꾼’의 면모도 재확인했다. 켑카는 PGA 투어 통산 9승 중 메이저대회에서만 5승을 올렸고, 그 가운데 PGA 챔피언십에서만 3승(2018·2019·2023년)을 수확했다. 메이저대회에서 5승 이상을 기록한 건 PGA 투어 역사상 켑카를 포함해 20명만 달성한 대기록이다.

켑카가 ‘조국의 골프 리그’를 등진 이유는 올해 공개된 넷플릭스의 골프 다큐멘터리 ‘풀스윙’을 통해 약간이나마 드러났다. 2017년 US오픈을 시작으로 3년간 메이저대회 4승을 쓸어 담은 켑카는 어느 순간 부상에 시달렸고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초점이 풀린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던 켑카는 “더 이상 스코티 셰플러 같은 젊은 선수들과 경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우승이 아니면 (다른 성적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기도 했다.

LIV 골프에 도망치듯 왔다는 얘기였다. 공교롭게도 켑카는 LIV 골프로 건너와 2승을 거두며 부활을 알렸다. 현지 언론들은 1년에 14개 대회(지난해 8개)가 전부인 LIV 골프에서 뛰면서 켑카가 부상에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보고 있다. 켑카는 “올해 초부터 서서히 몸이 좋아졌다”고 했다.

이번 경기에서 한 타 차 선두로 나선 켑카는 전반에 1타를 줄이는 데 그쳤다. 그러나 그를 추격해 온 호블란도 격차를 줄이지 못하면서 켑카의 리드가 이어졌다. 승부처는 16번홀(파4)이었다. 켑카는 두 번째 샷을 홀 옆에 붙여 가볍게 버디를 추가했고, 호블란이 티샷을 벙커에 빠뜨린 뒤 고전하며 더블 보기를 적어내 순식간에 켑카 쪽으로 승부의 추가 기울었다.

이번 우승으로 켑카는 세계랭킹을 44위에서 13위로 끌어 올렸다.

셰플러는 역전 우승에는 실패했으나 이번 대회 성적을 바탕으로 욘 람을 밀어내고 세계랭킹 1위 자리를 탈환했다. 람이 이번주 7오버파 287타 공동 50위에 그친 것도 셰플러에겐 도움이 됐다. 한국 선수 중에서 유일하게 커트 통과한 이경훈(32)은 5오버파 285타 공동 29위를 기록했다.

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