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정부 하명수사 극복…정치 정글에서 빛난 뚝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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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만나는 것 피하지는 않지만, 즐기지도 않는 성격
당대표 경선 시절 팔벌려 포옹 ... 노력으로 성향 극복
고래고기 사건 등 거치며 결기 세워 ... 보기보단 호락안해
이 같은 성향은 17대에 처음 국회에 들어왔을 때는 좀 더 심했고, 이후 꾸준히 노력해서 바꾼 것으로 평가된다. 17대 의원시절 보좌진 사이에 다툼이 생겨 절반 정도가 의원실을 나가야 할 일이 있었다. 당시 김기현은 개입하지 않고 내버려 두다가 보좌진 간 관계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한쪽을 불러서 사퇴를 권고하는 식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노력파인 만큼 정치인으로서는 단점이 될 수 있는 이 같은 성향을 극복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 당대표 경선 때 의원이나 당 관계자를 만날 때마다 포옹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김기현은 상대가 보이면 “아이고 OOO 의원님!”이라고 부르며 두 팔을 벌리고 몇 걸음 다가가 껴안았다. 제3자가 보기에는 과장되게 느낄 수도 있지만, 상대 입장에서는 싫어하기 힘든 제스처였다.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상황에서 내성적인 성향을 억누르고, 상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한 전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개신교인= 모태신앙으로 주일학교, 청년부, 성가대에서 열심히 활동한 열성적인 개신교인이다. 현재는 울산 남구 대암교회 장로.
정치를 시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도 교회의 올바른 길과 세상의 모습이 다르다고 느껴 ‘why not change the world’라는 고민을 고교 때부터 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설명한다. 가장 존경하고 이상적인 정치인으로 기독교 가치에 입각해 노예무역 폐지에 앞장섰던 19세기 영국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를 꼽는다. 성공한 기독정치인의 모델을 만들겠다는 것을 자신의 정치 목표로 제시하기도 한다.
이 같은 가치를 바탕으로 동성애 및 동성혼 합법화, 차별금지법 등에 적극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낸다. 정치적 득실과 상관없이 이 분야에 대해서는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국내 기독교 인구가 많은 만큼 이 같은 신앙은 김기현에게 강점이 되기도 한다. 보수정당 대표로서 호남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로 ‘영남보다 강한 호남의 기독교세’를 들기도 한다. ▶젠틀함 혹은 노잼= 내향적인 성격에 개신교인으로서 신앙, 판사 출신의 성향 등이 결합되면서 좀처럼 막말을 하지 않는다. 상대를 공격하더라도 사실관계를 중심으로 비판한다.
그렇다 보니 재미없는 캐릭터로 분류되기도 한다. 인터뷰 과정에서 파격이나 제목으로 뽑을 만한 말을 좀처럼 하지 않는 인물이다. 식사 자리나 기자들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상대를 웃기기보다는 본인이 ‘하하하’ 크게 웃는 경우가 많다.
상대는 이 지역에서 3선 시의원을 지내고 시의회 부의장을 했으며, 집안은 조선시대부터 500년간 지역에 뿌리를 내린 인사였다. 시의원 20명이 ‘김기현이 공천되면 집단 탈당하겠다’며 엄포를 놓는 가운데 바닥부터 훑은 선거전과 서울 대 법대·판사 출신이라는 인물론을 통해 경선에서 승리해 공천을 받았다.
그는 당시 “특정 계파의 보스가 낙점한 경우가 아니어서 특정 정치인에게 빚진 것이 없고, 앞으로도 빚질 일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실제 이후 정치에서 친이 친박 등 당내 주요 정치세력에 줄 서지 않는 행보로 이어졌다. 2023년에도 친윤의 지원을 등에 업고 당대표가 됐지만 윤핵관으로는 분류되지 않는 독특한 포지션을 취했다. ▶2018년 지방선거와 ‘고래고기 사건’= 김기현은 2018년 지방선거에서 울산시장 재선에 도전했다가 낙선했다. 김기현 측근의 비리 의혹을 수사하겠다며 선거일 3개월을 앞두고 이뤄진 경찰의 대대적인 울산시청 압수수색이 악재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이와 관련해 문재인 청와대의 하명수사 의혹이 불거졌다. 압수수색 두 달 전 청와대 행정관 두 명이 울산을 방문한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당시 청와대가 이유로 든 것이 고래고기 사건이었다. 2016년 경찰이 울산에서 불법 포획한 고래를 압수했는데, 수사과정에서 검찰이 이를 해당 업자에게 되돌려줬다는 것이 고래고기 사건의 핵심이다. 검경이 서로 진실게임을 벌이며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청와대 하명 수사 의혹은 물론, 김기현의 측근 비리 관련 재판은 여전히 결론을 못 내고 있다.
주변에서는 정치 입문 전반기만 해도 상대적으로 온건하던 김기현의 성향이 바뀐 이유로 지방선거 낙선과 이를 둘러싼 민주당 정부 핵심의 개입 의혹을 꼽는다. 지방선거 낙선 이후 2년간 수사를 받고 대정부 투쟁을 벌이면서 결기를 세우게 됐다는 분석이다.
▶2021년 국민의힘 원내대표= 협상가로서 김기현의 능력이 당 안팎에 알려지게 된 시기다. 친여 성향 무소속까지 180석에 가까운 의석을 장악한 거대여당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협상을 했다. ‘뚝심 있다’ ‘보기보다 호락호락하지 않다’ 등 당 안팎의 김기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이때의 모습을 바탕으로 내려진 경우가 많다.
민주당과 협상을 하며 김기현은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집요하게 매달렸다. 통상 3~4번 하는 협상을 6번, 7번까지 끌고가며 조금이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 애썼다.
매번 협상을 앞두고 했던 치밀한 사전준비도 주목할 만하다. 어떤 제안을 던졌을 때 상대가 반응할 경우의 수와 그 대응을 하나하나 준비하고, 각 대응에 대한 반응과 그에 대한 대응을 다시 준비하는 식으로 수백 가지 경우의 수를 모두 계산해 입장을 정리한다. 그리고 이를 숙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측근들과 도상연습을 한다. 부족한 순발력을 치밀한 준비로 보완한 사례다. ▶2021년 12월 윤석열·이준석 중재= 대선 준비 과정의 의견차로 잠행한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대표와 윤석열 대선 후보를 울주군 언양읍의 한 식당으로 불러 중재했다. 세 사람이 손을 잡은 극적인 모습이 연출되며 김기현의 역할이 부각됐다.
당일 윤석열 이준석이 술을 마시며 관계를 복원했고, 술을 못하는 김기현도 이에 맞춰 음주를 하느라 상당히 고생했다는 후문이다. 온종일 링거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와 관련해 이준석은 당 대표 시절 원내대표로 합을 맞춘 김기현을 배려해 회합 장소를 김기현의 지역구 근처로 잡았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제주에 내려가 있다가 굳이 울산으로 간 것이 ‘김기현의 광을 팔게 해주려 했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돈독하던 김기현과 이준석의 관계는 2022년 이준석이 당 징계 결정에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고, 이를 김기현이 비판한 것을 시작으로 벌어진다.
김기현이 고교 2학년 때 교회에서 성가대로 활동할 때 반주자이던 이선애와 교제를 시작했다. 이선애는 부친이 일찍 작고하는 등 가정환경이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김기현은 꾸준히 옆을 지켰고, 사법고시 합격 후 결혼했다.
당 바깥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선애는 적극적인 내조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명맥이 끊어졌던 의원 배우자 모임을 김기현이 원내대표를 맡은 직후 주도적으로 되살리기도 했다. 김장 봉사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울산 지역 주요 행사도 적극 기획해 활동한다. 내향적인 김기현에 비해 활달하고 외향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김병극= 김기현의 부친이다. 울산 지역 정치인으로 김기현은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정치는 물론 판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하기 위해 법조인이 된 것이니까. 만약 아버지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쯤 목사가 돼 있거나 신학자가 돼 있을 것”이라고 사석에서 밝힌 바 있다.
울산 앞바다에서 어업에 종사했으며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에서 활동했다. 1950년대 민주당이 지역 유력자들의 정당이었으며 어업을 위한 자본 투자 등을 감안할 때 어느 정도의 재력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19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 내각이 들어선 1960년 12월 민주당 당적으로 경남도의원에 당선됐다. 이듬해 일어난 5·16으로 지방의회가 해산되며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후 군사정권이 장기화하면서 정치할 기회를 잃었다. 이 기간 김병극은 민주 회복을 주장하며 민주당 인사들과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건강을 해쳐 김기현이 어릴 때 작고했다. 이후 가족이 모두 부산으로 이주하며 김기현은 초·중·고교를 부산에서 나온다.
정치 입문의 동기가 된 ‘아버지가 반독재 투쟁을 했다’는 점은 김기현의 정치적 정체성에도 영향을 준다. 보수정당에 속해 있지만 민주화 운동의 정당성도 어느 정도 인정한다. 존경하는 역대 대통령을 꼽을 때도 이승만 박정희와 함께 김대중 노무현을 거론한다. 정치 경험을 쌓을수록 강해진 대(對)민주당 발언과 달리 실제 정치 성향은 중도적인 이유로 분석된다.
▶프레드 나일= 목사 출신 정치인으로 1981년 호주 상원의원에 당선돼 40년간 의회에서 활동했다. 호주 내 기독교 정당인 기독민주당을 창당해 이끌었다. 기독교인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김기현이 꼭 언급하는 인물이다.
나일은 시드니의 LGBT 축제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이 흔들리는 것을 목격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에도 해당 가치관에 맞지 않는 사항은 정치적 득실을 따지지 않고 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기현이 정치의 목표로 삼은 ‘기독정치인의 모범’에 가까운 인물로 이해된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당대표 경선 시절 팔벌려 포옹 ... 노력으로 성향 극복
고래고기 사건 등 거치며 결기 세워 ... 보기보단 호락안해
17대 총선에서 당선되며 정치에 입문해 2023년 기준 4선 의원이다. 한 차례 울산시장을 지내기도 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울산시장 재선에 도전했지만 일명 ‘고래고기 사건’ 의혹과 관련한 경찰 수사로 지지율이 하락해 낙선했다. 이 사건은 문재인 청와대의 선거개입 의혹으로까지 번졌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 당선되며 재기했다.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거쳐 당 대표에 당선되며 여권 실력자로 부상했다.
김기현을 말해주는 키워드
▶MBTI의 I= 정치인으로서 성공했지만 내향적이라는 평가를 자주 듣는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하지는 않지만 다른 정치인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즐기지는 않는다는 느낌을 흔히 받는다.이 같은 성향은 17대에 처음 국회에 들어왔을 때는 좀 더 심했고, 이후 꾸준히 노력해서 바꾼 것으로 평가된다. 17대 의원시절 보좌진 사이에 다툼이 생겨 절반 정도가 의원실을 나가야 할 일이 있었다. 당시 김기현은 개입하지 않고 내버려 두다가 보좌진 간 관계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한쪽을 불러서 사퇴를 권고하는 식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노력파인 만큼 정치인으로서는 단점이 될 수 있는 이 같은 성향을 극복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 당대표 경선 때 의원이나 당 관계자를 만날 때마다 포옹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김기현은 상대가 보이면 “아이고 OOO 의원님!”이라고 부르며 두 팔을 벌리고 몇 걸음 다가가 껴안았다. 제3자가 보기에는 과장되게 느낄 수도 있지만, 상대 입장에서는 싫어하기 힘든 제스처였다.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상황에서 내성적인 성향을 억누르고, 상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한 전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개신교인= 모태신앙으로 주일학교, 청년부, 성가대에서 열심히 활동한 열성적인 개신교인이다. 현재는 울산 남구 대암교회 장로.
정치를 시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도 교회의 올바른 길과 세상의 모습이 다르다고 느껴 ‘why not change the world’라는 고민을 고교 때부터 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설명한다. 가장 존경하고 이상적인 정치인으로 기독교 가치에 입각해 노예무역 폐지에 앞장섰던 19세기 영국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를 꼽는다. 성공한 기독정치인의 모델을 만들겠다는 것을 자신의 정치 목표로 제시하기도 한다.
이 같은 가치를 바탕으로 동성애 및 동성혼 합법화, 차별금지법 등에 적극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낸다. 정치적 득실과 상관없이 이 분야에 대해서는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국내 기독교 인구가 많은 만큼 이 같은 신앙은 김기현에게 강점이 되기도 한다. 보수정당 대표로서 호남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로 ‘영남보다 강한 호남의 기독교세’를 들기도 한다. ▶젠틀함 혹은 노잼= 내향적인 성격에 개신교인으로서 신앙, 판사 출신의 성향 등이 결합되면서 좀처럼 막말을 하지 않는다. 상대를 공격하더라도 사실관계를 중심으로 비판한다.
그렇다 보니 재미없는 캐릭터로 분류되기도 한다. 인터뷰 과정에서 파격이나 제목으로 뽑을 만한 말을 좀처럼 하지 않는 인물이다. 식사 자리나 기자들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상대를 웃기기보다는 본인이 ‘하하하’ 크게 웃는 경우가 많다.
김기현의 결정적 순간
▶2004년 총선= 판사 생활을 끝낸 뒤 울산에 변호사 사무실을 내기는 했지만 김기현은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지역에 연고가 없었다. 그나마 변호사 사무실이 있던 울산 북구가 아니라 남구에 출마해 더 불리했다. 김기현은 한나라당 사상 첫 번째 총선 후보자 경선을 통해 공천을 받고 국회에 입성했다.상대는 이 지역에서 3선 시의원을 지내고 시의회 부의장을 했으며, 집안은 조선시대부터 500년간 지역에 뿌리를 내린 인사였다. 시의원 20명이 ‘김기현이 공천되면 집단 탈당하겠다’며 엄포를 놓는 가운데 바닥부터 훑은 선거전과 서울 대 법대·판사 출신이라는 인물론을 통해 경선에서 승리해 공천을 받았다.
그는 당시 “특정 계파의 보스가 낙점한 경우가 아니어서 특정 정치인에게 빚진 것이 없고, 앞으로도 빚질 일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실제 이후 정치에서 친이 친박 등 당내 주요 정치세력에 줄 서지 않는 행보로 이어졌다. 2023년에도 친윤의 지원을 등에 업고 당대표가 됐지만 윤핵관으로는 분류되지 않는 독특한 포지션을 취했다. ▶2018년 지방선거와 ‘고래고기 사건’= 김기현은 2018년 지방선거에서 울산시장 재선에 도전했다가 낙선했다. 김기현 측근의 비리 의혹을 수사하겠다며 선거일 3개월을 앞두고 이뤄진 경찰의 대대적인 울산시청 압수수색이 악재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이와 관련해 문재인 청와대의 하명수사 의혹이 불거졌다. 압수수색 두 달 전 청와대 행정관 두 명이 울산을 방문한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당시 청와대가 이유로 든 것이 고래고기 사건이었다. 2016년 경찰이 울산에서 불법 포획한 고래를 압수했는데, 수사과정에서 검찰이 이를 해당 업자에게 되돌려줬다는 것이 고래고기 사건의 핵심이다. 검경이 서로 진실게임을 벌이며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청와대 하명 수사 의혹은 물론, 김기현의 측근 비리 관련 재판은 여전히 결론을 못 내고 있다.
주변에서는 정치 입문 전반기만 해도 상대적으로 온건하던 김기현의 성향이 바뀐 이유로 지방선거 낙선과 이를 둘러싼 민주당 정부 핵심의 개입 의혹을 꼽는다. 지방선거 낙선 이후 2년간 수사를 받고 대정부 투쟁을 벌이면서 결기를 세우게 됐다는 분석이다.
▶2021년 국민의힘 원내대표= 협상가로서 김기현의 능력이 당 안팎에 알려지게 된 시기다. 친여 성향 무소속까지 180석에 가까운 의석을 장악한 거대여당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협상을 했다. ‘뚝심 있다’ ‘보기보다 호락호락하지 않다’ 등 당 안팎의 김기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이때의 모습을 바탕으로 내려진 경우가 많다.
민주당과 협상을 하며 김기현은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집요하게 매달렸다. 통상 3~4번 하는 협상을 6번, 7번까지 끌고가며 조금이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 애썼다.
매번 협상을 앞두고 했던 치밀한 사전준비도 주목할 만하다. 어떤 제안을 던졌을 때 상대가 반응할 경우의 수와 그 대응을 하나하나 준비하고, 각 대응에 대한 반응과 그에 대한 대응을 다시 준비하는 식으로 수백 가지 경우의 수를 모두 계산해 입장을 정리한다. 그리고 이를 숙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측근들과 도상연습을 한다. 부족한 순발력을 치밀한 준비로 보완한 사례다. ▶2021년 12월 윤석열·이준석 중재= 대선 준비 과정의 의견차로 잠행한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대표와 윤석열 대선 후보를 울주군 언양읍의 한 식당으로 불러 중재했다. 세 사람이 손을 잡은 극적인 모습이 연출되며 김기현의 역할이 부각됐다.
당일 윤석열 이준석이 술을 마시며 관계를 복원했고, 술을 못하는 김기현도 이에 맞춰 음주를 하느라 상당히 고생했다는 후문이다. 온종일 링거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와 관련해 이준석은 당 대표 시절 원내대표로 합을 맞춘 김기현을 배려해 회합 장소를 김기현의 지역구 근처로 잡았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제주에 내려가 있다가 굳이 울산으로 간 것이 ‘김기현의 광을 팔게 해주려 했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돈독하던 김기현과 이준석의 관계는 2022년 이준석이 당 징계 결정에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고, 이를 김기현이 비판한 것을 시작으로 벌어진다.
김기현에 영향을 준 사람들
▶이선애= 김기현의 부인. 한 살 아래인 1960년생으로 부부간 금실이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슬하에 1남3녀가 있으며 첫째딸과 막내딸의 나이 차이가 여덟 살이다.김기현이 고교 2학년 때 교회에서 성가대로 활동할 때 반주자이던 이선애와 교제를 시작했다. 이선애는 부친이 일찍 작고하는 등 가정환경이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김기현은 꾸준히 옆을 지켰고, 사법고시 합격 후 결혼했다.
당 바깥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선애는 적극적인 내조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명맥이 끊어졌던 의원 배우자 모임을 김기현이 원내대표를 맡은 직후 주도적으로 되살리기도 했다. 김장 봉사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울산 지역 주요 행사도 적극 기획해 활동한다. 내향적인 김기현에 비해 활달하고 외향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김병극= 김기현의 부친이다. 울산 지역 정치인으로 김기현은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정치는 물론 판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하기 위해 법조인이 된 것이니까. 만약 아버지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쯤 목사가 돼 있거나 신학자가 돼 있을 것”이라고 사석에서 밝힌 바 있다.
울산 앞바다에서 어업에 종사했으며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에서 활동했다. 1950년대 민주당이 지역 유력자들의 정당이었으며 어업을 위한 자본 투자 등을 감안할 때 어느 정도의 재력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19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 내각이 들어선 1960년 12월 민주당 당적으로 경남도의원에 당선됐다. 이듬해 일어난 5·16으로 지방의회가 해산되며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후 군사정권이 장기화하면서 정치할 기회를 잃었다. 이 기간 김병극은 민주 회복을 주장하며 민주당 인사들과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건강을 해쳐 김기현이 어릴 때 작고했다. 이후 가족이 모두 부산으로 이주하며 김기현은 초·중·고교를 부산에서 나온다.
정치 입문의 동기가 된 ‘아버지가 반독재 투쟁을 했다’는 점은 김기현의 정치적 정체성에도 영향을 준다. 보수정당에 속해 있지만 민주화 운동의 정당성도 어느 정도 인정한다. 존경하는 역대 대통령을 꼽을 때도 이승만 박정희와 함께 김대중 노무현을 거론한다. 정치 경험을 쌓을수록 강해진 대(對)민주당 발언과 달리 실제 정치 성향은 중도적인 이유로 분석된다.
▶프레드 나일= 목사 출신 정치인으로 1981년 호주 상원의원에 당선돼 40년간 의회에서 활동했다. 호주 내 기독교 정당인 기독민주당을 창당해 이끌었다. 기독교인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김기현이 꼭 언급하는 인물이다.
나일은 시드니의 LGBT 축제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이 흔들리는 것을 목격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에도 해당 가치관에 맞지 않는 사항은 정치적 득실을 따지지 않고 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기현이 정치의 목표로 삼은 ‘기독정치인의 모범’에 가까운 인물로 이해된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