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저성장의 덫에 빠진 영국이 50여 년 만에 다시 ‘유럽의 병자’ 자리를 꿰찰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지속적인 긴축 정책에도 미국과 서유럽 주요국들 대비 높은 물가상승률이 유지되면서 ‘영국병’에 맞먹는 경제 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식품 물가 19.1% 치솟아

25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전날 영국 통계청은 4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7% 올랐다고 발표했다. 전월(10.1%)과 비교하면 둔화했지만, 영란은행(BOE)이 제시한 전망치(8.4%)는 웃돌았다. 식품과 에너지 등 변동성이 큰 품목들을 제외한 근원 CPI의 전월 대비 상승률은 6.8%로, 전월(6.2%)보다 확대됐다. 지난 3월 45년 만에 최고치(19.2%)를 기록했던 식품 물가가 4월에도 유사한 수준(19.1%)을 이어가면서 전체 물가를 끌어올렸다.

이밖에 중고차 가격과 휴대전화 요금, 책, 담배, 스포츠용품, 원예 장비와 반려동물용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서 물가가 일제히 상승했다고 FT는 전했다.

영국의 물가상승률은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 평균(7%)보다 훨씬 높다. 서유럽 국가 중 물가상승률이 8%를 넘는 국가는 영국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뿐이다. 미국에서도 CPI 상승률은 10개월 연속 하락해 4.9%까지 둔화한 상태다.
영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 자료=파이낸셜타임스
영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 자료=파이낸셜타임스
영국 물가에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여파도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같은 날 런던정경대(LSE)는 2019~2023년(3월) 사이 영국의 식품 가격이 25% 오르는 동안 브렉시트로 생긴 무역 장벽이 8%포인트만큼 기여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날 CPI 발표 직후 추가 금리 인상에 대한 기대감이 퍼지면서 영국의 국채 수익률이 급등했다. 2년 만기 국채 금리는 이날 0.24%포인트 오른 4.37%를 기록했는데, 이는 지난해 9월 리즈 트러스 전 총리 집권 당시 ‘미니예산’으로 초래된 경제 위기 때와 유사한 수준이다. 당시 2년물 금리는 4.7%로 정점을 찍은 뒤 11월까지 3% 아래로 떨어졌다가 최근 몇 주 동안 뚜렷한 상승 곡선을 그렸다.

선물 시장에선 현재 4.5% 수준인 영국의 기준금리가 연말께 5.3%까지 오를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온다. 판테온 매크로이코노믹스의 사무엘 톰즈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6월에 금리 인상을 중단하기에는 인플레이션 둔화 폭이 너무 작다”고 지적했다.
앤드루 베일리 영란은행(BOE) 총재.
앤드루 베일리 영란은행(BOE) 총재.

빗나간 BOE 예측에 '책임론' 거세

FT는 현재 물가 상황이 영국병이 만연했던 1970년대와 유사한 수준으로 영국 경제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영국병이란, 과도한 복지 지출로 고비용‧저효율 구조가 초래되면서 사회 전반을 무기력한 분위기가 잠식했던 현상을 의미한다. 경기침체(stagnation)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이 공존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다.

영국에선 통화 당국의 책임론이 거세게 일고 있다. BOE가 물가 상황을 너무 낙관해 시장에 적절한 신호를 주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올해 3월 물가상승률에 대한 BOE의 예측은 9.2%로, 실제(10.1%) 수치를 빗나갔다.

앤드루 베일리 BOE 총재는 지난 23일 이와 관련해 “물가를 예측하고 통제하는 데 있어 BOE는 매우 큰 교훈을 얻었다”며 실책을 일부 인정했다. 모로코를 덮친 악천후가 오이, 토마토 등 부패하기 쉬운 식품들의 물가를 “예상치 못하게” 밀어 올렸다는 설명이었다.

베일리 총재는 과거 영국병으로 이어졌던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이 재현되고 있다고도 인정했다. 이는 기대인플레이션을 바탕으로 상승한 임금이 물가를 밀어 올려 노동자들로 하여금 더 강한 임금 인상을 요구하게 만드는 현상이다.

다만 휴 필 BOE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노동시장의 구조와 통화정책이 결정되는 방식이 과거와는 매우 다르다”며 단순 비교는 어렵다고 반박했다.

한편 영국을 포함한 유럽 전역에서 식품 물가가 급등하면서 일반 가계들의 식품 소비량이 줄어들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영국의 소득 하위 20% 가구 중 60%가량이 식료품 구매를 줄였고, 독일에선 지난 3월 식료품 매출 규모가 1994년 이후 최대 폭인 10.3%(전년 동월 대비) 감소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