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아리 군의 신년인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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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김연수의 듣는 소설
차창으로 어떤 장면이 스쳐갔다. 아련한 불빛이 먼 기억 속의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병아리 군이 떠난 박스 안을 은은하게 밝히던 노란 백열등 불빛이었다. 어린 그는 빈 모이통을 보고는 부엌으로 가 쌀과 잡곡 등을 가져왔다. 그리고 방에서 모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문 밖 거실에서는 엄마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택시 뒷좌석에 앉은 그의 눈앞에 아직은 젊다고 말할 수 있는 엄마, 사십 대의 엄마가 생생하게 나타났다. 그는 손을 내밀어 차창을 어루만졌다. 내 말이 들릴까? 할 수만 있다면 말하고 싶어. 내가 지금 엄마한테 많이 미안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자 대답인 양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곧 괜찮아지겠지.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라. 그건 그 장면 속 엄마의 마음이 말하는 소리였다. 그래서 그는 알게 됐다. 그 전 날 밤에 병아리 군이 죽었다는 사실을. 엄마는 그 일로 그가 받을 상처를 걱정하고 있었다. 엄마의 마음이 여전히 생생해 그는 놀랐다. 그건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마음인데도. 지금은 그의 엄마도 아빠도 모두 돌아가셨으니까.
차창에서 시선을 떼고 그는 병아리 군을 쳐다봤다. 병아리 군 역시 오래 전에 죽은 존재다. 그제야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병아리 군. 이건 우리 집으로 가는 강변도로가 아닌 것 같아. 내가 알아서 찾아갈 테니 차를 좀 세워보게.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차에서는 아무도 못 내려. 그리고 이건 자네 집으로 가는 길이 맞아. 말하자면, 진짜 집이랄까.”
그러더니 병아리 군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진짜 집이라고?”
“너무 겁내지 말라구. 어차피 저건 자네 인생의 강이 아닌가? 진짜 집에 가기 전에 우린 저 강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는 것뿐이니까. 이젠 더 이상 자네 인생이 아니니 그냥 영화를 본다고 생각하면 된다네. 팝콘이라도 사올 걸 그랬나?”
병아리 군이 유쾌하게 말했다. 그러는 동안 더 많은 인생의 장면들이 차창을 스쳐 지나갔다. 암병동의 아버지를 찾아가서는 30분도 되지 않아 바빠서 그만 가봐야겠다고 말하고 일어선 일, 며칠간 연락을 끊고 지내다가 마침내 만난 연인에게 일방적으로 작별을 고하고 헤어진 뒤 이유라도 알고 싶다는 그녀의 문자에 연락처를 차단한 일, 대인 관계가 서툴렀던 한 직원에게 권고사직을 권하며 거짓말을 능숙하게 하고는 스스로 잘했다고 만족한 일 등등이 물처럼 흘러갔다.
그건 팝콘을 먹으며 볼 만한 영화 같은 게 아니었다. 그 장면들에서 그는 연기를 처음 하는 사람처럼 자기 배역을 소화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는 주어진 대사와 역기를 하는데 급급해 앞에 있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비로소 그들의 말과 행동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뒤늦게 그들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모두 느껴졌다. 그들은 자기 생각에 빠져 그가 늘어놓는 말과 행동에 실망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떤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그들은 지켜보고 있었다. 그 믿음을 깨버린 것은 바로 그였다.
아무 쓸모도 없는 물건을 얻으려고 꾀를 쓰다가 소중한 것을 모두 잃어버린 우화 속 동물이 꼭 자기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그의 인생이 흘러가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 이제 그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우는 그를 보더니 병아리 군은 말없이 카 오디오를 켰다.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병아리 군, 뭔가 잘못된 것 같아.”
물기 머금은 목소리로 그가 불쑥 말했다.
“그게 막 죽은 사람의 첫 반응이지. 일단 부정하고 보기.”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지나가는 장면은 내 인생이 아니야. 아무래도 자네가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것 같네.”
“이 택시가 나름 첨단시스템이라네. 자네 몸에 축적된 무의식 정보를 읽어 그 창을 통해 6차원 입체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야. 타인의 생각과 감정도 이제 생생하게 느껴지지? 살아 있을 때 이런 게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그 많은 잔인한 바보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아무튼 잘못된 것은 없다네.”
“생생한 건 맞는데, 저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장면인 걸.” 지나가는 장면 속에서 그는 한 여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그 여자는 자신의 언니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말했다. 언니는 초등학교 영양사였다. 어느 날, 출근해 급식을 준비하던 언니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하고 말았다. 사인은 뇌출혈이었다. 장례를 치른 뒤, 유족인 그녀가 요양비와 보상비를 청구하자 공단 측은 부지급결정서를 보내왔다. 건강보험 요양내역에 고혈압과 당뇨병 진료 내역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처분에 이의가 있으니 행정심판을 신청하고 싶다는 게 그녀가 그를 찾아온 이유였다.
그제야 기억나기 시작했다. 공인노무사 시험에 합격해 수습기간을 거쳐 인천의 한 노무법인에서 일할 때였다. 꿈으로 가득 찬 시절이었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일과 사람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다. 그래서 자세히 봐도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 그 여자의 일에도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 시절의 마음으로 계속 살았다면 그는 어떤 사람이 됐을까?
그 다음 장면에서 둘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재판에서 이겨 유족보상비를 받게 된 그녀가 사례하겠다며 마련한 자리였다. 그녀의 흡족한 기분이 그대로 느껴졌다.
“난 네가 이런 일을 할 줄은 전혀 몰랐어.”
그녀가 말했다.
“이런 일?”
“노무사 일. 그때 너는 졸업하면 시골로 내려가 빵가게를 차리겠다고 했거든. 기억 안 나지?”
“전혀. 내가 서울도 아니고 시골에 가서, 빵가게를 차린다고?”
“그래. 무안에 가서 마늘빵과 양파빵을 만들어 팔겠다고 했어.”
그러더니 여자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때 그녀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고,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났다. 대학 시절, 동기생의 부친상이 있었다. 한 예비역 선배에게 중고 스텔라가 있었기에 과 친구들끼리 문상을 다녀오기로 했다. 그렇게 무박 2일의 일정으로 무안까지 다녀왔는데, 그 차에 그녀가 있었던 것이다.
“요즘도 가끔 그 여행 생각을 해. 문상 가는 길이라 그랬는지 다들 내게 잘해줬지. 덕분에 잘 먹고 잘 구경하고 왔어. 그때 내게 같이 가자고 말해줘서 무척 고마웠어. 나한테 말 걸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였거든.”
“내가 같이 가자고 그랬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도 자기 일처럼 처리해주고. 이 신세를 어떻게 갚으면 좋을지 모르겠어. 언니와 나는 참 힘들게 커서 남들 안 겪는 일들도 많이 겪었거든. 그래서 나도 보답하고 싶네. 이제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안 믿어도 좋아. 흘려듣고 다 잊어버려도 상관없어. 나중에, 아주 나중에 영화를 보듯이 이 장면을 다시 보게 될 테고, 그때 기억하면 되니까. 언니와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었어.”
그녀가 말했다. (다음 회에 계속)
문 밖 거실에서는 엄마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택시 뒷좌석에 앉은 그의 눈앞에 아직은 젊다고 말할 수 있는 엄마, 사십 대의 엄마가 생생하게 나타났다. 그는 손을 내밀어 차창을 어루만졌다. 내 말이 들릴까? 할 수만 있다면 말하고 싶어. 내가 지금 엄마한테 많이 미안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자 대답인 양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곧 괜찮아지겠지.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라. 그건 그 장면 속 엄마의 마음이 말하는 소리였다. 그래서 그는 알게 됐다. 그 전 날 밤에 병아리 군이 죽었다는 사실을. 엄마는 그 일로 그가 받을 상처를 걱정하고 있었다. 엄마의 마음이 여전히 생생해 그는 놀랐다. 그건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마음인데도. 지금은 그의 엄마도 아빠도 모두 돌아가셨으니까.
차창에서 시선을 떼고 그는 병아리 군을 쳐다봤다. 병아리 군 역시 오래 전에 죽은 존재다. 그제야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병아리 군. 이건 우리 집으로 가는 강변도로가 아닌 것 같아. 내가 알아서 찾아갈 테니 차를 좀 세워보게.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차에서는 아무도 못 내려. 그리고 이건 자네 집으로 가는 길이 맞아. 말하자면, 진짜 집이랄까.”
그러더니 병아리 군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진짜 집이라고?”
“너무 겁내지 말라구. 어차피 저건 자네 인생의 강이 아닌가? 진짜 집에 가기 전에 우린 저 강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는 것뿐이니까. 이젠 더 이상 자네 인생이 아니니 그냥 영화를 본다고 생각하면 된다네. 팝콘이라도 사올 걸 그랬나?”
병아리 군이 유쾌하게 말했다. 그러는 동안 더 많은 인생의 장면들이 차창을 스쳐 지나갔다. 암병동의 아버지를 찾아가서는 30분도 되지 않아 바빠서 그만 가봐야겠다고 말하고 일어선 일, 며칠간 연락을 끊고 지내다가 마침내 만난 연인에게 일방적으로 작별을 고하고 헤어진 뒤 이유라도 알고 싶다는 그녀의 문자에 연락처를 차단한 일, 대인 관계가 서툴렀던 한 직원에게 권고사직을 권하며 거짓말을 능숙하게 하고는 스스로 잘했다고 만족한 일 등등이 물처럼 흘러갔다.
그건 팝콘을 먹으며 볼 만한 영화 같은 게 아니었다. 그 장면들에서 그는 연기를 처음 하는 사람처럼 자기 배역을 소화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는 주어진 대사와 역기를 하는데 급급해 앞에 있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비로소 그들의 말과 행동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뒤늦게 그들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모두 느껴졌다. 그들은 자기 생각에 빠져 그가 늘어놓는 말과 행동에 실망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떤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그들은 지켜보고 있었다. 그 믿음을 깨버린 것은 바로 그였다.
아무 쓸모도 없는 물건을 얻으려고 꾀를 쓰다가 소중한 것을 모두 잃어버린 우화 속 동물이 꼭 자기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그의 인생이 흘러가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 이제 그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우는 그를 보더니 병아리 군은 말없이 카 오디오를 켰다.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병아리 군, 뭔가 잘못된 것 같아.”
물기 머금은 목소리로 그가 불쑥 말했다.
“그게 막 죽은 사람의 첫 반응이지. 일단 부정하고 보기.”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지나가는 장면은 내 인생이 아니야. 아무래도 자네가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것 같네.”
“이 택시가 나름 첨단시스템이라네. 자네 몸에 축적된 무의식 정보를 읽어 그 창을 통해 6차원 입체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야. 타인의 생각과 감정도 이제 생생하게 느껴지지? 살아 있을 때 이런 게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그 많은 잔인한 바보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아무튼 잘못된 것은 없다네.”
“생생한 건 맞는데, 저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장면인 걸.” 지나가는 장면 속에서 그는 한 여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그 여자는 자신의 언니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말했다. 언니는 초등학교 영양사였다. 어느 날, 출근해 급식을 준비하던 언니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하고 말았다. 사인은 뇌출혈이었다. 장례를 치른 뒤, 유족인 그녀가 요양비와 보상비를 청구하자 공단 측은 부지급결정서를 보내왔다. 건강보험 요양내역에 고혈압과 당뇨병 진료 내역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처분에 이의가 있으니 행정심판을 신청하고 싶다는 게 그녀가 그를 찾아온 이유였다.
그제야 기억나기 시작했다. 공인노무사 시험에 합격해 수습기간을 거쳐 인천의 한 노무법인에서 일할 때였다. 꿈으로 가득 찬 시절이었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일과 사람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다. 그래서 자세히 봐도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 그 여자의 일에도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 시절의 마음으로 계속 살았다면 그는 어떤 사람이 됐을까?
그 다음 장면에서 둘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재판에서 이겨 유족보상비를 받게 된 그녀가 사례하겠다며 마련한 자리였다. 그녀의 흡족한 기분이 그대로 느껴졌다.
“난 네가 이런 일을 할 줄은 전혀 몰랐어.”
그녀가 말했다.
“이런 일?”
“노무사 일. 그때 너는 졸업하면 시골로 내려가 빵가게를 차리겠다고 했거든. 기억 안 나지?”
“전혀. 내가 서울도 아니고 시골에 가서, 빵가게를 차린다고?”
“그래. 무안에 가서 마늘빵과 양파빵을 만들어 팔겠다고 했어.”
그러더니 여자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때 그녀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고,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났다. 대학 시절, 동기생의 부친상이 있었다. 한 예비역 선배에게 중고 스텔라가 있었기에 과 친구들끼리 문상을 다녀오기로 했다. 그렇게 무박 2일의 일정으로 무안까지 다녀왔는데, 그 차에 그녀가 있었던 것이다.
“요즘도 가끔 그 여행 생각을 해. 문상 가는 길이라 그랬는지 다들 내게 잘해줬지. 덕분에 잘 먹고 잘 구경하고 왔어. 그때 내게 같이 가자고 말해줘서 무척 고마웠어. 나한테 말 걸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였거든.”
“내가 같이 가자고 그랬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도 자기 일처럼 처리해주고. 이 신세를 어떻게 갚으면 좋을지 모르겠어. 언니와 나는 참 힘들게 커서 남들 안 겪는 일들도 많이 겪었거든. 그래서 나도 보답하고 싶네. 이제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안 믿어도 좋아. 흘려듣고 다 잊어버려도 상관없어. 나중에, 아주 나중에 영화를 보듯이 이 장면을 다시 보게 될 테고, 그때 기억하면 되니까. 언니와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었어.”
그녀가 말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