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의 정체'에 혼절한 지젤…관객은 숨을 죽였다 [발레 리뷰]
잘라 말하면 발레 ‘지젤’은 ‘사랑에 빠진 남녀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매우 지엽적이며, 나아가 오독의 여지를 남기는 설명이다.

국립발레단 196회 정기공연 지젤이 지난 27일 닷새간의 공연을 마치고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막을 내렸다. 지젤은 19세기 유럽을 풍미한 낭만주의의 자장 안에 있는 작품으로 ‘낭만 발레’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지젤에서 1막 매드신과 2막 윌리의 춤은 낭만 발레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매드신은 지젤이 연인 알브레히트가 귀족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정신을 놓는 장면이다. 이번 무대에서 지젤 역의 발레리나는 돌변하는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았는데, 강수진 단장의 현역 시절 특기인 드라마 발레 연기가 재현됐다.

강 단장은 부임 후 연기가 두드러진 드라마 발레를 레퍼토리 삼아 단원들의 연기력을 끌어올렸다. 이 하이라이트 장면으로 1막이 끝난다.

2막은 그렇게 죽음에 이른 지젤이 춤의 요정 윌리가 된 이후의 이야기로 한 남자가 지젤의 무덤을 찾아와 애도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남자의 정체는 뒤에 소개하기로 하자. 독일에서는 처녀가 죽으면 윌리가 돼 남자를 유혹해 죽을 때까지 춤을 추게 한다는 전설이 있다. 지젤은 이 전설을 차용하는데, 윌리의 여왕인 미르타는 그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특히 잔 스텝으로 유령처럼 이동하는 모습은 포인트 기법의 정점이 발하는 장면이다. 미르타 역의 한나래는 국립발레단에 몇 안 되는 엄마 발레리나로, 이번 무대에서 본인의 이력에 손에 꼽을 만한 카리스마 있는 여왕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뿐만 아니다. 24명의 윌리가 만들어내는 군무는 지젤의 백미인 동시에 발레 블랑의 백미로 꼽힌다. 윌리들의 하핑 장면은 압권이다. 하핑이란 한 다리를 위로 뻗은 아라베스크 상태로 점프하는 동작으로, 푸르스름한 몽환적 분위기 아래 나풀거리는 로맨틱 튀튀를 입은 발레리나들이 환상계의 장관을 연출한다. 이번 무대에서는 국립발레단의 코르드발레 단원들이 세 명씩 짝을 이뤄 무대 양옆에서 등장한다. 그리고는 점프 타이밍, 팔의 방향과 각도 등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매스게임을 연상케 하는 앙상블을 연출한다. 강도 높은 훈련량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지젤은 연인 알브레히트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으나 알브레히트를 미르타와 윌리들로부터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 이 장면에서 알브레히트는 앙트르샤 시스(제자리에서 뛰어 두 다리를 앞뒤로 여섯 번 교차하는 기술)를 구사하는데, 허서명은 부상이 믿기지 않을 만큼 부상 투혼을 발휘했다. 사랑, 그것이 무엇이기에. 흥미로운 건 프랑스어로 사랑(amour)과 죽음(mort)은 형태가 매우 비슷한데, 영어 ‘to’에 대항하는 전치사()를 더하면 발음마저 비슷해진다. Amour, mort. 사랑, 죽음에 이르는. 그것이 극한의 낭만 아닌가.

사족 하나만 덧붙이고 싶다. 앞서 쓴 한 줄 평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의 비극’에서 젊은 남자는 알브레히트가 아니다. 알브레히트가 나타나기 오래전부터 지젤을 흠모한 힐라리온이 바로 그다.

이번 공연에서는 ‘돈키호테’ ‘해적’의 안무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송정빈이 힐라리온 역으로 출연했는데,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알브레히트의 정체를 밝히고 나중에는 지젤을 애도하다가 억울한 죽음을 맞는 힐라리온이야말로 진정한 낭만주의자가 아닐까. 알브레히트에게는 미안하지만.

김일송 공연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