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전경.  /한경DB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전경. /한경DB
1991년 12월 19일 오전 8시. 오후 개각을 앞두고 현직 국무위원들로 구성된 마지막 국무회의가 열렸다. 몇몇 장관들은 이 회의를 끝으로 야인으로 돌아가는 상황. 덕담을 주고받으면서 시작한 이날 회의는 시간이 흐를수록 달아올랐다.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 안건으로 올린 '예술학교 설치에 관한 법률' 때문이었다. "왜 문화 분야에만 전문학교 특권을 주느냐"는 농림부와 동력자원부 장관의 공격에 이 장관은 "예술가에겐 재능이 전부다. 보통 아이들처럼 기르면 망가진다"고 방어했다. 예술교육은 실기 중심으로 갈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선 기존 입시절차 및 교육과정에서 벗어난 학교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대한민국 예술교육의 요람'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은 이렇게 태어났다. 1992년 학교 문을 연 이후 피아니스트 임윤찬, 발레리나 박세은, 배우 김고은 등 예술계 스타들을 줄줄이 배출했다.

한예종이 또 다시 특혜 논란의 중심에 섰다. 30여년 전 싸움 상대가 비예술계였다면, 이번에는 같은 예술계다. 한예종에 석·박사 학위를 신설하는 '한예종 설치법'을 두고 다른 예술대학들이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서다.

29일 전국예술대학교교수연합(예교련)은 "한예종 1개 기관에만 특혜를 주는 것을 강력히 반대한다"며 한예종 설치법 반대 성명서를 냈다. 이들은 "한예종은 등록금이 일반 예술대학의 절반 수준으로 올해만 국비 950억 원이 투입된다"며 "이런 학교가 석·박사 학위까지 줄 수 있게 되면 영재교육부터 박사과정까지 예술인재들을 독점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동국대도 같은 날 반대 입장문을 내고 "한예종은 교육부의 고등교육법에 따른 관리 감독을 받지 않는 탓에 일반 대학과 달리 교육과정 편성과 입학정원 관리, 교원 채용 등을 아무런 통제 없이 운영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석·박사 학위 과정을 만드는 건 현행 고등교육법을 무시한 모순된 법안"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지난달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는 한예종 설치법에 대해 "본래의 설립목적인 예술 실기교육을 통한 전문예술인 양성이라는 취지에서 벗어나고, 학령인구 감소 등으로 대학을 구조조정하고 있는 정부의 정책과도 맞지 않는 법안"이라며 반대 공문을 교육부 등에 보냈다.

석·박사 신설은 한예종의 30년 숙원 사업이다. 한예종은 현재 고등교육법상 대학이 아니라 '각종 학교'다. 졸업하면 학사 학위는 인정받지만 대학원 과정은 없다. 한예종에 있는 '예술전문사' 과정은 '석사 학위에 상응하는 학력'일 뿐 정식 학위로는 인정받지 못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예종을 나와도 교수가 되려면 다른 학교에 다시 들어가야 하고, 이게 예술인재 해외 유출로 이어지고 있다는 게 한예종의 주장이다. 김대진 한예종 총장은 지난해 개교 30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앞으로 30년의 목표는 '유학 오는 학교'로 만드는 것"이라며 "대학원으로 유학 오는 외국 학생을 받을 수 있도록 학위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예종에 정식 석·박사 학위 과정을 신설하는 내용의 법안은 현재 국회에 3건 발의돼 있다. 앞서 지난 24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문화예술법안심사소위원회는 김윤덕, 박정, 이채익 의원이 각기 발의한 관련 법안들을 심사했는데 이견을 좁히지 못해 30일 추가 논의를 이어갈 예정이다.

한예종 석·박사 신설 논의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앞서 1999년, 2005년에도 법 제정을 추진했지만 무산된 적이 있다. 당시에도 한예종은 다른 예술대들의 반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한예종 석·박사 신설 논란을 계기로 '예술교육기관 수도권 집중현상'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김윤덕 의원은 24일 법안소위에서 "한예종에 석·박사 과정을 신설하는 법안을 만들면서 한예종을 지방으로 옮기는 결정도 같이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