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대표예술로 떠오른 '비주류' 실험미술 [전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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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한국 실험미술'展
50년전 '검열 대상' 파격 예술
지금은 해외서도 인정받아
김구림·이건용 등 29명 참여
9월부터 美 구겐하임서 전시
50년전 '검열 대상' 파격 예술
지금은 해외서도 인정받아
김구림·이건용 등 29명 참여
9월부터 美 구겐하임서 전시
“전위(前衛·아방가르드)를 위장한 사이비 미술 전시는 삼가하시기 바랍니다.”
1976년 3월 국내 미술 관련 단체는 일제히 이런 내용의 공문을 받았다. 청년 작가들의 ‘실험미술’이 사회 질서를 해치니 전시 기회를 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발신자는 국립현대미술관. 노골적인 문화 검열이자 탄압이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당시 실험미술가들의 활동은 신문 문화면에 나오는 예술이 아니라 사회면에 나오는 ‘사건 사고’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47년이 흐른 지난 26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란 제목의 대규모 전시를 열었다. 실험미술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이렇게 세월과 함께 날아갔다. 게다가 이번 전시 기획에는 세계 최고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미국 뉴욕의 솔로몬 R 구겐하임이 참여했다. 한국에서의 전시가 끝나면 구겐하임(9월~내년 1월)과 LA해머미술관(내년 2~5월)으로 무대를 옮긴다.
실험미술은 단색화의 뒤를 이을 한국의 차세대 거포로 꼽힌다. 1960~1970년대 한국 미술을 이끌던 실험미술은 오랜 기간 침체기를 겪다가 몇 년 전부터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국내는 물론 해외 컬렉터들의 관심에 힘입어 이건용, 이강소, 이승택, 김구림 등의 작품 가격은 수억원대로 치솟았다.
인기 비결은 한국 작가 특유의 에너지와 독창성에 있다. 전시장에 있는 강국진과 정강자, 정찬승의 퍼포먼스 ‘한강변의 타살’(1968)을 보면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있다. 그해 대한민국미술전람(국전)의 심사 비리 사건이 터지자 세 작가는 제2한강교(양화대교) 밑에 구덩이를 파고 스스로 묻히는 퍼포먼스를 벌인 뒤 기성세대를 고발하는 글을 썼다. 여성주의를 주제로 한 정강자의 설치작품 ‘키스미’(1967)는 지금 봐도 ‘힙하다’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다.
안휘경 구겐하임미술관 어소시에이트 큐레이터는 “이건용, 심문섭 등은 1973년 열린 파리비엔날레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등 50년 전에도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했다. 전시장에 나온 이건용의 ‘신체항 71-73’이 이때 출품된 작품이다. 흙으로 된 육면체 형태의 받침대에 나무를 뿌리째 심은 형태로 난개발로 인한 자연 훼손을 상징한다.
하종현과 서승원은 실험미술과 단색화가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지금 단색화 거장으로 분류되는 이 작가들은 한때 실험 미술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전시장에 나와 있는 하종현의 ‘도시 계획 백서’(1967), 서승원의 ‘동시성 67-1’이 그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실험미술의 전성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 정부의 검열이 계기였다. 1980년대 이후에도 단색화와 민중 미술에 밀려 비주류로 남았다. 퍼포먼스나 설치작품이 많은 데다 난해한 탓에 작품을 팔기도 어려웠다. 많은 작가들이 생활고에 시달렸고 정신 질환을 겪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은 한국 실험미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참여 작가 수가 29명, 작품 수는 95점에 달하는 데다 하나 같이 ‘사연 있는 작품’들이라 도록을 쭉 읽은 다음 전시를 감상하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연구논문과 당시 주요 비평글, 선언문 등이 국·영문으로 총망라돼 있다. 국문판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영문판은 구겐하임미술관이 편집을 맡았다.
전시 기간 중 실험미술을 대표하는 퍼포먼스인 김구림의 ‘생성에서 소멸로’(6월 14일), 성능경의 ‘신문읽기’(6월 21일), 이건용의 ‘달팽이 걸음’(6월 28일) 등 재현 작업이 순차적으로 열린다. 전시는 7월 16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1976년 3월 국내 미술 관련 단체는 일제히 이런 내용의 공문을 받았다. 청년 작가들의 ‘실험미술’이 사회 질서를 해치니 전시 기회를 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발신자는 국립현대미술관. 노골적인 문화 검열이자 탄압이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당시 실험미술가들의 활동은 신문 문화면에 나오는 예술이 아니라 사회면에 나오는 ‘사건 사고’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47년이 흐른 지난 26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란 제목의 대규모 전시를 열었다. 실험미술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이렇게 세월과 함께 날아갔다. 게다가 이번 전시 기획에는 세계 최고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미국 뉴욕의 솔로몬 R 구겐하임이 참여했다. 한국에서의 전시가 끝나면 구겐하임(9월~내년 1월)과 LA해머미술관(내년 2~5월)으로 무대를 옮긴다.
단색화 이은 ‘한국 미술 대표 브랜드’
백남준, 이우환 등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한국 작가는 여럿 있지만 해외에서 알아주는 한국의 ‘미술 사조’는 단색화 하나뿐이다. 윤형근, 박서보, 정상화 등이 이 사조에 속하는 거장들이다.실험미술은 단색화의 뒤를 이을 한국의 차세대 거포로 꼽힌다. 1960~1970년대 한국 미술을 이끌던 실험미술은 오랜 기간 침체기를 겪다가 몇 년 전부터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국내는 물론 해외 컬렉터들의 관심에 힘입어 이건용, 이강소, 이승택, 김구림 등의 작품 가격은 수억원대로 치솟았다.
인기 비결은 한국 작가 특유의 에너지와 독창성에 있다. 전시장에 있는 강국진과 정강자, 정찬승의 퍼포먼스 ‘한강변의 타살’(1968)을 보면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있다. 그해 대한민국미술전람(국전)의 심사 비리 사건이 터지자 세 작가는 제2한강교(양화대교) 밑에 구덩이를 파고 스스로 묻히는 퍼포먼스를 벌인 뒤 기성세대를 고발하는 글을 썼다. 여성주의를 주제로 한 정강자의 설치작품 ‘키스미’(1967)는 지금 봐도 ‘힙하다’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다.
안휘경 구겐하임미술관 어소시에이트 큐레이터는 “이건용, 심문섭 등은 1973년 열린 파리비엔날레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등 50년 전에도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했다. 전시장에 나온 이건용의 ‘신체항 71-73’이 이때 출품된 작품이다. 흙으로 된 육면체 형태의 받침대에 나무를 뿌리째 심은 형태로 난개발로 인한 자연 훼손을 상징한다.
수십 년 세월 넘어 세계로
실험미술은 한국 미술의 대표 브랜드인 단색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조수진 성신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1970년대 초반 실험미술 작가들의 해외 진출이 늘어났고, 이에 자극받은 추상화가들이 모노크롬 형식과 한국적 전통을 접목하기 시작하면서 단색화의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했다.하종현과 서승원은 실험미술과 단색화가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지금 단색화 거장으로 분류되는 이 작가들은 한때 실험 미술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전시장에 나와 있는 하종현의 ‘도시 계획 백서’(1967), 서승원의 ‘동시성 67-1’이 그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실험미술의 전성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 정부의 검열이 계기였다. 1980년대 이후에도 단색화와 민중 미술에 밀려 비주류로 남았다. 퍼포먼스나 설치작품이 많은 데다 난해한 탓에 작품을 팔기도 어려웠다. 많은 작가들이 생활고에 시달렸고 정신 질환을 겪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은 한국 실험미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참여 작가 수가 29명, 작품 수는 95점에 달하는 데다 하나 같이 ‘사연 있는 작품’들이라 도록을 쭉 읽은 다음 전시를 감상하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연구논문과 당시 주요 비평글, 선언문 등이 국·영문으로 총망라돼 있다. 국문판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영문판은 구겐하임미술관이 편집을 맡았다.
전시 기간 중 실험미술을 대표하는 퍼포먼스인 김구림의 ‘생성에서 소멸로’(6월 14일), 성능경의 ‘신문읽기’(6월 21일), 이건용의 ‘달팽이 걸음’(6월 28일) 등 재현 작업이 순차적으로 열린다. 전시는 7월 16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