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하는 지구의 가장 지독한 초상화 '슬픔의 삼각형'
▲영화 <슬픔의 삼각형> 메인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당신이라면 이런 현실 속에서 어떤 대안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계속 이어질 것이란 낭만적 긍정주의로 비극을 포장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있는 그대로 모든 진실을 까발리고 이것이 현실이라 폭로할 것인가? 그 어떤 대안을 내놓던, 지금의 인류는 과연 그 목소리를 귀담아들을까?

<슬픔의 삼각형>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만의 답변지다. 침몰해가는 현 사회 체재를 아주 통렬하고 유쾌하고 진지한 방식으로 비틀어대며 제시하는 감독의 질문과 답변들을 좀 더 들여다보자.

1부. 칼과 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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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쇼에서 워킹하는 야야


모델이자 인플루언서인 야야(찰비 딘 크릭)와 인지도 없는 모델 지망생 애인, 칼(해리스 딕킨슨)은 돈 문제로 뜻하지 않은 애정 싸움을 벌인다. 갈등의 시작은 식사비를 누가 내느냐 였고 이 문제는 결국 성평등 문제로까지 확대된다.

젠더 권력의 상위에 있다 여겨지는 백인 남성 칼은 돈이 없다. 반면, 백인 남성보다 하위에 놓인 백인 여성 야야는 돈이 있다. 과연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이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그들에게 돈은 권력 이양의 도구일까? 아니면 진정한 성평등을 이룰 수 있는 또 하나의 가치일까?

2부. 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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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즈에서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는 야야와 칼


야야와 칼의 관계에서 제기된 질문은 이들이 협찬받아 참여한 초호화 크루즈 여행에서 더욱 확대된다. 유럽, 미국, 러시아의 부호들이 한자리에 모인 크루즈 내부는 승객, 승객을 직접 접대하는 승무원과 승객의 눈에 보이지 않은 채 배 곳곳을 청소하고 수리하는 승무원으로 철저히 계급화되어 있다.

절대 전복될 수 없는 위계질서 속에서 러시아 비료 기업 회장인 드미트리(즐라트고 버릭)의 아내, 베라(수니 멜래스)는 자신과 승무원의 관계가 평등하다 주장하며 모든 승무원들이 일하지 말고 자신과 함께 수영을 즐길 것을 ‘명령’한다. 그녀의 명령은 과연 계급의 전복과 만민의 평등을 이뤄낼 수 있는 기회일까? 또는 계급의 전복은 결국 계급의 최상급에 위치한 자만이 이뤄낼 수 있는 특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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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치는 날 선상 파티를 주최하는 선장과 일등 항해사

크루즈 여행의 전통으로 이어지는 선장(우디 해럴슨) 주최의 만찬은 선장의 고집으로 파도가 심한 날 저녁으로 결정된다. 거침없이 몰아치는 파도로 인해 흔들리는 배 안에서 상류 사회의 격식과 허례허식으로 치장한 부호들은 모두 속이 뒤집히고 러시아 자본주의자인 드미트리와 미국 마르크스주의자인 선장은 서로 논쟁을 벌이다 배의 침몰을 선언한다. 그리고 바다가 잠잠해진 다음날 아침, 해적의 침입으로 배의 침몰은 현실이 된다.

크루즈가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상징하는 하나의 은유라면, 승객의 속을 뒤집고 승객과 승무원의 관계를 전복시키는 영화적 사건들은 그 체제에 대한 감독의 풍자적 은유다. 흥미롭게도 자본가들의 속을 뒤집어엎는 가능성은 인류의 문명으로부터 발현되지 않는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힘, 거침없이 몰아치는 파도만이 이 일을 수행해낸다.

3부.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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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생존한 사람들


자연의 힘은 재난 속에서 생존한 8인의 관계 전복 속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야생에서 선장의 권력은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에게 부여된다. 야생은 문명이 유지한 인종, 젠더, 자본의 권력을 무력화 시킨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 동물로서 인간이 갖는 욕구만이 그들의 관계를 재편시킨다. 이에 따라 크루즈에서 가장 하층 계급이었던 자가 선장의 권력을 쟁취하고, 온갖 부와 권력을 누리던 상층 계급의 사람들은 어떤 능력도 없이 밥만 축내는 자들로 전락한다.

그런데 이런 계급의 전복이 자본주의로부터 단 한 곳도 자유롭지 못한 지구 내에서 과연 가능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더 이상 자본주의 체재로부터 도망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지옥도 속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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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 오디션 전에 인터뷰를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칼

<슬픔의 삼각형>만을 봤을 때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현 지구적 상황을 지극히 비관적이고 참혹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사유하고 있다고 추측하게 된다. 기후위기가 해시태그로 상품화되고 젠더, 인종의 평등은 저급 상품의 가치로 폄하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대안적 미래를 꿈꾸고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이 탄식은 마치 아담 맥케이 감독이 <돈 룩 업> 엔딩을 통해 보여준 조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구의 몰락에서 도망치기 위해 다른 별로 향하는 로켓에 몸을 실은 전 세계의 부호들이 결국 낯선 행성의 낯선 생물체들의 먹이가 되는 것처럼 <슬픔의 삼각형> 또한 생존한 8명의 승객, 승무원, 해적은 예상치 못한 반전 속에서 또 다른 비극을 대면한다.

감독은 염세주의자? 또는 지독한 현실주의자?

몰락하는 지구의 가장 지독한 초상화 '슬픔의 삼각형'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


이쯤 되면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이 지독한 염세주의자처럼 느껴진다. 몰락하는 배에서 탈출할 방법이 절대 없을 거라는 호언장담을 듣고도 맘 편히 웃어젖힐 관객은 분명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감독이 촉발한 웃음이, 그가 제시한 아이러니한 상황이, 또 그가 펼쳐 보인 관계의 전복이 어쩌면 실제로 침몰하는 사회 체제 속에서 정신 차리지 못한 채 유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자각시키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이라고 상상해 본다면 어떨까? 감독이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했던 풍자의 이면이 지독한 비극적 현실을 발견하고 대면하게 만들려는 하나의 도구라고 분석해 본다면?
분명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우리에게 희망찬 미래와 속 시원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염세주의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이 현실이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한 번쯤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치열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 또한 지금의 현실을 답답해하고 있다면, 염세주의와 현실주의 사이 어딘가에서 침몰해가는 현 체제를 풍자하는 감독의 시선이 잠시라도 꽉 막힌 속을 시원하게 뚫어줄 것이다.

이동윤 ㅣ 영화 평론가

*본 칼럼은 CJ그룹 뉴스룸과 CJ CGV에서 제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