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지를 끼듯 손가락들을 서로 그러모아본다. 분산되어 있던 힘이 한데로 모여 맞붙은 손바닥이 오롯이 긴장되고 손등에 그 압력이 느껴진다. 손을 폈을때와 같은 손가락들인데 서로 붙어있으니 새로운 형태로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콜렉티브를 만드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떨어져 있어도 각자의 역할을 하고 각자의 이름이 있지만, 손을 둥글게 모아 합쳤을 때는 또 다른 에너지가 생긴다.
Sans angles Ni bords 둥글게 모이는 힘
<SANS ANGLES NI BORDS > 프로그램들이 진행되었던 Saint denis의 Pan Café

지난 4월 말 파리 외곽 생 드니( Saint denis)의 ‘Pan cafe’에선 그러한 에너지를 모은 프로그램들이 4일간 진행되었다. 파리-세르지 보자르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만든 ‘Union Quoi? international.e(Union What International?)’은 이름부터 무엇이 국제적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우리가 국제적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이 얼굴들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했다.

‘Sans angles Ni bords’(모서리도 없고 가장자리도 없는)라는 이름으로 원탁에 모인 이들은, 다양한 경계를 오가는 다중 정체성을 가진 개인들이 모여 어떻게 세상의 이분법적인 구분을 유연하게 만들며, 유럽의 백인중심, 식민지배 중심의 시스템을 해체할 것 인가에 대한 공통의 질문들을 가지고 다양한 예술 중심의 활동을 구성했다. 실은 이런 프로그램들을 구상하고 실현한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노동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조차도 함께 나눈다. 각자가 말하고 싶은 주제로 내용을 구성하고 진행하며 동시에 함께 목소리를 내는 사람으로서 참여한다.

그들은 오후부터 저녁까지 함께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보고 읽고 들으며, 함께 표현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프로그램은 케 브랑리 박물관(Musée du quai Branly) 의 여러 안내 책자에 적힌 수많은 문장들 중 우리가 동의할 수 없고 우리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단어나 문장들을 찾아 그것들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는 토론이었다.

케 브랑리 박물관에 대해 잠깐 설명을 하자면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그리고 아메리카의 문명과 예술이 전시되고 있어 파리에서 가장 이국적인 박물관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유럽과 프랑스를 제외한 나라들을 5대륙으로 분류해 그들 문화의 흔적이 담긴 130만여개의 ‘수집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또한 2020년 중국, 일본 전통의상을 소개하는 전시관에 한국을 중국 영토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며 이러한 표기에 대한 시정요구를 모두 거부해 논란이 된 박물관이기도 하다. 둘러 앉은 사람들은 저마다 Colonial expansion(식민지 확장), diversité(다양성), Trophée(트로피), Occidentaux(서양의), L’art africain(아프리카 예술) 등등 종이를 꽉 채울 정도로 많은 단어들을 찾아냈고, 그것에 대해서 왜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는지 단어를 둘러싼 역사나 사회 문제 등의 심층적인 이유를 분석하는 대화들이 이어졌다.
Sans angles Ni bords 둥글게 모이는 힘
브랑리 박물관의 안내 책자들에 적힌 불편한 표현을 찾는 참여자들

어쩌면 이러한 주제는 예술과 멀게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인종과 국경이라는 이슈는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활용되기도 하고, 우선 정치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것은 예술이 아닌 것일까? 무엇이 예술의 경계일까? 우리는 또한 이런 질문을 서로에게,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예술은 정체성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예술가가 스스로를 어느 경계선에 놓고 무엇을 보느냐가 작업의 주제를 만들고 스토리텔링을 끌어낸다.

작가의 작업은 결국 작가와 연결되어 있다. 작가를 둘러싼 환경, 사회에 영향을 받아 창조된다. 작업을 하는데 얼마나 걸릴지, 어떻게 표현될지 조차도 그렇다. 물론 예술은 그 자체로 우리를 즐겁게 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와닿는지도 감상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국경과 인종, 성지향성, 성정체성, 장애인과 비장애인 등등 다양하게 나눠진 세상에서 우리의 정체성 중 일부는 이미 정치적으로 분류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정체성’을 담고 있는 예술이 언제나 어렵고 딱딱하고 재미없는 것만은 아니다.
Sans angles Ni bords 둥글게 모이는 힘
전채린 감독의 <1959년의 김시스터즈 - 숙자, 애자, 민자 언니들에게>(2020) 이 상영중인 정원

3일째 되는 저녁의 프로그램은 이러한 주제들을 폭넓게 다룬 단편 영화 상영이었다. 여성실험영화 운동에 기여한 칙 스트랜드 감독의 ‘Angel blue sweet wings’(1966), 전채린 감독의 ‘1959년의 김시스터즈 - 숙자, 애자, 민자 언니들에게’(2020), 태국 영화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Mobile men’ 등 짧은 길이의 깊은 메세지를 담은 여러 작품들이 실외의 정원에서 큰 벽에 쏘아올려졌다.

예상외로 영상들의 분위기는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유쾌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춤추고, 편지 쓰며 소통하고, 트럭 뒤에 앉아 웃으며 서로를 화면에 담고, 어딘가에서 살아왔던 얘기를 하기도 하며 또 어느 공간에선가 살아가고 있었다. 동시에 우리는 밤늦도록 야외에서 저녁과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감상했다. 영상예술은 그 움직임이 망막에 크게 화면 맺히고 소리에 둘러싸여 마치 그 삶의 일부들을 함께 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화면 안의 각각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많은 사람들과 동시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 마치 연대의 감각처럼 느껴졌다. 화면을 둘러싸고 둥글게 모인 힘이 깍지처럼 단단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함께 모인 힘으로 세상에 대한 새로운 유연함을 만들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