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이 2023년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를 무대에 올립니다. 작곡가 베르디가 무수히 많은 자신의 오페라 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사랑하였다는 <일 트로바토레>는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와 함께 베르디 3대 오페라의 하나로 손꼽힙니다. 잔카를로 델 모나코의 연출로 레오나르도 시니가 지휘하는 이번 공연의 예습을 겸하여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알 트로바토레>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나눠보고자 합니다.
원수의 자식을 아들로 키운 집시 이야기를 아시나요

음유시인 만리코의 비극

이 오페라의 제목 <일 트로바토레>는 오페라의 남자 주인공인 만리코와 관계되는데, '트로바토레(trobatore)는 흔히 우리가 역사에서 트루바도르 또는 민네징어 등으로 배웠던 중세 시대의 음유시인을 뜻합니다. 중세의 음유시인들은 흔히 시인이라고 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달리 (이 오페라의 남자 주인공 만리코와 같이) 귀족을 위해 봉사하는 기사들이 그 역할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처럼 트로바토레는 비록 귀족은 아니지만 무술에 뛰어나 남성적 매력이 넘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시문학과 노래 등 예술에도 능한 상당히 쿨하고 멋진 캐릭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의 남자 주인공 만리코는 원래 아라곤의 백작의 두 아들 가운데 한 명이었으나 어릴 적에 집시 여인 아주체나(메조 소프라노)에게 납치를 당하여 그 아들로 성장하는데, 그 배경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아주체나의 어머니인 집시 노파가 어린 만리코를 골똘히 쳐다본 이후로 어린 만리코가 병을 얻자 그 부친 아라곤의 백작이 아주체나의 어머니를 마녀로 몰아 화형에 처하였는데, 집시 노파의 딸인 아주체나가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백작 가문에 복수를 하기 위해 몰래 어린 만리코를 납치합니다. 당시 아주체나는 자신의 엄마가 화형될 때 아라곤 백작의 납치한 아이를 같이 불에 집어 넣는다고 넣었는데, 알고 보니 어린 만리코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아이를 실수로 죽인 것이었습니다. 아주체나는 복수심에 치를 떨었지만 결국 어린 만리코를 자기 아들로 키우게 됩니다.
원수의 자식을 아들로 키운 집시 이야기를 아시나요
그런데 만리코가 매력적인 음유시인(트루바토레)으로 성장하면서 이 오페라의 여주인공 레오노라(소프라노)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데, 하필이면 위 백작의 또 다른 아들이자 만리코의 형인 백작 디 루나(바리톤, 이하 루나 백작)도 레오노라를 좋아하게 되어 서로 연적이 됩니다.

결국 루나 백작은 만리코를 체포하여 죽이려 하고 레오노라는 만리코를 살리기 위하여 루나 백작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곧 레오노라는 음독하여 자살하고 레오노라에게 속은 것을 안 루나 백작은 결국 만리코를 죽입니다. 이 때 집시 아주체나는 루나 백작이 죽인 만리코가 사실은 그의 친동생임을 알리며 화형당해 죽은 자신의 어머니의 복수가 이루어졌다고 외치는 장면과 함께 이 오페라는 막을 내립니다.

집시 아주체나의 오페라

이처럼 두 남녀 주인공들의 비참한 죽음으로 끝나는 이 오페라 중심에는 원수의 자식인 만리코를 아들로 키운 집시 아주체나가 있습니다. 자신이 키운 사랑하는 아들 만리코의 죽음이 어머니를 위한 복수의 성취가 되는 아주체나의 이 상황적 딜레마가 비극 <일 트로바토레>의 극적 긴장감의 핵심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실제로 베르디는 이 오페라에서 진짜 주인공은 집시 아주체나라고 하면서 만리코와 레오노라 등 두 남녀 주인공 이상으로 음악적으로 집시 아주체나를 아주 강렬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심지어 베르디는 이 오페라의 제목마저도 원래는 만리코가 아닌 아주체나와 관련이 있는 소재로 하려고 했다지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 공연을 볼 때 마다 아주체나 역을 맡은 메조 소프라노가 얼마나 역을 잘 소화하느냐에 따라 만족도에 있어서 크게 차이가 납니다. 이전에 런던 코벤트 가든의 로열 오페라에서 우연히 이 오페라를 감상할 기회가 있었는데, 비록 연출이나 다른 가수진들의 노래는 조금 아쉬웠지만 압도적인 아주체나로 인해 정말 만족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원수의 자식을 아들로 키운 집시 이야기를 아시나요
런던 코벤트 가든

Anita Rachvelishvili

베르디가 가장 사랑한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가 자신의 오페라 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아꼈다는 이 오페라는 베르디가 비슷한 시기에 작곡한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등과 함께 대중적 인기가 매우 많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마도 이는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긴박한 전개와 함께 주옥같은 노래들이 합창과 함께 지루할 틈이 없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는 카라얀의 EMI 스튜디오 녹음과 DG의 잘츠부르크 실황, 세라핀의 DG 음반, 주빈 메타의 RCA 음반, 쥴리니의 DG 음반 등 명 지휘자와 기라성 같은 가수들의 환상적인 캐스팅이 결합되어 만들어낸 다양한 명연들이 즐비한 작품입니다.
원수의 자식을 아들로 키운 집시 이야기를 아시나요
원수의 자식을 아들로 키운 집시 이야기를 아시나요
아래에서는 편의상 유튜브에 전곡이 트랙별로 다 올라와 있는 파파노 지휘의 음반을 기준으로 하여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위대한 오페라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아래에 표기된 번호는 파파노 음반의 트랙 번호에 따른 것이며, 이에 더하여 이 오페라의 유명한 일부 아리아의 경우 비교 감상을 위해 가끔씩 색다른 연주들도 같이 소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부

(1)


막이 오르면 루나 백작의 호위 대장인 페란도(베이스)가 루나 백작의 성문 앞에서 보초를 서는 군인들에게 졸지말고 경계하라(All'erta)고 지시합니다.

군인들은 자신들이 호위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루나 백작이 레오노라가 좋아하는 한 음유시인(트로바토레)에 대해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음을 말하며 호위 대장 페란도에게 루나 백작의 친 동생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릅니다. 이에 페란도는 자신이 아는 루나 백작과 그 동생에 대한 과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물론 페란도나 루나 백작은 아직 그 음유시인이 만리코인지도 모르고 더구나 만리코가 (돌아가신 선대 백작이 자신에게 꼭 찾으라고 명한) 어릴 때 행방불명이 된 자신의 친 동생이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지요.

(2)


'두 아이의 행복한 아버지가 살았다네(Di due figli vivea padre beato)'라고 하며 이 오페라의 배경이 되는 흥미로운 과거 이야기를 시작하는 페란도와 그에 반응하는 군인들의 합창이 절묘하게 조합된 이 초반 도입부부터 베르디의 천부적인 오페라 작곡 실력이 거침없이 발휘됩니다.

페란도가 아주체나의 어머니 집시 노파의 끔찍한 모습을 묘사하며 (위에서 설명 드렸던 ) 루나 백작의 선친과 아주체나의 어머니 집시 노파와의 악연에 대해 이야기 해주는 장면에 사용된 선율은 후일 피아티 첼로로 편곡을 한 이 작품의 유명 멜로디 가운데 하나입니다.

Piatti - Rimembranze Del Trovatore Di Verdi Allegretto


(3)


페란도는 선대 백작이 잿더미 속에 아이의 뼈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점쟁이들이 납치된 동생 만리코가 아직 살아 있다고 하자 그 아들 루나 백작에게 동생을 찾으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하면서 자신은 집시 노파의 딸 아주체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 보면 안다고 이야기합니다.

(4)


페란도의 무시무시한 이야기에 호위병들은 화형당한 집시의 원혼이 떠돌며 밤에 간혹 나타나 저주를 내리고 이를 사람이 겁에 질려 죽기도 한다고 반응하며 두려움에 떠는데, 곧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며 각기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5)


이후 장면은 바뀌어 레오노라의 정원입니다. 레오노라는 절친 이네스(Ines)에게 오래 전에 무술 경연에서 이긴 한 음유시인에 첫 눈에 반했던 자신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6)


이어서 레오노라는 '들어봐! 고요한 밤에 정적이 내리고(Ascolta! Tacea la notte placida)'를 부르면서 세월이 지나 만리코를 만나게 된 과정을 노래합니다. 이 노래에서 레오노라는 한 음유시인이 자신의 창가에서 루트를 연주하며 자신을 위해 세레나데를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듣는데, 그가 바로 자신이 오래 전에 첫 눈에 반했던 그 음유시인(만리코)이었다고 설명합니다.

(7)


레오노라의 이러한 사랑 노래를 듣던 이네스는 이 사랑은 예감이 좋지 않다며 말립니다.

(8)


하지만 레오노라는 '이 사랑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어(Di tale amor, dhe dirsi)'를 부르며 사랑을 위해 살 수 없다면 사랑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 아리따운 처녀의 첫 사랑의 설레임과 흥분으로 가득한 레오노라의 이 아름다운 노래는 아래와 같이 위의 (6)과 함께 둘을 따로 묶어서 단독으로도 소프라노의 무대에 올려지기도 합니다.

Netrebko


Creapin


Tacea la notte placida
침묵을 지켰어 고요한 밤이
e bella in ciel sereno,
그리고 (밤은) 아름다웠지 맑은 하늘에서,
la luna il viso argenteo
달은 그 은빛 얼굴을
mostrava lieto e pieno,
보여주었지 행복하고 꽉찬 모습을,
quando suonar per l’aere
그때 공중에 소리가 울려 퍼졌지
infino allor si muto,
그때까지 매우 고요했는데,
dolci s’udiro e flebili
달콤하고 연약하게 들렸고
gli accordi d’un liuto,
류트의 화음이 (들렸고),
e versi melanconici
멜랑콜리한 시를
un trovator cantò.
한 음유시인이 노래했어.
Versi di prece, ed umile
기도의 시, 그리고 겸손하게
qual d’uom che prega Iddio,
그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in quella ripeteasi
그 기도 안에 반복되고 있었어
un nome 一 il nome mio!
한 이름 一 나의 이름이!
Corsi al veron sollecita.
(나는) 발코니로 신속하게 뛰어갔어.
Egli era, egli era desso!
그가 있었어, 그 사람이었어!
Gioia provai che agli angeli
커다란 기쁨을 (나는) 느꼈고 천사들만이
solo è provar concesso!
단지 느낄 수 있는 (기쁨)!
Al core, al guardo estatico
나의 마음에, 나의 황홀한 두 눈에
la terra un ciel sembrò!
땅이 (마치) 하늘처럼 느껴졌어!
Di tale amor, che dirsi
그런 사랑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mai può dalla parola,
말로써,
d’amor, che intendo io sola,
그 사랑을, 나만이 이해하지,
il cor s’innebriò.
(나의) 마음은 도취되었어.
Il mio destino compiersi
나의 운명은 완성될
non può che a lui d’appresso.
수가 없어 그 사람과 가까운 곳이 아니라면.
S’io non vivro per esso,
만일 내가 그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면,
per esso morirò.
(차라리) 그를 위해 죽을꺼야.

- 가사 번역 출처 [포네클래식]

오페라 역사에서 레오노라의 이 아름다운 노래를 멋지게 부른 소프라노들은 일일이 거론하는 것이 번거로울 정도로 많고 위에서 소개 드린 여러 명반에 캐스팅된 디바들도 모두 발성적으로나 음악적 표현의 측면에서 완성도가 매우 높습니다.

다만, 어둡고 중후한 느낌이 드는 위의 디바들의 목소리의 톤은 아무래도 순진한 처녀 레오노라의 노래에는 좀 맞지 않는 면이 있다는 생각이 늘 있었는데, 자연스러움과 참신함이 공존하는 아래 케르메스(Simone Kermes)의 노래에서는 (진한 비브라토와 무거운 발성에 의한 전통적인 접근 방식과는 차별화되는) 매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나의 마음에, 나의 황홀한 두 눈에, 땅이 마치 하늘처럼 느껴졌어!(Al core, al guardo estatico la terra un ciel sembrò!)”라고 하며 내면에 솟아나는 응답된 사랑의 기쁨에 행복해 하는 한 처녀의 순수한 마음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케르메스가 딱 적격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습니다.

Simone Kermes


* 아래 음반에서 추출된 것으로 보이는 위 유튜브 음원은 이상하게도 19금 처리가 되어 있어 유튜브에서 들으시려면 로그인을 하셔서 성인 인증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만, 그 정도 불편을 감수하고 한 번쯤은 들어볼 충분한 가치가 있는 노래가 아닐까 싶습니다. 참고로, 케르메스는 쿠렌치스와 모차르트의 <레퀴엠>, <피가로의 결혼>, <코지판투테> 등에서 호흡을 맞춘 적이 있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입니다.
원수의 자식을 아들로 키운 집시 이야기를 아시나요
Luigi De Filippi - Fantasia su Il Trovatore Allegro-giusto 'Di tale amor'



(9)


레오노라의 노래가 끝나자 루나 백작이 레오노라의 거처에 나타납니다. 그는 레오노라를 향한 뜨거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의 방으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10)

그 때 저 멀리서 만리코가 류트를 연주하며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려옵니다. 만리코는 오로지 전투 중에도 레오노라를 생각하였고 레오노라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왕이나 음유시인보다도 더 위대한 것이라며 그녀를 위해 노래를 부릅니다. 말로만 듣는 연적 음유시인의 노래소리를 들은 루나 백작은 질투심과 분노에 사로잡혀 어쩔줄을 몰라하지요.

(11)


레오노라도 만리코의 노래소리를 들고 반가워 내려옵니다. 그런데 레오노라는 어둠에서 루나 백작을 만리코로 착각하고 그의 품에 안깁니다. 이 장면을 멀리서 본 만리코가 순간 오해를 하게 되지만, 레오노라는 곧 실수를 깨달고 만리코에게로 가서 안깁니다. 이런 상황이 전개되자 질투심에 이성을 잃은 백작은 자신이 연적에게 정체를 밝힐 것을 명하고, 그가 반군의 대장 만리코라는 것을 확인한 후 더욱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합니다.
원수의 자식을 아들로 키운 집시 이야기를 아시나요
(12)


레오노라는 루나 백작을 만류하며 그를 사랑할 수 없으니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가운데 질투심과 분노로 가득한 루나 백작과 그의 적인 만리코가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며 다투는 내용의 (레오노라, 루나 백작, 만리코의) 3중창이 불러진 다음 루나 백작과 만리코가 치열한 결투를 벌이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1부는 막을 내립니다.

2부 이야기는 이어지는 글에서 계속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