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불친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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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임선혜의 아리아 (2)
얼마 전 프랑스의 한 실내악 축제에 참가했을 때 일이다. ‘모차르트’를 주제로 한 듀오 리사이틀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에 이어 내가 1부에서는 모차르트의 가곡을, 2부에서는 그의 오페라 아리아들을 노래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가곡은 주로 독일어, 오페라 아리아는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으니 두 언어 모두 프랑스인들에게도 외국어였다. 하지만 큰 와인 저장고를 개조해 만든 이 공연장에는 번역 가사를 띄울 수 있는 장치가 없었다. 종이로 된 번역지를 돌린다 해도 어두운 객석에서 청중들이 공연 중 글씨를 읽기란 사실상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직접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내 프랑스어 실력이 신통치 않을 뿐더러 관객들 중에는 더러 외국인도 있어 나는 영어로 이야기했고, 그걸 피아니스트가 바로 불어로 통역했다. (영어는 물론, 독일에서 자라고 프랑스에서 거주하여 여러 언어에 능통한 음악가였다) 이 상황이 흥미로운지 관객들 중 더러는 아는 단어를 대며 통역을 거들었고, 이내 공연장엔 뜻하지 않았던 생기마저 돌았다. 관객은 결국 곡에 대한 설명을 두 번이나 들은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곧 노래와 연주가 시작되자 남다른 집중도와 반응을 보였다. 앞서 들은 이야기가 어떤 노래로 펼쳐질지 궁금해하는 호기심에 가득찬 눈빛들과, ‘이게 그 부분이구나’ 하며 호응하는, 마치 아는 노래를 듣고 있다는 듯한 안도와 행복함에 젖은 미소가 공연 중 피아니스트와 나에게도 좋은 피드백으로 돌아와 시너지를 냈다.
관객 중에는 페스티발을 후원한 기업의 직원들도 초청되어 앉아 있었다고 한다. 리셉션장에서 만난 한 기업 관계자는 자신을 포함해 그들 중 대다수는 클래식 공연 관람이 처음이었고 어쩌면 의무감에 왔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또 예상 밖으로 좋았다며 공연에 초대해주어 고맙다는 진심어린 인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다시 클래식 음악을 찾아듣게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클래식 음악을 ‘처음’ 듣는 이들에게 좋은 느낌을 안겨줄 수 있었다니 음악가로서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만약, 무슨 말인지도 어떤 뜻인지도 모른 채 공연을 두 시간 가까이 들었어도 같은 반응이 나올 수 있었을까? 서양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수백 년이 지나도록 사랑받으며 이어져오는 클래식 음악이지만, 그 본고장에서도 새로운 관객, 특히 젊은 관객에 대한 갈증은 지속되고 있는 고민이다. 시장과 예술 사이에서 확고히 예술 중심을 지향하는 것엔 변함이 없지만,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시대의 변화는 클래식 음악계에도 유연함을 요구하고 있다. 어느덧 소셜미디어가 공연 모객과 아티스트 홍보에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공연에 대한 소개를 직접 영상으로 찍어달라는 부탁을 해외에서도 자주 받는다. 휴대폰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도, 무대복이 아닌 평상복 차림을 보이는 것도 여간 낯설고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다. 재차 시도해도 영 어설프고 어색함이 묻어나지만, 이것이 공연이나 음반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모두 입을 모은다.
그리고 리사이틀일 경우 짧게라도 무대 위에서 곡 소개를 해달라고 부탁받는 경우도 늘었다. 가사 때문에 그럴 때도 있고, 생소한 고음악이 이유일 때도 있다. 처음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어떤 핵심을 어떻게 정리해 말해야 할지, 외국어 실력이 탄로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음악가가 입을 열어 몇 마디 말을 한 것이 관객들의 눈과 귀, 나아가서는 마음을 활짝 열게 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연주자와 관객 사이에 빠르게 내적 친밀감, 즉 라뽀 (또는 라포르 rapport) 가 형성된듯 말이다. 위대한 작품들에 기대었고 훌륭한 연주만이 최고의 길이라 믿었고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지만, 나의 말을 호의로 받아준 그들로부터 호의를 되돌려 받으니 나쁜 긴장은 없어지고 좋은 긴장으로 내내 설레었다. ‘이건 반칙인가, 친절함인가?’ 가끔 혼자 묻기도 한다.
물론 이런 ‘반칙 또는 친절함’이 늘 필요하거나 가능한 것도 아니다. 육성으로 소통이 가능한 중·소형 공연장과 달리 1000석이 넘는 큰 공연장이라면 마이크를 준비해야 하는 등 번거로움이 많고 음악의 흐름을 끊을 수도 있다. 무대 위에서 말하는 것을 아예 반대하거나 이에 부담을 갖는 연주자도 꽤 있는데, 이 역시 존중되어야 한다. 처음 클래식을 접하거나 이제 막 흥미를 붙인 이들과 달리 이미 많은 감상 경험과 지식을 쌓은 음악애호가들은 어쩌면 조용히 음악으로만 무대 위의 음악가를 만나고 싶어할 수도 있다. 결국은 공연 프로그램과 취지에 따라 유연하게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연주자 말고 음악평론가나 칼럼니스트의 전문적이며 흥미로운 해설이 미리 이루어지는 것, 소셜미디어에 젊은 감성으로 유익한 볼 거리와 읽을 거리를 제공하는 것, 성악 감상을 어렵고 거리감 느껴지게 하는 주범인 외국어 가사를 정성껏 잘(!) 번역해 무대 뒷면에 띄우는 것 등을 더 적극적으로 실행해도 좋겠다. 정성들여 진심으로 닿고자 하면 관객이 느낀다.
내 프랑스어 실력이 신통치 않을 뿐더러 관객들 중에는 더러 외국인도 있어 나는 영어로 이야기했고, 그걸 피아니스트가 바로 불어로 통역했다. (영어는 물론, 독일에서 자라고 프랑스에서 거주하여 여러 언어에 능통한 음악가였다) 이 상황이 흥미로운지 관객들 중 더러는 아는 단어를 대며 통역을 거들었고, 이내 공연장엔 뜻하지 않았던 생기마저 돌았다. 관객은 결국 곡에 대한 설명을 두 번이나 들은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곧 노래와 연주가 시작되자 남다른 집중도와 반응을 보였다. 앞서 들은 이야기가 어떤 노래로 펼쳐질지 궁금해하는 호기심에 가득찬 눈빛들과, ‘이게 그 부분이구나’ 하며 호응하는, 마치 아는 노래를 듣고 있다는 듯한 안도와 행복함에 젖은 미소가 공연 중 피아니스트와 나에게도 좋은 피드백으로 돌아와 시너지를 냈다.
관객 중에는 페스티발을 후원한 기업의 직원들도 초청되어 앉아 있었다고 한다. 리셉션장에서 만난 한 기업 관계자는 자신을 포함해 그들 중 대다수는 클래식 공연 관람이 처음이었고 어쩌면 의무감에 왔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또 예상 밖으로 좋았다며 공연에 초대해주어 고맙다는 진심어린 인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다시 클래식 음악을 찾아듣게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클래식 음악을 ‘처음’ 듣는 이들에게 좋은 느낌을 안겨줄 수 있었다니 음악가로서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만약, 무슨 말인지도 어떤 뜻인지도 모른 채 공연을 두 시간 가까이 들었어도 같은 반응이 나올 수 있었을까? 서양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수백 년이 지나도록 사랑받으며 이어져오는 클래식 음악이지만, 그 본고장에서도 새로운 관객, 특히 젊은 관객에 대한 갈증은 지속되고 있는 고민이다. 시장과 예술 사이에서 확고히 예술 중심을 지향하는 것엔 변함이 없지만,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시대의 변화는 클래식 음악계에도 유연함을 요구하고 있다. 어느덧 소셜미디어가 공연 모객과 아티스트 홍보에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공연에 대한 소개를 직접 영상으로 찍어달라는 부탁을 해외에서도 자주 받는다. 휴대폰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도, 무대복이 아닌 평상복 차림을 보이는 것도 여간 낯설고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다. 재차 시도해도 영 어설프고 어색함이 묻어나지만, 이것이 공연이나 음반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모두 입을 모은다.
그리고 리사이틀일 경우 짧게라도 무대 위에서 곡 소개를 해달라고 부탁받는 경우도 늘었다. 가사 때문에 그럴 때도 있고, 생소한 고음악이 이유일 때도 있다. 처음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어떤 핵심을 어떻게 정리해 말해야 할지, 외국어 실력이 탄로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음악가가 입을 열어 몇 마디 말을 한 것이 관객들의 눈과 귀, 나아가서는 마음을 활짝 열게 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연주자와 관객 사이에 빠르게 내적 친밀감, 즉 라뽀 (또는 라포르 rapport) 가 형성된듯 말이다. 위대한 작품들에 기대었고 훌륭한 연주만이 최고의 길이라 믿었고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지만, 나의 말을 호의로 받아준 그들로부터 호의를 되돌려 받으니 나쁜 긴장은 없어지고 좋은 긴장으로 내내 설레었다. ‘이건 반칙인가, 친절함인가?’ 가끔 혼자 묻기도 한다.
물론 이런 ‘반칙 또는 친절함’이 늘 필요하거나 가능한 것도 아니다. 육성으로 소통이 가능한 중·소형 공연장과 달리 1000석이 넘는 큰 공연장이라면 마이크를 준비해야 하는 등 번거로움이 많고 음악의 흐름을 끊을 수도 있다. 무대 위에서 말하는 것을 아예 반대하거나 이에 부담을 갖는 연주자도 꽤 있는데, 이 역시 존중되어야 한다. 처음 클래식을 접하거나 이제 막 흥미를 붙인 이들과 달리 이미 많은 감상 경험과 지식을 쌓은 음악애호가들은 어쩌면 조용히 음악으로만 무대 위의 음악가를 만나고 싶어할 수도 있다. 결국은 공연 프로그램과 취지에 따라 유연하게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연주자 말고 음악평론가나 칼럼니스트의 전문적이며 흥미로운 해설이 미리 이루어지는 것, 소셜미디어에 젊은 감성으로 유익한 볼 거리와 읽을 거리를 제공하는 것, 성악 감상을 어렵고 거리감 느껴지게 하는 주범인 외국어 가사를 정성껏 잘(!) 번역해 무대 뒷면에 띄우는 것 등을 더 적극적으로 실행해도 좋겠다. 정성들여 진심으로 닿고자 하면 관객이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