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국가들이 미국과 중국, 유럽연합(EU) 중심 국제질서에 맞서 지역·경제통합을 재추진하기로 했다. 남미 통합에는 인권 탄압으로 지탄받는 베네수엘라 정권과 나머지 국가의 관계 개선이 선결 과제로 남을 전망이다.

30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 등에 따르면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콜롬비아 등 남미 11개 국이 참여한 정상회담이 개최됐다. 2014년 이후 9년 만에 열린 남미 정상회담에 주요 12개 국 가운데 디나 볼루아르테 페루 대통령만 국내 사정으로 불참했다. 따돌림 받던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이날 회의에 참석하며 국제 외교무대에 복귀했다.

브라질 외교부에 따르면 이번 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은 보건, 기후변화, 국방, 범죄 퇴치, 인프라 및 에너지 등에서 협력 확대 방안을 논의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그동안 대화와 협력 메커니즘을 포기했고 이념이 우리를 분열시키고 통합을 방해하도록 내버려 뒀다"며 "어떤 나라도 당면한 위협에 홀로 맞설 수 없고 함께 행동해야만 극복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룰라 대통령은 남미국가연합(UNASUR·우나수르) 재건 필요성을 강조했다. ‘남미판 유럽연합'으로 불리는 우나수르는 2008년 룰라 2기 정부 당시 창설됐으나 유명무실한 상태다. 비공개 회의에서 각국 정상은 이념을 넘어선 통합 필요성에 대해 공감한 것으로 전해졌다.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은 현지 기자들과 만나 "커다란 잠재력을 지닌 중남미 국가들은 통일된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우리는 인류에게 닥친 위기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해결책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룰라 대통령은 "지역 외 통화에 대한 의존을 줄이려고 노력해야 한다"며 지역 공통 화폐 도입을 제안했다. 스페인어로 남쪽이라는 뜻의 '수르'(SUR)란 화폐 명칭까지 제시했다. 브라질은 지난 3월 중국과 무역에서 달러 대신 위안화와 헤알화를 쓰기로 합의하는 등 달러화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남미 통합은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부와 이웃 국가들의 갈등을 극복하는 게 관건이 될 전망이다.
마두로 대통령은 광범위한 인권 탄압과 경제정책 실패 등으로 자국민 수 백만명을 난민으로 만들어 이웃 국가들로부터 지탄받고 있다. 그럼에도 룰라 브라질 대통령은 미국 등 서방이 타국 내정에 간섭한다고 비판하며 "베네수엘라 정권이 반(反)민주주의적이란 것은 서방의 모략"이라며 "경제적 어려움은 미국의 가혹한 재제 때문"이라고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부를 두둔했다.

그러나 루이스 라카예 포우 우루과이 대통령은 "(룰라 대통령이)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저 얘깃거리로 표현하는 것에 놀랐다"며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려 해선 안 된다"고 경계했다.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 역시 회담장 밖으로 나와 “칠레에 5000여명의 베네수엘라 난민이 체류하고 있다”며 “(인권 문제는)심각한 현실이며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라고 성토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