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자는 숫자에서 멀어지면 끝"…'패션 거목' 김웅기의 철칙 [강경주의 IT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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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주의 IT카페] 87회
김웅기 글로벌세아 회장 단독 인터뷰(1/3)
글로벌세아 '4조 클럽' 가입 초읽기
술못하던 김 회장, 바이어 접대하려 술연습도
ODM 도입후 해외 생산기지 구축에 속도
손해 발생해도 납기 철저하게 지켜 신뢰 쌓아
김웅기 글로벌세아 회장 단독 인터뷰(1/3)
글로벌세아 '4조 클럽' 가입 초읽기
술못하던 김 회장, 바이어 접대하려 술연습도
ODM 도입후 해외 생산기지 구축에 속도
손해 발생해도 납기 철저하게 지켜 신뢰 쌓아
김웅기 글로벌세아 회장(사진)은 패션업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힌다. 1986년 서울 공덕동 좁은 사무실에서 직원 2명으로 시작해 37년 만에 연매출 4조원 규모의 대기업을 일궈서다. 김 회장은 최근 글로벌세아가 운영하는 서울 대치동 S2A갤러리에서 한국경제신문과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한국 최고 패션 기업을 일군 최고경영자(CEO)답게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깔끔하고 세련된 수트핏으로 기자를 맞이했다.
김 회장은 "하루 평균 생산량은 250만벌에 달하고 니트와 재킷은 연간 7억장 이상 만들어 전 세계에 수출한다"며 "주요 고객사는 미국 대형 유통사인 타겟(Target), 월마트(Walmart), 백화점업체 콜스(Kohl's), 유명 의류 브랜드 갭(Gap), 아웃도어 의류 업체 카하트(Carhartt)"라고 말했다. 글로벌세아의 지난해 매출은 3조9062억원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갈아치웠다. 영업이익은 1813억원을 기록했다. 김 회장의 꿈이 시작된 건 50여년 전이다. 중학생 시절 어머니가 밤새 돌리던 재봉틀 소리 듣는 것을 좋아했다. 재봉틀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그즈음이다. 그는 "원단이 워낙 귀하던 시절이라 새 원단은 꿈도 못꿨다"며 "보세품 중 치수가 큰 바지를 골라 실밥을 뜯어 몸에 맞게 재단하고 재봉했다"고 기억을 꺼냈다. 초보가 만든 것 치고는 모양이 제법 그럴 듯했다. 학창 시절 내내 자신이 직접 만든 바지를 입고 뛰어놀던 김 회장은 전남대 섬유공학과에 진학했다.
이후 1980년대 섬유 신생 기업이던 대봉산업을 거쳐 굴지의 섬유 기업이었던 충방에 입사했다. 1986년 세아교역을 창업하기 전 10년간의 직장생활은 경영의 기본기를 다지고 사업가로서 안목을 넓히는 한편 인재의 중요성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김 회장은 대봉산업과 충방에서 근무할 때 격무와 야근에 시달렸지만 의류업에 종사한다는 사실이 그저 좋았다. 그는 "샘플을 놓고 바이어나 공장 관계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는 과정은 배움 그 자체였다"며 "납기를 맞추려 작업자들과 함께 밤을 새우는 것도 배움이라 여겼다"고 밝혔다.
그렇게 김 회장은 1985년 사직서를 냈다. 하지만 당장 대책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서른여섯이라는 나이로 가정을 책임져야 했던 그는 덜컥 겁이 났다. 막막함을 지우려 광화문에서 터벅터벅 길을 걷기 시작해 충정로를 지나 공덕동으로 향했다. 그러다 어느 한 건물 앞에서 멈췄다. '사무실 임대' 글자가 김 회장의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그래, 이거야'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채웠다. '사무실'이라는 단어가 김 회장 마음 속에 숨어있던 기업가 DNA를 끄집어냈다. 김 회장은 "무작정 들어간 11평 남짓한 사무실 공간이 좁긴 했어도 채광이 좋았다"며 "다음날 곧바로 전 재산을 털어 마련한 500만원으로 계약을 체결했다"고 말했다.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두려움보다 벅찬 감정이 앞섰다. 생애 처음으로 갖게 된 사무실에 서서 김 회장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무용 집기도 장만했다. 철제 캐비닛 두 개, 책상 세 개, 3인용 소파까지 들여 사무실 구색을 갖췄다. 전화, 팩스 같은 통신기기도 설치했다. 영업을 위해 소형 승용차도 할부로 한 대 구입했다. 가장 시급한 건 직원 채용이었다. 김 회장은 무역회사에 다니던 막내동생에게 같이 일해보자고 설득했고 그도 흔쾌히 응했다. 그렇게 1986년 3월 6일 의류수출회사 '세아교역'이 탄생했다.
사업가로서 첫발을 내디뎠지만 회사 운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특히 물량을 따내는 게 쉽지 않았다. 김 회장은 "인맥을 총동원해 거래처 개척에 사활을 걸었다"며 "수주를 위해선 바이어 비위를 맞춰야 했는데 그중 하나가 술이었다"고 짚었다. 김 회장이 술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선척적으로 술을 못하는 체질이어서다. "갑(甲)의 위치에 있는 바이어 접대는 술집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사업을 하려면 술은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이었다"고 회상했다. 김 회장은 스스로 '술연습'을 매진했다. 새벽까지 영업하는 맥주집에 혼자 앉아 맥주 250cc를 주문해 한 모금씩 넘겼다. 가끔씩 아내가 대작을 해주며 '술훈련'을 도왔다. 김 회장은 "사람들이 나를 술을 좋아하고 센 사람으로 오해하지만 사실 술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다"고 털어놨다.
절박함이 통했을까. 세아교역은 1986년 창립 첫 해 46만 달러 매출을 기록했고 1988년 2년 만에 764만 달러로 17배 가까이 급증했다. 창립 10주년을 맞은 1996년 세아상역은 매출 규모 2363만 달러에 이르는 중견기업 반열에 올랐다. 창립 10년 만에 51배가 넘게 증가한 것이다.
김 회장이 직접 꼽은 성공 비결은 '신뢰' 구축이다. 선염과 후염의 색상 비교를 집요하게 하는 것은 물론 돌발 상황이 발생해 물건을 보낼 배를 못구하면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비행기를 띄워 납기를 철저하게 지킨다. 김 회장은 "세아가 바이어들 거래를 단절한 적은 있어도 바이어 쪽에서 세아와 거래를 단절하겠다는 통보를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단언했다.
▶김웅기 글로벌세아 회장 인터뷰 2편이 이어집니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
어머니 재봉틀 소리 들으며 잠자던 소년, 세아교역 창업하다
김 회장은 인터뷰 초반 다소 긴장한 모습을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패션 거목(巨木)'다운 면모를 드러냈다. 그는 "경영자는 숫자에서 멀어지면 끝"이라며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매출과 영업이익, 원가, 마진율 등 숫자를 더 꼼꼼히 챙겨야한다"고 강조했다. 글로벌세아의 모태인 세아상역은 의류 제조 수출 기업으로 첫발을 내디딘 후 세계 최대 규모의 의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제조업자개별생산(ODM)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김 회장은 "하루 평균 생산량은 250만벌에 달하고 니트와 재킷은 연간 7억장 이상 만들어 전 세계에 수출한다"며 "주요 고객사는 미국 대형 유통사인 타겟(Target), 월마트(Walmart), 백화점업체 콜스(Kohl's), 유명 의류 브랜드 갭(Gap), 아웃도어 의류 업체 카하트(Carhartt)"라고 말했다. 글로벌세아의 지난해 매출은 3조9062억원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갈아치웠다. 영업이익은 1813억원을 기록했다. 김 회장의 꿈이 시작된 건 50여년 전이다. 중학생 시절 어머니가 밤새 돌리던 재봉틀 소리 듣는 것을 좋아했다. 재봉틀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그즈음이다. 그는 "원단이 워낙 귀하던 시절이라 새 원단은 꿈도 못꿨다"며 "보세품 중 치수가 큰 바지를 골라 실밥을 뜯어 몸에 맞게 재단하고 재봉했다"고 기억을 꺼냈다. 초보가 만든 것 치고는 모양이 제법 그럴 듯했다. 학창 시절 내내 자신이 직접 만든 바지를 입고 뛰어놀던 김 회장은 전남대 섬유공학과에 진학했다.
이후 1980년대 섬유 신생 기업이던 대봉산업을 거쳐 굴지의 섬유 기업이었던 충방에 입사했다. 1986년 세아교역을 창업하기 전 10년간의 직장생활은 경영의 기본기를 다지고 사업가로서 안목을 넓히는 한편 인재의 중요성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김 회장은 대봉산업과 충방에서 근무할 때 격무와 야근에 시달렸지만 의류업에 종사한다는 사실이 그저 좋았다. 그는 "샘플을 놓고 바이어나 공장 관계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는 과정은 배움 그 자체였다"며 "납기를 맞추려 작업자들과 함께 밤을 새우는 것도 배움이라 여겼다"고 밝혔다.
"여보 조금만 더 고생합시다."
하지만 그에겐 직접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평생 직장인으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의류업에 종사한다는 만족감과 내 사업이 아니라는 아쉬움이 교차하는 날들이 계속됐다. 일을 하면 할수록 창업에 대한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책임져야 할 가족들도 있었다. 어느 날 김 회장은 아내에게 조심스레 사업 이야기를 꺼냈다. 의중이라도 떠보려던 심산이었다. 아내는 망설임없이 남편의 뜻을 존중했다. 가정 경제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지만 흔쾌히 동의해준 아내가 한없이 고마웠다. 김 회장은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여보, 조금만 더 고생합시다."그렇게 김 회장은 1985년 사직서를 냈다. 하지만 당장 대책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서른여섯이라는 나이로 가정을 책임져야 했던 그는 덜컥 겁이 났다. 막막함을 지우려 광화문에서 터벅터벅 길을 걷기 시작해 충정로를 지나 공덕동으로 향했다. 그러다 어느 한 건물 앞에서 멈췄다. '사무실 임대' 글자가 김 회장의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그래, 이거야'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채웠다. '사무실'이라는 단어가 김 회장 마음 속에 숨어있던 기업가 DNA를 끄집어냈다. 김 회장은 "무작정 들어간 11평 남짓한 사무실 공간이 좁긴 했어도 채광이 좋았다"며 "다음날 곧바로 전 재산을 털어 마련한 500만원으로 계약을 체결했다"고 말했다.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두려움보다 벅찬 감정이 앞섰다. 생애 처음으로 갖게 된 사무실에 서서 김 회장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무용 집기도 장만했다. 철제 캐비닛 두 개, 책상 세 개, 3인용 소파까지 들여 사무실 구색을 갖췄다. 전화, 팩스 같은 통신기기도 설치했다. 영업을 위해 소형 승용차도 할부로 한 대 구입했다. 가장 시급한 건 직원 채용이었다. 김 회장은 무역회사에 다니던 막내동생에게 같이 일해보자고 설득했고 그도 흔쾌히 응했다. 그렇게 1986년 3월 6일 의류수출회사 '세아교역'이 탄생했다.
사업가로서 첫발을 내디뎠지만 회사 운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특히 물량을 따내는 게 쉽지 않았다. 김 회장은 "인맥을 총동원해 거래처 개척에 사활을 걸었다"며 "수주를 위해선 바이어 비위를 맞춰야 했는데 그중 하나가 술이었다"고 짚었다. 김 회장이 술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선척적으로 술을 못하는 체질이어서다. "갑(甲)의 위치에 있는 바이어 접대는 술집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사업을 하려면 술은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이었다"고 회상했다. 김 회장은 스스로 '술연습'을 매진했다. 새벽까지 영업하는 맥주집에 혼자 앉아 맥주 250cc를 주문해 한 모금씩 넘겼다. 가끔씩 아내가 대작을 해주며 '술훈련'을 도왔다. 김 회장은 "사람들이 나를 술을 좋아하고 센 사람으로 오해하지만 사실 술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다"고 털어놨다.
절박함이 통했을까. 세아교역은 1986년 창립 첫 해 46만 달러 매출을 기록했고 1988년 2년 만에 764만 달러로 17배 가까이 급증했다. 창립 10주년을 맞은 1996년 세아상역은 매출 규모 2363만 달러에 이르는 중견기업 반열에 올랐다. 창립 10년 만에 51배가 넘게 증가한 것이다.
ODM 도입 승부수 '적중'
세아상역의 폭풍 성장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과거 국내 의류 시장에서는 OEM 방식이 주류였지만 김 회장은 ODM 방식을 도입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ODM 방식은 자체 개발한 디자인을 고객사에 역제안하는 만큼 디자인한 의류의 지식재산권, 독점생산권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ODM으로 자신감을 얻은 그는 국내 생산에 머무르지 않았다. 1995년 사이판을 시작으로 해외 생산기지 구축에 속도를 냈다. 동남아시아, 중남미 등 세계 곳곳에 생산기지를 확보해 원사, 원단, 봉제 등의 수직계열화를 진행했다. 인도네시아에 위치한 원단 생산 회사 윈텍스타일, 코스타리카 원사기업 세아스피닝 설립이 대표적이다. 고품질 의류를 경쟁력 있는 가격에 선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김 회장이 직접 꼽은 성공 비결은 '신뢰' 구축이다. 선염과 후염의 색상 비교를 집요하게 하는 것은 물론 돌발 상황이 발생해 물건을 보낼 배를 못구하면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비행기를 띄워 납기를 철저하게 지킨다. 김 회장은 "세아가 바이어들 거래를 단절한 적은 있어도 바이어 쪽에서 세아와 거래를 단절하겠다는 통보를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단언했다.
▶김웅기 글로벌세아 회장 인터뷰 2편이 이어집니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