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은 왜 '문학계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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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구은서의 이유 있는 고전
토마스 만의 <마의 산>
토마스 만의 <마의 산>
봄날의 캠퍼스. 청춘의 설렘이 꽃가루처럼 날아다닙니다. 한 남학생은 교양수업에서 마주친 신입생에게 한 눈에 반해버립니다. 그런데 인사 한 마디 못해봤어요. 그녀에게 다가갈 기회만 노립니다.
남학생은 그녀가 들고 있던 책의 제목을 기억해뒀다가 따라 읽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독서의 진도가 영 안 나간다는 거죠. '이걸 빨리 읽어야 말이라도 한 번 걸어볼 텐데….' 두 권짜리 책은 약 1500쪽에 달하고요. 책만 읽던 남자는 결국 신입생과 친해지는 데 실패합니다. 엉뚱하게 문학의 매력에 빠져 훗날 출판사 편집자가 됩니다. 몇 해 전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네이버 웹툰 '유미의 세포들' 속 한 장면입니다. 문제의 책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의 장편소설 <마의 산>. 웹툰에 언급된 것처럼 내용뿐 아니라 분량이 독자를 압도하는 강렬한 고전이죠.
원제는 'Der Zauberberg'. '마법의 산'이라는 뜻이지만, 독일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만연체 문장과 난해한 내용 탓에 '악마의 산'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읽히는 책이에요. 작가들도 아끼는 고전이고요.
얼마 전 2023년 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을 수상한 불가리아 소설가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는 수상작 <타임 셸터>에 영감을 준 작품 중 하나로 <마의 산>을 꼽았습니다. 고스포디노프는 "만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며 "문학계의 아인슈타인과 같다"까지 했어요. 일본 대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주인공 와타나베가 읽는 책이기도 합니다.
1924년 세상에 나온 작품은 내년이면 출간 100주년을 맞습니다. 올해가 아직 6개월여 남은 지금, 여름의 더위가 슬슬 다가오는 이 때, 함께 스위스 고산지대가 배경인 <마의 산>에 올라볼까요. 소설은 한여름 23살 독일 청년 한스 카스토르프가 스위스 다보스로 여행을 떠나면서 시작돼요. 매년 초 세계적 기업인과 경제학자, 정치인들이 모여 국제 현안을 논하는 '다보스 포럼(세계경제포럼)'이 열리는 그 다보스, 맞습니다.
카스토르프가 다보스로 가는 건 사촌 요아힘 침센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폐결핵에 걸린 침센이 다보스의 국제 요양원 '베르크호프'에 머물고 있거든요.
고생스러운 여정 끝에 다보스에 도착한 카스토르프는 폐결핵 증세를 보여 침센과 함께 요양생활을 하게 됩니다. 3주로 예정했던 여행은 7년간의 요양이 돼버려요. 하지만 그가 떠나지 못한 건 실은 다른 이유죠. 카스토르프는 요양원에서 만난 쇼샤 부인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거든요.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시간뿐이 아닙니다. 머무는 공간이 달라지면 삶을 바라보는 태도도 변하죠. 소설은 말합니다. "공간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망각을 낳는다. 공간은 인간을 여러 관계로부터 해방시키며, 인간을 원래 그대로의 자유로운 상태로 옮겨 놓는 힘을 지니고 있다."
요하임은 요양원에 막 도착한 카스토르프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해요. "여기서는 자신의 개념이 바뀌게 돼."
카스토르프는 요양원에서 자꾸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건장한 20대 청년이 삶과 죽음을 고민하기는 쉽지 않지만, 요양원은 죽음이 공기처럼 떠다니는 곳이니까요. 당장 카스토르프가 머물게 된 방도 며칠 전 어느 미국 여자가 죽어 떠났기에 비어 있었고요.
요양원은 카스토르프가 마음 속에 묻어뒀던 죽음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냅니다. 그는 다섯 살과 일곱 살이 되던 해에 2년 간격을 두고 부모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키워준 할아버지의 죽음도 겪죠.
소설은 죽음과 삶, 사랑의 관계를 끊임없이 탐구합니다. "아! 사랑이란…… 육체, 사랑, 죽음, 이 셋은 원래 하나야. 육체는 병과 쾌락이고, 육체야말로 죽음을 낳기 때문이지." 이렇듯 죽음이 사랑만큼 고귀하다고 말하던 카스트로프는 스키를 타다 눈 속에 조난되는 경험을 한 뒤에 태도를 바꿉니다.
"사랑은 죽음에 대립하고 있으며,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죽음보다 강한 것이다.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선한 생각을 갖게 한다. (…) 인간은 착한 마음씨와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각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죽음의 공포를 알게 된 인간은 사랑을 노래합니다. 육체가 사라졌을 때 우리를 증언하는 건 오직 우리가 사랑한, 우리를 사랑한 사람들뿐일 테니까요.
현실과 동떨어진 죽음의 공간에서 거꾸로 삶의 중요성을 깨닫는 이 소설은 일종의 성장 소설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마냥 생과 사랑을 긍정하면서, 오직 그것만이 답인양 굴지는 않아요. 이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카스트로프가 산에서 내려와 참전하는 걸로 끝을 맺습니다. 착검한 총을 든 채 포화 속을 걷는 카스트로프는 노래를 흥얼거려요. "가지에 새겨 놓았노라, 수많은 사랑의 말을-"
죽음의 공간으로 여겨지는 산 위 요양원에서 내려와서 향한 곳이 죽음이 도처에 널린 전쟁터라는 건 아이러니죠. 소설은 이런 아이러니를 반복하며 인간에게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자꾸 고민하게 만듭니다.
<마의 산>은 소설이지만 철학서 같습니다. 8월 초에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고산지대. 카스토르프는 요양원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인간에 대해 사유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감정, 영혼과 육체, 기억, 시간, 문학, 사랑, 고통…. 계몽주의자 세템브리니, 중세적 세계관을 지닌 나프타, 삶의 역동성을 긍정하는 페퍼코른 등 여러 사람들간 논쟁도 벌어지죠. 이들의 주장에는 쇼펜하우어, 프로이트, 니체 등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어요.
"측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시간이 균등하게 흘러가야 해. 시간이 균등하게 흘러간다고 대체 어디에 쓰여 있단 말이야? 우리의 의식으로는 그렇지 않아. 그렇다고 가정하는 것은 단지 질서 때문이지. 우리의 시간 단위는 단지 약속에 불과한 거야." 카스토르프의 이런 말들은 만이 '문학계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리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마의 산>은 만이 12년에 걸쳐 완성한 걸작입니다. 그는 이후 나치정권에 공개적으로 맞섰고 망명길에 올라야했죠. 1933년 나치 지지자들은 베벨 광장에 모여 '반(反)독일적 사상'을 담은 책을 도서관에서 끌어내 화형식을 치릅니다. 만의 책들도 한 줌의 재로 변했죠.
그러나 당시에도 만의 소설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마의 산>은 끝내 살아남아 오늘날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과 죽음, 사랑에 대한 사유를 이어가게 만듭니다.
죽음이라는 화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유한한 인간은 어떻게 생을 긍정할 수 있을까요. 소설 마지막 문장을 통해 만은 묻습니다.
"온 세상을 뒤덮는 죽음의 축제에서도, 사방에서 비 내리는 저녁 하늘을 불태우는 열병과도 같은 사악한 불길 속에서도, 언젠가 사랑이 샘솟는 날이 올 것인가?"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남학생은 그녀가 들고 있던 책의 제목을 기억해뒀다가 따라 읽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독서의 진도가 영 안 나간다는 거죠. '이걸 빨리 읽어야 말이라도 한 번 걸어볼 텐데….' 두 권짜리 책은 약 1500쪽에 달하고요. 책만 읽던 남자는 결국 신입생과 친해지는 데 실패합니다. 엉뚱하게 문학의 매력에 빠져 훗날 출판사 편집자가 됩니다. 몇 해 전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네이버 웹툰 '유미의 세포들' 속 한 장면입니다. 문제의 책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의 장편소설 <마의 산>. 웹툰에 언급된 것처럼 내용뿐 아니라 분량이 독자를 압도하는 강렬한 고전이죠.
원제는 'Der Zauberberg'. '마법의 산'이라는 뜻이지만, 독일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만연체 문장과 난해한 내용 탓에 '악마의 산'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읽히는 책이에요. 작가들도 아끼는 고전이고요.
얼마 전 2023년 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을 수상한 불가리아 소설가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는 수상작 <타임 셸터>에 영감을 준 작품 중 하나로 <마의 산>을 꼽았습니다. 고스포디노프는 "만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며 "문학계의 아인슈타인과 같다"까지 했어요. 일본 대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주인공 와타나베가 읽는 책이기도 합니다.
1924년 세상에 나온 작품은 내년이면 출간 100주년을 맞습니다. 올해가 아직 6개월여 남은 지금, 여름의 더위가 슬슬 다가오는 이 때, 함께 스위스 고산지대가 배경인 <마의 산>에 올라볼까요. 소설은 한여름 23살 독일 청년 한스 카스토르프가 스위스 다보스로 여행을 떠나면서 시작돼요. 매년 초 세계적 기업인과 경제학자, 정치인들이 모여 국제 현안을 논하는 '다보스 포럼(세계경제포럼)'이 열리는 그 다보스, 맞습니다.
카스토르프가 다보스로 가는 건 사촌 요아힘 침센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폐결핵에 걸린 침센이 다보스의 국제 요양원 '베르크호프'에 머물고 있거든요.
고생스러운 여정 끝에 다보스에 도착한 카스토르프는 폐결핵 증세를 보여 침센과 함께 요양생활을 하게 됩니다. 3주로 예정했던 여행은 7년간의 요양이 돼버려요. 하지만 그가 떠나지 못한 건 실은 다른 이유죠. 카스토르프는 요양원에서 만난 쇼샤 부인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거든요.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시간뿐이 아닙니다. 머무는 공간이 달라지면 삶을 바라보는 태도도 변하죠. 소설은 말합니다. "공간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망각을 낳는다. 공간은 인간을 여러 관계로부터 해방시키며, 인간을 원래 그대로의 자유로운 상태로 옮겨 놓는 힘을 지니고 있다."
요하임은 요양원에 막 도착한 카스토르프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해요. "여기서는 자신의 개념이 바뀌게 돼."
카스토르프는 요양원에서 자꾸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건장한 20대 청년이 삶과 죽음을 고민하기는 쉽지 않지만, 요양원은 죽음이 공기처럼 떠다니는 곳이니까요. 당장 카스토르프가 머물게 된 방도 며칠 전 어느 미국 여자가 죽어 떠났기에 비어 있었고요.
요양원은 카스토르프가 마음 속에 묻어뒀던 죽음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냅니다. 그는 다섯 살과 일곱 살이 되던 해에 2년 간격을 두고 부모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키워준 할아버지의 죽음도 겪죠.
소설은 죽음과 삶, 사랑의 관계를 끊임없이 탐구합니다. "아! 사랑이란…… 육체, 사랑, 죽음, 이 셋은 원래 하나야. 육체는 병과 쾌락이고, 육체야말로 죽음을 낳기 때문이지." 이렇듯 죽음이 사랑만큼 고귀하다고 말하던 카스트로프는 스키를 타다 눈 속에 조난되는 경험을 한 뒤에 태도를 바꿉니다.
"사랑은 죽음에 대립하고 있으며,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죽음보다 강한 것이다.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선한 생각을 갖게 한다. (…) 인간은 착한 마음씨와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각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죽음의 공포를 알게 된 인간은 사랑을 노래합니다. 육체가 사라졌을 때 우리를 증언하는 건 오직 우리가 사랑한, 우리를 사랑한 사람들뿐일 테니까요.
현실과 동떨어진 죽음의 공간에서 거꾸로 삶의 중요성을 깨닫는 이 소설은 일종의 성장 소설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마냥 생과 사랑을 긍정하면서, 오직 그것만이 답인양 굴지는 않아요. 이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카스트로프가 산에서 내려와 참전하는 걸로 끝을 맺습니다. 착검한 총을 든 채 포화 속을 걷는 카스트로프는 노래를 흥얼거려요. "가지에 새겨 놓았노라, 수많은 사랑의 말을-"
죽음의 공간으로 여겨지는 산 위 요양원에서 내려와서 향한 곳이 죽음이 도처에 널린 전쟁터라는 건 아이러니죠. 소설은 이런 아이러니를 반복하며 인간에게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자꾸 고민하게 만듭니다.
<마의 산>은 소설이지만 철학서 같습니다. 8월 초에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고산지대. 카스토르프는 요양원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인간에 대해 사유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감정, 영혼과 육체, 기억, 시간, 문학, 사랑, 고통…. 계몽주의자 세템브리니, 중세적 세계관을 지닌 나프타, 삶의 역동성을 긍정하는 페퍼코른 등 여러 사람들간 논쟁도 벌어지죠. 이들의 주장에는 쇼펜하우어, 프로이트, 니체 등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어요.
"측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시간이 균등하게 흘러가야 해. 시간이 균등하게 흘러간다고 대체 어디에 쓰여 있단 말이야? 우리의 의식으로는 그렇지 않아. 그렇다고 가정하는 것은 단지 질서 때문이지. 우리의 시간 단위는 단지 약속에 불과한 거야." 카스토르프의 이런 말들은 만이 '문학계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리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마의 산>은 만이 12년에 걸쳐 완성한 걸작입니다. 그는 이후 나치정권에 공개적으로 맞섰고 망명길에 올라야했죠. 1933년 나치 지지자들은 베벨 광장에 모여 '반(反)독일적 사상'을 담은 책을 도서관에서 끌어내 화형식을 치릅니다. 만의 책들도 한 줌의 재로 변했죠.
그러나 당시에도 만의 소설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마의 산>은 끝내 살아남아 오늘날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과 죽음, 사랑에 대한 사유를 이어가게 만듭니다.
죽음이라는 화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유한한 인간은 어떻게 생을 긍정할 수 있을까요. 소설 마지막 문장을 통해 만은 묻습니다.
"온 세상을 뒤덮는 죽음의 축제에서도, 사방에서 비 내리는 저녁 하늘을 불태우는 열병과도 같은 사악한 불길 속에서도, 언젠가 사랑이 샘솟는 날이 올 것인가?"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