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옛날엔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줏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 냄새 나는 비가 내렸다.


* 백석(1912~1996)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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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이 짝사랑했던 통영 처녀 [고두현의 아침 시편]
18세 이화여고생에게 홀딱 반해

백석의 고향은 평안도 정주입니다. 그런데 남쪽 항구 통영을 제목으로 한 시를 3편이나 썼습니다. 그 배경엔 짝사랑하던 여인 ‘난(蘭)’이 있습니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조선일보의 <여성>지에서 편집일을 하던 백석은 1935년 친구 허준의 결혼식에서 이화여고생 박경련을 만났지요. 스물네 살 청년 시인은 통영 출신의 열여덟 살 처녀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습니다.

조선일보에 함께 근무하는 친구 신현중이 그녀를 소개했다는 설과 신현중을 따라온 그녀를 우연히 만났다는 설이 있지만, 어쨌든 그날부터 백석의 마음은 늘 그녀의 잔상으로 어룽거렸지요.

그해 6월 그는 신현중과 함께 그녀의 고향 통영으로 향했습니다. 그때 쓴 시가 ‘통영’ 첫 번째인데, 이 시에서 ‘저문 유월’이라 했으니 아마도 비가 내리는 초여름 저녁이었겠죠? 그러나 그는 마음속의 ‘천희’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듬해인 1936년 1월 또 그곳을 찾아가면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두 번째 ‘통영’ 시를 썼습니다.

‘구마산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내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장은 갓 같기도 하다// (중략)//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 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중략)// 영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통영-남행시초’ 부분, 조선일보 1936년 1월 23일자)

이 작품은 지금 통영시 명정동 396번지에 있는 그녀의 옛집 맞은편에 시비로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녀를 만날 수 없었죠. 겨울방학이어서 집에 있으리라 여겼지만 안타깝게도 개학 준비차 서울로 떠난 뒤였습니다.

그렇게 쓸쓸한 마음을 부둥켜안고 그는 경성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엇갈린 길 때문이었을까요. 이후 또 한 번의 통영행에서도 결국 그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경성 생활을 정리하고 함흥으로 간 백석은 다음 해 뜻밖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친구 신현중과 박경련이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말 못 할 회한이 ‘내가 생각하는 것은’이라는 시에 녹아 있습니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 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결혼식 뒤풀이에서 한 번 본 처녀에게 반해 몇 번이나 고향 집을 찾고도 그 사랑을 친구에게 뺏긴 시인의 슬픈 순애보가 아릿하게 전해져 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