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점 하나에 담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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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상화의 대가' 김환기의 모든 것
주요작으로 보는 김환기의 삶과 작품,
리움미술관 전시 큐레이터 인터뷰
주요작으로 보는 김환기의 삶과 작품,
리움미술관 전시 큐레이터 인터뷰
김환기 作 하늘과 땅 24-Ⅸ-73 #320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그 점을 찍는 일을 하고 있다. 오만 가지, 죽어간 사람, 살아있는 사람, 흐르는 강, 내가 오르던 산, 돌, 풀포기, 꽃잎…. 실로 오만 가지를 생각하며 내일을 알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하며 점을 찍어간다.”(<김환기 뉴욕일기> 中)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면으로 이뤄져 있다. 면은 선이 모여 만들어지고, 선은 점이 모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점은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다. 그래서 김환기(1913~1974)는 세상의 모든 것을 점에 담아 점화(點畵)를 그렸다.
그렇다면 김환기가 살고 느낀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답하기 쉽지 않다. 한국 근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추상미술의 선구자, 국내 현대미술 경매 최고가 10점 중 9점을 차지할 정도로 ‘비싼 작가’….
우리가 아는 김환기는 대개 여기까지다. 그럴 만도 하다. 그의 작품세계와 삶을 총체적으로 조망할 전시는 없다시피 했고, 화집에 수록된 수많은 작품을 실제로 볼 기회조차 드물었다. 작품이 워낙 비싼 데다 흩어져 있어 대여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대규모 회고전 ‘한 점 하늘’은 그래서 김환기의 삶과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알 수 있는 다시 없을 기회다. 그의 시대별 대표작을 비롯해 평소 보기 어려운 초기작과 미공개작 등이 117점이나 나왔다.
한국적 전통과 추상을 접목하기 시작한 20대의 새파란 청년. 피란생활 중 허리를 펼 수 없는 다락방에서도 “그저 그릴 수밖에 없다”며 붓을 들던 30대 가장. 교수직을 내팽개치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한국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 분투하던 40대의 ‘무명 동양인 작가’.
미국 뉴욕에서 점화라는 새로운 길을 찾은 뒤 “마침내 자신을 발견했다”고 환호하던 50대의 ‘국가대표 작가’. “꿈은 무한한데 세월은 모자라다”며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 점을 찍던 61세의 김환기가 모두 여기에 있다.
하늘에 별 수놓듯 매일 그렸다…전쟁도 병마도 아랑곳없이
김환기는 평생 그림 앞에 성실했다. 사정이 허락하면 매일매일 그렸다. “붓을 들면 야속하기만 한 세상일이 머리에 떠오르나 그러나 내가 붓을 듦으로 해서 이런 야속한 것들을 이겨갈 수가 있다”(파리에서 보낸 편지), “난 계속 몸이 괴롭지만 일만은 늘 하고 있다. 일을 함으로써 모든 것을 이겨가는 것 같다”(뉴욕에서 보낸 편지), “종일 일하고 밤에도 일한다”(<김환기 뉴욕일기>)….
“고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도 김환기는 손에서 붓을 결코 놓지 않았다. ‘한 점 하늘’ 전시에 나온 김환기 작품 세계의 변천사는 이처럼 그가 하루하루 쌓은 노력이 그린 궤적이다. 117점의 시기별 주요작과 김환기가 소장했던 달항아리, 100점가량의 방대한 아카이브 중 가려 뽑은 작품들로 김환기의 삶과 작품 세계를 정리했다.
1937년 4월, 스물네 살의 청년 화가 김환기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당시 일본은 인상주의 이후 입체주의부터 초현실주의 등 여러 유럽 미술사조가 직수입되는 아시아의 미술 중심지였다. ‘론도’(1938)는 그가 배워온 추상 양식을 적용한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의 특징적인 색면(色面) 구성은 작가의 말년 점화(點畵)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꽃가게(1948년)
‘꽃가게’(1948)에서도 훗날 점화로 발전할 씨앗을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처음 나온 이 작품은 꽃들을 큼직한 점으로 표현하고 선반을 수평선으로 단순화하는 등 사실을 재현하면서도 점·선·면이라는 추상의 원리에 충실하다. ‘판자집’(1951)은 6·25 전쟁 중 김환기가 부산에서 피란 생활을 하며 그린 작품. 찌는 듯이 덥고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비좁은 다락방에서도 그는 그림을 그렸다. 김환기도 그런 자신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저 그릴 수밖에 없었다. (중략) 이런 게 예술과 싸우는 것일까?”(<사상계>) 판자집(1951년)
김환기는 한국의 전통 미술과 자연을 사랑했다. 백자대호라는 멋없는 이름의 백자에 ‘달항아리’라는 이름을 붙여준 게 그다. ‘달빛교향곡’(1954)은 김환기의 달항아리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난 그림 중 하나다. 달항아리는 그림 속 좌대 위에서 관객의 눈과 마주하고, 뒤에 걸린 은은한 푸른색의 보름달이 이를 비춘다. 영원의 노래(1957년)
한국적 소재에 대한 사랑은 1956년 파리로 건너간 뒤 더욱 깊어졌다. “여기 와서 느낀 것은 시정신(詩精神)이오. 예술에는 노래가 담겨야 할 것 같소. 거장들의 작품에는 모두가 강력한 노래가 있구려.” 1957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김환기는 이렇게 적었다. 그리고 깨달음을 살려 같은 해 발표한 ‘영원의 노래’에 구름과 산, 학, 도자기, 매화, 달 등 한국적 도상들을 리듬감 있게 배치했다. 북서풍 30-VIII-65(1965년)
한국적이고 서정적인 추상 작업을 이어가던 1963년, 50세의 김환기는 세계 미술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른 미국 뉴욕으로 이주해 또 다른 도전에 몸을 던졌다. 1년 뒤에는 개인전도 열었다. 뉴욕타임스(NYT)는 전시에 대해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모방”이라고 혹평했지만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새로운 형식을 거듭 실험하던 김환기는 마침내 ‘점’을 재발견한다. ‘북서풍 30-VIII-65’ 등은 그 연구의 결과물이다. “점화가 성공할 것 같다. 미술은 하나의 질서다.”(<김환기 뉴욕일기>)
1969~1970년 김환기의 점화는 마침내 전면점화로 진화한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66’(1970)이 그 결과물이다.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김환기 뉴욕일기>) 세계에서 통하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아름다움, 그 속에는 가장 한국적인 정서가 있었다.
캔버스를 두꺼운 면인 ‘코튼 덕’으로 바꾸고, 유화 물감을 희석하고, 점들을 유려한 곡선에 따라 펼치고…. 기법과 구성은 나날이 발전해 마침내 ‘하늘과 땅 24-IX-73 #320’(1973)에서 절정을 이룬다. 점·선·면이 완벽하게 조화돼 김환기의 ‘푸른 점화’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다. 하지만 평생에 걸친 처절한 노력은 그의 몸을 좀먹었다. 건강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악화돼 있었다. 작품을 완성한 날 그는 일기에 썼다. “죽을힘을 다해서 완성.”
푸르던 그의 점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걸까. 병세가 악화하면서 그림은 어두워진다. 유려했던 곡선도 가지런히 배열된 점과 직선으로 바뀌며 정적이고 고요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17-VI-74 #337(1974년)
‘17-VI-74 #337’(1974)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으로, 김환기는 이 작품을 그린 뒤 다음달인 7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라고”(<김환기 뉴욕일기>). 죽는 날까지도 그가 괴로워하던 건 ‘더 그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미술품 최고價 작가 김환기, 그보다 더 값진 '점' 보게 되길"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 점 하늘’ 전시는 출품작의 양과 질, 구성 모두 역대 김환기 전시 중 최고 수준이다. 모처럼 열린 대규모 김환기 회고전을 위해 모두 한마음으로 전시 준비에 도움을 준 덕분이다. 전시 결정부터 개막까지 걸린 시간은 1년 반. 이 과정에서 리움 외 6개 기관과 40여 명의 개인 소장가가 이번 전시를 돕기 위해 작품을 흔쾌히 대여해 줬다. 여러 화랑과 경매사 관계자도 정보 제공 등을 통해 이번 전시를 아낌없이 도왔다.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만난 태현선 리움미술관 소장품연구실장은 “어떤 작품을 뺄지 결정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못다 한 이야기도 많아 보였다. 그에게 김환기의 작품세계와 전시의 막전 막후에 관한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김환기는 왜 한국 근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인가요.
“김환기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작가라는 수사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 인물입니다. 그는 한국 작가로서 식민지 시대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서구 미술 사조를 흡수하면서도 전통 미술을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1950년대 파리와 1960~1970년대 뉴욕이라는 20세기 국제 현대미술의 중심지에서 예술의 길을 찾아간 작가이기도 합니다.
한국 근현대미술의 경계를 넘어, 김환기라는 작가를 통해 20세기 세계 현대미술과 아시아 근현대미술의 관계를 조명해볼 수 있는 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상과 중요성에 비해 이때까지 연구 결과는 두텁지 않았습니다.” 달과 나무(1948년)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이유가 뭔가요.
“작가 연구의 기본 바탕은 작품을 실제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1930년대와 1950년대의 다양한 초기작 등을 충실히 살펴볼 수 있는 회고전이 거의 없었습니다. 소장처 파악, 높은 작품값 등 여러 현실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작가와 작품을 파악할 만한 부가적인 자료가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김환기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그림값’에만 쏠렸고, 특히 2000년대 이후 경매에서 점화들이 고가에 낙찰되면서 점화에만 관심이 집중됐죠. 김 화백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점화를 그리게 됐는지, 그의 작품이 후배 작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시들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세운 목표가 작가와 그의 작품 세계를 다시 제대로 알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전시를 마친 뒤에는 충실한 연구서를 낼 계획입니다.”
▷이번 전시, 어떻게 봐야 하나요.
“리움미술관 소장품은 물론 환기재단 등 각 기관, 여러 개인 소장가에게 시기별로 중요한 작품을 공간이 허락하는 한 많이 대여해왔습니다. 출간된 김환기의 일기와 글뿐만 아니라 최근 발견된 유족 소장 자료들을 곁들여 그가 어떻게 작품 세계를 만들어 나갔는지 총체적으로 알 수 있도록 전시를 구성했습니다. 전시를 볼 때는 김환기의 초기작과 아카이브, 벽에 적힌 김환기가 남긴 글을 꼼꼼히 보는 걸 권합니다. 그렇게 김환기를 이해하고 나서 전시 마지막 부분의 점화를 보면 감동이 몇 배로 커질 것입니다.” 12-V-70 #172(1970년)
▷‘한 점 하늘’이란 전시 제목은 무슨 뜻인가요.
“김환기에게 하늘은 영감의 원천입니다. 하늘의 달을 그렸고, 달항아리를 그 달과 동일시해 그렸죠. 후기에는 별에서 정서적 영감을 받았습니다. 말년에 가서는 예술과 삶과 세상을 모두 함축하는 의미로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김 화백은 이를 점으로 표현했습니다.
그의 추상이 점으로 집약되는 과정, 점이라는 작은 요소에 예술과 삶에 대한 사유를 담았다는 뜻을 제목으로 표현했습니다. 압축적인 제목인데, 다행히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관람객들이 제가 의도한 바를 이해해주시는 것 같아 기쁩니다.”
▷전시 관람 전 ‘예습’은 어떻게 해 가면 좋을까요.
“가능하면 김환기의 글과 일기를 읽어보고 오는 걸 추천합니다. 전시장 벽에 몇몇 문구를 발췌해 적어두긴 했지만, 일기 전문을 읽고 나면 훨씬 더 작품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겁니다. 김환기의 진솔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읽다 보면 ‘미술과 문학의 만남’이 어떤 의미인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단장한 호암미술관, 고미술 이어 현대미술 품는다 용인 호암미술관(사진)은 삼성그룹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이 30년에 걸쳐 수집한 고미술품을 바탕으로 1982년 문을 열었다. 수준 높은 컬렉션과 40여 년에 달하는 역사를 갖고 있지만, 2004년 리움미술관 개관 이후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존재감이 작아졌다. 주요 전시 대부분이 호암미술관 대신 리움미술관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찾아오는 관람객 대부분은 전시보다 아름다운 정원을 더 관람하고 싶어 했다.
그랬던 호암미술관이 확 달라졌다. 먼저 건축. 외부는 한국의 전통미를 살린다는 호암의 유지를 잇기 위해 전과 똑같이 했지만, 내부는 1년 반의 공사를 통해 전시실 층고를 평균 50㎝가량 높이는 등 미술품 전시에 최적화된 공간을 만들어냈다.
1층에는 나무 소재를 써 아트숍 겸 안내데스크를 설치했다. 2층 창문턱을 과감히 철거하고 통창으로 교체해 정원과 자연 풍광을 볼 수 있게 한 것도 인상적인 변화다. ‘리모델링 명가’로 꼽히는 이건축연구소의 이성란 건축가가 리노베이션을 맡았다.
전시 방향은 더 큰 변화를 겪었다. 앞으로 호암미술관에서는 고미술뿐만 아니라 수준 높은 현대미술 전시도 열 계획이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이제부터는 리움미술관이 한남동과 용인, 두 곳에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리움미술관급’ 현대미술 거장전을 용인에서도 볼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김환기 회고전은 그 시작을 알리는 전시다. 관람료는 1만4000원. 현장 티켓 구입도 가능하지만 예매해야 안전하다. 전시는 오는 9월 10일까지 열린다.
용인=성수영 기자
이미지=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그 점을 찍는 일을 하고 있다. 오만 가지, 죽어간 사람, 살아있는 사람, 흐르는 강, 내가 오르던 산, 돌, 풀포기, 꽃잎…. 실로 오만 가지를 생각하며 내일을 알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하며 점을 찍어간다.”(<김환기 뉴욕일기> 中)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면으로 이뤄져 있다. 면은 선이 모여 만들어지고, 선은 점이 모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점은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다. 그래서 김환기(1913~1974)는 세상의 모든 것을 점에 담아 점화(點畵)를 그렸다.
그렇다면 김환기가 살고 느낀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답하기 쉽지 않다. 한국 근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추상미술의 선구자, 국내 현대미술 경매 최고가 10점 중 9점을 차지할 정도로 ‘비싼 작가’….
우리가 아는 김환기는 대개 여기까지다. 그럴 만도 하다. 그의 작품세계와 삶을 총체적으로 조망할 전시는 없다시피 했고, 화집에 수록된 수많은 작품을 실제로 볼 기회조차 드물었다. 작품이 워낙 비싼 데다 흩어져 있어 대여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대규모 회고전 ‘한 점 하늘’은 그래서 김환기의 삶과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알 수 있는 다시 없을 기회다. 그의 시대별 대표작을 비롯해 평소 보기 어려운 초기작과 미공개작 등이 117점이나 나왔다.
한국적 전통과 추상을 접목하기 시작한 20대의 새파란 청년. 피란생활 중 허리를 펼 수 없는 다락방에서도 “그저 그릴 수밖에 없다”며 붓을 들던 30대 가장. 교수직을 내팽개치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한국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 분투하던 40대의 ‘무명 동양인 작가’.
미국 뉴욕에서 점화라는 새로운 길을 찾은 뒤 “마침내 자신을 발견했다”고 환호하던 50대의 ‘국가대표 작가’. “꿈은 무한한데 세월은 모자라다”며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 점을 찍던 61세의 김환기가 모두 여기에 있다.
하늘에 별 수놓듯 매일 그렸다…전쟁도 병마도 아랑곳없이
김환기는 평생 그림 앞에 성실했다. 사정이 허락하면 매일매일 그렸다. “붓을 들면 야속하기만 한 세상일이 머리에 떠오르나 그러나 내가 붓을 듦으로 해서 이런 야속한 것들을 이겨갈 수가 있다”(파리에서 보낸 편지), “난 계속 몸이 괴롭지만 일만은 늘 하고 있다. 일을 함으로써 모든 것을 이겨가는 것 같다”(뉴욕에서 보낸 편지), “종일 일하고 밤에도 일한다”(<김환기 뉴욕일기>)….
“고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도 김환기는 손에서 붓을 결코 놓지 않았다. ‘한 점 하늘’ 전시에 나온 김환기 작품 세계의 변천사는 이처럼 그가 하루하루 쌓은 노력이 그린 궤적이다. 117점의 시기별 주요작과 김환기가 소장했던 달항아리, 100점가량의 방대한 아카이브 중 가려 뽑은 작품들로 김환기의 삶과 작품 세계를 정리했다.
24세 '론도'…추상의 시작
론도(1938년)1937년 4월, 스물네 살의 청년 화가 김환기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당시 일본은 인상주의 이후 입체주의부터 초현실주의 등 여러 유럽 미술사조가 직수입되는 아시아의 미술 중심지였다. ‘론도’(1938)는 그가 배워온 추상 양식을 적용한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의 특징적인 색면(色面) 구성은 작가의 말년 점화(點畵)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꽃가게(1948년)
‘꽃가게’(1948)에서도 훗날 점화로 발전할 씨앗을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처음 나온 이 작품은 꽃들을 큼직한 점으로 표현하고 선반을 수평선으로 단순화하는 등 사실을 재현하면서도 점·선·면이라는 추상의 원리에 충실하다. ‘판자집’(1951)은 6·25 전쟁 중 김환기가 부산에서 피란 생활을 하며 그린 작품. 찌는 듯이 덥고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비좁은 다락방에서도 그는 그림을 그렸다. 김환기도 그런 자신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저 그릴 수밖에 없었다. (중략) 이런 게 예술과 싸우는 것일까?”(<사상계>) 판자집(1951년)
41세 '달빛교향곡'…전통美 꽃피워
달빛교향곡(1954년)김환기는 한국의 전통 미술과 자연을 사랑했다. 백자대호라는 멋없는 이름의 백자에 ‘달항아리’라는 이름을 붙여준 게 그다. ‘달빛교향곡’(1954)은 김환기의 달항아리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난 그림 중 하나다. 달항아리는 그림 속 좌대 위에서 관객의 눈과 마주하고, 뒤에 걸린 은은한 푸른색의 보름달이 이를 비춘다. 영원의 노래(1957년)
한국적 소재에 대한 사랑은 1956년 파리로 건너간 뒤 더욱 깊어졌다. “여기 와서 느낀 것은 시정신(詩精神)이오. 예술에는 노래가 담겨야 할 것 같소. 거장들의 작품에는 모두가 강력한 노래가 있구려.” 1957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김환기는 이렇게 적었다. 그리고 깨달음을 살려 같은 해 발표한 ‘영원의 노래’에 구름과 산, 학, 도자기, 매화, 달 등 한국적 도상들을 리듬감 있게 배치했다. 북서풍 30-VIII-65(1965년)
한국적이고 서정적인 추상 작업을 이어가던 1963년, 50세의 김환기는 세계 미술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른 미국 뉴욕으로 이주해 또 다른 도전에 몸을 던졌다. 1년 뒤에는 개인전도 열었다. 뉴욕타임스(NYT)는 전시에 대해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모방”이라고 혹평했지만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새로운 형식을 거듭 실험하던 김환기는 마침내 ‘점’을 재발견한다. ‘북서풍 30-VIII-65’ 등은 그 연구의 결과물이다. “점화가 성공할 것 같다. 미술은 하나의 질서다.”(<김환기 뉴욕일기>)
61세 '검은 점화',…죽는 날까지 찍은 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66(1970년)1969~1970년 김환기의 점화는 마침내 전면점화로 진화한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66’(1970)이 그 결과물이다.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김환기 뉴욕일기>) 세계에서 통하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아름다움, 그 속에는 가장 한국적인 정서가 있었다.
캔버스를 두꺼운 면인 ‘코튼 덕’으로 바꾸고, 유화 물감을 희석하고, 점들을 유려한 곡선에 따라 펼치고…. 기법과 구성은 나날이 발전해 마침내 ‘하늘과 땅 24-IX-73 #320’(1973)에서 절정을 이룬다. 점·선·면이 완벽하게 조화돼 김환기의 ‘푸른 점화’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다. 하지만 평생에 걸친 처절한 노력은 그의 몸을 좀먹었다. 건강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악화돼 있었다. 작품을 완성한 날 그는 일기에 썼다. “죽을힘을 다해서 완성.”
푸르던 그의 점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걸까. 병세가 악화하면서 그림은 어두워진다. 유려했던 곡선도 가지런히 배열된 점과 직선으로 바뀌며 정적이고 고요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17-VI-74 #337(1974년)
‘17-VI-74 #337’(1974)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으로, 김환기는 이 작품을 그린 뒤 다음달인 7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라고”(<김환기 뉴욕일기>). 죽는 날까지도 그가 괴로워하던 건 ‘더 그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미술품 최고價 작가 김환기, 그보다 더 값진 '점' 보게 되길"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 점 하늘’ 전시는 출품작의 양과 질, 구성 모두 역대 김환기 전시 중 최고 수준이다. 모처럼 열린 대규모 김환기 회고전을 위해 모두 한마음으로 전시 준비에 도움을 준 덕분이다. 전시 결정부터 개막까지 걸린 시간은 1년 반. 이 과정에서 리움 외 6개 기관과 40여 명의 개인 소장가가 이번 전시를 돕기 위해 작품을 흔쾌히 대여해 줬다. 여러 화랑과 경매사 관계자도 정보 제공 등을 통해 이번 전시를 아낌없이 도왔다.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만난 태현선 리움미술관 소장품연구실장은 “어떤 작품을 뺄지 결정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못다 한 이야기도 많아 보였다. 그에게 김환기의 작품세계와 전시의 막전 막후에 관한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김환기는 왜 한국 근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인가요.
“김환기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작가라는 수사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 인물입니다. 그는 한국 작가로서 식민지 시대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서구 미술 사조를 흡수하면서도 전통 미술을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1950년대 파리와 1960~1970년대 뉴욕이라는 20세기 국제 현대미술의 중심지에서 예술의 길을 찾아간 작가이기도 합니다.
한국 근현대미술의 경계를 넘어, 김환기라는 작가를 통해 20세기 세계 현대미술과 아시아 근현대미술의 관계를 조명해볼 수 있는 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상과 중요성에 비해 이때까지 연구 결과는 두텁지 않았습니다.” 달과 나무(1948년)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이유가 뭔가요.
“작가 연구의 기본 바탕은 작품을 실제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1930년대와 1950년대의 다양한 초기작 등을 충실히 살펴볼 수 있는 회고전이 거의 없었습니다. 소장처 파악, 높은 작품값 등 여러 현실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작가와 작품을 파악할 만한 부가적인 자료가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김환기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그림값’에만 쏠렸고, 특히 2000년대 이후 경매에서 점화들이 고가에 낙찰되면서 점화에만 관심이 집중됐죠. 김 화백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점화를 그리게 됐는지, 그의 작품이 후배 작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시들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세운 목표가 작가와 그의 작품 세계를 다시 제대로 알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전시를 마친 뒤에는 충실한 연구서를 낼 계획입니다.”
▷이번 전시, 어떻게 봐야 하나요.
“리움미술관 소장품은 물론 환기재단 등 각 기관, 여러 개인 소장가에게 시기별로 중요한 작품을 공간이 허락하는 한 많이 대여해왔습니다. 출간된 김환기의 일기와 글뿐만 아니라 최근 발견된 유족 소장 자료들을 곁들여 그가 어떻게 작품 세계를 만들어 나갔는지 총체적으로 알 수 있도록 전시를 구성했습니다. 전시를 볼 때는 김환기의 초기작과 아카이브, 벽에 적힌 김환기가 남긴 글을 꼼꼼히 보는 걸 권합니다. 그렇게 김환기를 이해하고 나서 전시 마지막 부분의 점화를 보면 감동이 몇 배로 커질 것입니다.” 12-V-70 #172(1970년)
▷‘한 점 하늘’이란 전시 제목은 무슨 뜻인가요.
“김환기에게 하늘은 영감의 원천입니다. 하늘의 달을 그렸고, 달항아리를 그 달과 동일시해 그렸죠. 후기에는 별에서 정서적 영감을 받았습니다. 말년에 가서는 예술과 삶과 세상을 모두 함축하는 의미로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김 화백은 이를 점으로 표현했습니다.
그의 추상이 점으로 집약되는 과정, 점이라는 작은 요소에 예술과 삶에 대한 사유를 담았다는 뜻을 제목으로 표현했습니다. 압축적인 제목인데, 다행히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관람객들이 제가 의도한 바를 이해해주시는 것 같아 기쁩니다.”
▷전시 관람 전 ‘예습’은 어떻게 해 가면 좋을까요.
“가능하면 김환기의 글과 일기를 읽어보고 오는 걸 추천합니다. 전시장 벽에 몇몇 문구를 발췌해 적어두긴 했지만, 일기 전문을 읽고 나면 훨씬 더 작품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겁니다. 김환기의 진솔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읽다 보면 ‘미술과 문학의 만남’이 어떤 의미인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단장한 호암미술관, 고미술 이어 현대미술 품는다 용인 호암미술관(사진)은 삼성그룹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이 30년에 걸쳐 수집한 고미술품을 바탕으로 1982년 문을 열었다. 수준 높은 컬렉션과 40여 년에 달하는 역사를 갖고 있지만, 2004년 리움미술관 개관 이후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존재감이 작아졌다. 주요 전시 대부분이 호암미술관 대신 리움미술관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찾아오는 관람객 대부분은 전시보다 아름다운 정원을 더 관람하고 싶어 했다.
그랬던 호암미술관이 확 달라졌다. 먼저 건축. 외부는 한국의 전통미를 살린다는 호암의 유지를 잇기 위해 전과 똑같이 했지만, 내부는 1년 반의 공사를 통해 전시실 층고를 평균 50㎝가량 높이는 등 미술품 전시에 최적화된 공간을 만들어냈다.
1층에는 나무 소재를 써 아트숍 겸 안내데스크를 설치했다. 2층 창문턱을 과감히 철거하고 통창으로 교체해 정원과 자연 풍광을 볼 수 있게 한 것도 인상적인 변화다. ‘리모델링 명가’로 꼽히는 이건축연구소의 이성란 건축가가 리노베이션을 맡았다.
전시 방향은 더 큰 변화를 겪었다. 앞으로 호암미술관에서는 고미술뿐만 아니라 수준 높은 현대미술 전시도 열 계획이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이제부터는 리움미술관이 한남동과 용인, 두 곳에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리움미술관급’ 현대미술 거장전을 용인에서도 볼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김환기 회고전은 그 시작을 알리는 전시다. 관람료는 1만4000원. 현장 티켓 구입도 가능하지만 예매해야 안전하다. 전시는 오는 9월 10일까지 열린다.
용인=성수영 기자
이미지=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