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간호사’란 단어 뒤 진짜 이름들을 쓰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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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소설가 백수린 인터뷰
등단 12년 만에 첫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 출간
'거짓말'과 '파독간호사' 두 키워드로
자신의 과거 상처를 직면하는 이야기 그려내
등단 12년 만에 첫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 출간
'거짓말'과 '파독간호사' 두 키워드로
자신의 과거 상처를 직면하는 이야기 그려내
장편소설은 통상 국내 소설가들에게 두 번째 데뷔 무대다. 국내 소설가들은 보통 신문사 신춘문예나 문예지 공모전 등을 통해 단편소설로 문단에 나온다. '당선'된 첫 소설과 달리 소설가 택하는 첫 장편은 '앞으로 어떤 소설가로 살겠다'는 선언과 마찬가지다. 내가 내 이름을 짓는 것만큼이나 엄격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팬들은 아끼는 소설가의 첫 장편을 기다리고, 소설가는 어떤 이야기를 쓸지 고심한다.
등단 12년 만에 첫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를 최근 출간한 소설가 백수린(41)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장편은 단편에 비해 더 긴 시간 이 이야기를 쓰게 될 게 자명했기 때문에 무엇보다 스스로 간절하게 쓰고 싶은 이야기를 찾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독자들을 향한 그야말로 '눈부신 안부'다. 백 작가는 그간 '장편은 언제 나오냐'는 팬들의 질문 혹은 요청을 적지 않게 들었다고 했다. 2011년 등단한 백 작가는 이해조소설문학상,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현대문학상,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등을 받으며 평단과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작가다. 백 작가 스스로도 "새로운 규모의 이야기를 언젠가는 써보고 싶었다"고 했다.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찾아헤맸던 그는 2020년 여름, 가까운 이들과 둘러앉은 식탁에서 한 단어를 듣는다. '파독간호사'. 그 순간 백 작가의 마음 속에서 첫 장편이 쓰여지기 시작했다.
"지인이 '몇 년 전에 파독간호사에 관한 전시회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있었는데, 흔히 생각하는 가난한 누이 이미지와는 다른 주체적 여성들이 많아서 흥미로웠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전시회를 보고 나오면서 '이 전시를 백수린이 쓴 소설로 읽어보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다고요. 그 순간 뭔가 쓸 수 있을 거 같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얼굴 색이 점점 밝아지는 게 보였다'고 할 정도로요."
<눈부신 안부>는 주인공 해미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마주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소설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 두 가지는 '파독간호사' 그리고 '거짓말'이다.
어려서 가스폭발 사고로 언니를 잃은 해미는 자칭 거짓말 전문가가 된다.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지키려 거짓말을 일삼는다. 그는 독일 유학을 떠난 엄마 덕에 파독간호사 이모들과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한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해미는 여전히 유년의 비극으로 인해 새로운 인연을 맺는 일을 주저한다. 대학 시절 미묘한 연애 감정을 주고 받던 우재와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파독간호사 이모들과 함께 했던 과거의 시점과 현재 시점을 오가며 진행된다. 해미는 어린시절 완수하지 못했던 '파독간호사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에 다시금 도전하며 과거의 자신과 마주한다.
백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문체에 숨겨져 있지만, '과거의 나를 대면하지 않으면 새로운 시작도 없다'는 소설의 메시지는 엄중하게 다가온다. 백 작가는 "이번 소설에서 독자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였다"며 "뭔가를 직면하기 힘들어서 묻고 가는 일이 굉장히 많지만, 과거의 나를 똑바로 봐야 비로소 유년기가 끝나고 어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쓰면서 해미가 저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용감하게 살기란 참 쉽지 않다"며 웃었다. '거짓말'은 백 작가에게 언어와 진실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함축하는 단어다. 불문학을 전공한 백 작가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소설을 쓴다. 그의 2011년 등단작 제목은 '거짓말 연습'. 이 단편은 프랑스에서 사회적, 언어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인 여성이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고민하고 또 시도하는 이야기다.
"소설가는 계속해서 글을 생산하고 그 글을 고정시키는 직업인데, 뭔가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진실을 납작하거나 단순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늘 있어요. 동시에, 소설이라는 장르가 일상 언어의 투박함을 이기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갖고 글을 씁니다."
백 작가가 스스로 잊지 못하는 거짓말은 없을까. 엉뚱한 호기심에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백 작가는 "이 소설을 내기 전까지는 '장편 이미 쓰고 있다' '거의 다 구상했다'는 거짓말을 가장 많이 했던 거 같다"며 장난스레 웃었다.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거짓말은 이야기에 가깝다. '우리 집에는 비밀의 문이 있다' '그 문 너머에는 환상적인 공간이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언어의 전형성에서 벗어난 '진실한 언어'를 오래도록 고민해온 그였기에 소설에서 '파독간호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데에도 고민이 많았다. "그녀의 주체성을 지우는 단어가 될까봐" 걱정했다.
그는 책 말미에 이렇게 적어뒀다. "파독간호사라는 용어가 독일로 이주한 한인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을 수동적 존재처럼 인식하게 만든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으나 이 책에서는 소설적 필요에 따라 가장 널리 통용되는 표현인 '파독간호사'를 그대로 사용했다. 같은 이유에서 간호사/간호조무사 역시 구분이 꼭 필요하지 않은 경우 관습적 사용에 따라 혼용했다."
여성, 파독간호사, 어린이…. 어떤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부수는 작업을 백 작가는 지속할 생각이다. 그는 "당장 차기작의 소재를 뭘로 하겠다는 계획은 없지만, 평면적으로 여겨지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작업은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이어 "내가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다른 스타일로도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지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고 덧붙였다. '백수린의 소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독자들이 떠올릴 만한 어떤 이미지에조차 갇히지 않겠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그가 '다정함'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만은 예측 가능하다. 백 작가의 소설은 비극을 말하면서도 끝내 낙관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이번 소설책에 사인을 할 때 이런 소설 속 문구를 적곤 한다.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나쁜 뉴스는 자꾸 들려오고 비극이 되풀이된다. 세상을 비관하기는 쉽지만 백 작가는 애써 낙관을 택한다. 그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읽는 사람에게도, 쓰는 사람에게도 필요하다"며 "요즘은 자기 마음도 살피지 못하니 남의 마음을 살필 여력은 더더욱 없지만, 사람들 사이에 다정함에 대한 열망이 여전히 있고 우리가 다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소설 속에서 해미는 떠나버린 언니에게 마음 속으로 묻는다.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눈부신 안부> 이후에도 백수린의 소설은 자꾸자꾸 사람들을 향해 뻗어나갈 것이다. 이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누구든 예감하게 된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등단 12년 만에 첫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를 최근 출간한 소설가 백수린(41)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장편은 단편에 비해 더 긴 시간 이 이야기를 쓰게 될 게 자명했기 때문에 무엇보다 스스로 간절하게 쓰고 싶은 이야기를 찾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독자들을 향한 그야말로 '눈부신 안부'다. 백 작가는 그간 '장편은 언제 나오냐'는 팬들의 질문 혹은 요청을 적지 않게 들었다고 했다. 2011년 등단한 백 작가는 이해조소설문학상,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현대문학상,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등을 받으며 평단과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작가다. 백 작가 스스로도 "새로운 규모의 이야기를 언젠가는 써보고 싶었다"고 했다.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찾아헤맸던 그는 2020년 여름, 가까운 이들과 둘러앉은 식탁에서 한 단어를 듣는다. '파독간호사'. 그 순간 백 작가의 마음 속에서 첫 장편이 쓰여지기 시작했다.
"지인이 '몇 년 전에 파독간호사에 관한 전시회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있었는데, 흔히 생각하는 가난한 누이 이미지와는 다른 주체적 여성들이 많아서 흥미로웠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전시회를 보고 나오면서 '이 전시를 백수린이 쓴 소설로 읽어보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다고요. 그 순간 뭔가 쓸 수 있을 거 같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얼굴 색이 점점 밝아지는 게 보였다'고 할 정도로요."
<눈부신 안부>는 주인공 해미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마주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소설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 두 가지는 '파독간호사' 그리고 '거짓말'이다.
어려서 가스폭발 사고로 언니를 잃은 해미는 자칭 거짓말 전문가가 된다.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지키려 거짓말을 일삼는다. 그는 독일 유학을 떠난 엄마 덕에 파독간호사 이모들과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한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해미는 여전히 유년의 비극으로 인해 새로운 인연을 맺는 일을 주저한다. 대학 시절 미묘한 연애 감정을 주고 받던 우재와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파독간호사 이모들과 함께 했던 과거의 시점과 현재 시점을 오가며 진행된다. 해미는 어린시절 완수하지 못했던 '파독간호사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에 다시금 도전하며 과거의 자신과 마주한다.
백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문체에 숨겨져 있지만, '과거의 나를 대면하지 않으면 새로운 시작도 없다'는 소설의 메시지는 엄중하게 다가온다. 백 작가는 "이번 소설에서 독자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였다"며 "뭔가를 직면하기 힘들어서 묻고 가는 일이 굉장히 많지만, 과거의 나를 똑바로 봐야 비로소 유년기가 끝나고 어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쓰면서 해미가 저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용감하게 살기란 참 쉽지 않다"며 웃었다. '거짓말'은 백 작가에게 언어와 진실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함축하는 단어다. 불문학을 전공한 백 작가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소설을 쓴다. 그의 2011년 등단작 제목은 '거짓말 연습'. 이 단편은 프랑스에서 사회적, 언어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인 여성이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고민하고 또 시도하는 이야기다.
"소설가는 계속해서 글을 생산하고 그 글을 고정시키는 직업인데, 뭔가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진실을 납작하거나 단순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늘 있어요. 동시에, 소설이라는 장르가 일상 언어의 투박함을 이기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갖고 글을 씁니다."
백 작가가 스스로 잊지 못하는 거짓말은 없을까. 엉뚱한 호기심에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백 작가는 "이 소설을 내기 전까지는 '장편 이미 쓰고 있다' '거의 다 구상했다'는 거짓말을 가장 많이 했던 거 같다"며 장난스레 웃었다.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거짓말은 이야기에 가깝다. '우리 집에는 비밀의 문이 있다' '그 문 너머에는 환상적인 공간이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언어의 전형성에서 벗어난 '진실한 언어'를 오래도록 고민해온 그였기에 소설에서 '파독간호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데에도 고민이 많았다. "그녀의 주체성을 지우는 단어가 될까봐" 걱정했다.
그는 책 말미에 이렇게 적어뒀다. "파독간호사라는 용어가 독일로 이주한 한인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을 수동적 존재처럼 인식하게 만든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으나 이 책에서는 소설적 필요에 따라 가장 널리 통용되는 표현인 '파독간호사'를 그대로 사용했다. 같은 이유에서 간호사/간호조무사 역시 구분이 꼭 필요하지 않은 경우 관습적 사용에 따라 혼용했다."
여성, 파독간호사, 어린이…. 어떤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부수는 작업을 백 작가는 지속할 생각이다. 그는 "당장 차기작의 소재를 뭘로 하겠다는 계획은 없지만, 평면적으로 여겨지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작업은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이어 "내가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다른 스타일로도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지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고 덧붙였다. '백수린의 소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독자들이 떠올릴 만한 어떤 이미지에조차 갇히지 않겠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그가 '다정함'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만은 예측 가능하다. 백 작가의 소설은 비극을 말하면서도 끝내 낙관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이번 소설책에 사인을 할 때 이런 소설 속 문구를 적곤 한다.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나쁜 뉴스는 자꾸 들려오고 비극이 되풀이된다. 세상을 비관하기는 쉽지만 백 작가는 애써 낙관을 택한다. 그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읽는 사람에게도, 쓰는 사람에게도 필요하다"며 "요즘은 자기 마음도 살피지 못하니 남의 마음을 살필 여력은 더더욱 없지만, 사람들 사이에 다정함에 대한 열망이 여전히 있고 우리가 다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소설 속에서 해미는 떠나버린 언니에게 마음 속으로 묻는다.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눈부신 안부> 이후에도 백수린의 소설은 자꾸자꾸 사람들을 향해 뻗어나갈 것이다. 이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누구든 예감하게 된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