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말을 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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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재현의 탐나는 책(3)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
정영문 지음
워크룸프레스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
정영문 지음
워크룸프레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말을 들으면 머릿속 공장이 갑작스레 가동되는 느낌이 든다. 평소엔 전혀 돌아가지 않아 굳어버린 톱니바퀴들에 급히 윤활유를 뿌리고 부지런히 태엽을 감는다. 자동차 엔진에 예열이 필요하듯이 오랫동안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그래, 이번에는 정말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보자’고 결심한다. 짧지만 결말에 의미심장한 여백이 자리하고 삶의 갈림길에 다다라 길의 끝마다 이런저런 가능세계가 있다는 걸 상상하게 하는, 좋은 교훈을 주면서도 그 자체로 듣기 즐거운 이야기를. 하지만 마땅한 인물과 서사가 끝내 떠오르지 않아 좌절하고 내 친구들과의 일화를 세어보기 시작한다. 내게 이야기를 짓는다는 건 그런 의미다.
나만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을 읽으며 말 그대로 웃음이 비어져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 오래 진지하게 집중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이 핑 감돌고, 크게 감탄해 급히 밑줄을 긋는다. 동의와 분노, 연민과 슬픔의 감정 안에 머물 수 있어 기쁘지만, 그런데 때로는 그저 온전히 웃고 싶기도 하다. 따스한 사람들의 품에 안겨 안온하게 미소 짓는 것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하게 문장의 습격을 받고 ‘아, 이 사람 진짜 웃기네!’라며 깔깔대는 폭소를 상상해보게 된다. 그럴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소설은 정영문의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다. 소설의 서두에서 밝히듯이, 이 소설은 미국 텍사스에 있는 동안 벌어지는 일들을 서술한, “텍사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텍사스에 관한 이야기에서 멀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다시 텍사스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소설이라는 이름 하에 쓰고 있지만 어쩌면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빙빙 돌고 도는 이야기이자 소설에 관한 소설이다.
이름하여 메타소설이라고 한다면 무언가 진지한 고찰과 비판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하지만 친구네 집 테라스에 앉아 하늘의 별들을 가리는 상수리나무를 보고, 나무 아래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머리에 도토리를 얻어맞으면 “다른 것도 아닌 도토리들에 고의로 괜히 머리를 얻어맞는 건 기분 좋은 일이야”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마다 상수리나무 아래 서 있곤 했다는 말을 들으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쉬이 웃음이 터진 다음 이 소설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텍사스에 기원을 두고 있는 칠리 콘 카르네 스튜를 떠올리며 (국제)칠리음미협회 회원들이 콩이 들어간 칠리를 칠리로 인정할지 아닐지 고민해보다가, 콩이 사람을 자칫 우울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전 세계의 교정시설에서 콩 음식을 많이 내놓는 것으로 입증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가, 콩이 몸에 좋다는 건 알지만 먹기는 싫어서 중국 한나라의 어떤 이가 두부를 만든 것이 아닐까 깨닫는다. 이제껏 콩밥을 먹어온 사람에게 출소하자마자 두부를 먹이는 것은 어쩌면 처음에는 장난으로부터 시작된 일이지만 출소한 이는 콩만 먹다 먹은 두부가 너무 맛있어 안 좋은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때로는 좋은 일도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그 좋은 효과에 힘입어 두부 먹기가 고유한 전통문화처럼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흐름을 따라가고 나니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한 스스로가 너무 웃겨서 기분이 좋아진다.
이 소설은 이런 이야기 뭉텅이들의 연속이다. 어느 것도 확실하게 정의되지 않고, 무엇이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는 결론들에 다다르며, 또다시 시선과 생각에 잡히는 모든 것을 생각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소설에 고정된 형식은 없고 어떤 이야기도 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그러면서도 휘발되지 않고 분명히 남는 것은, 이야기의 본질에 대한 고민. 그것은 결국 듣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재미가 아닐까. 그런데 가끔은(또는 대부분) 이야기에 재미가 없고 듣다가 하품이 나오거나 잠깐 졸더라도, 그것까지도 곧 나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다른 어떤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이기에 듣고 싶은 것이 아닌지, 그럼 나는 인위적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목과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고 있잖아,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고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어”, 말할 준비를 해본다.
나만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을 읽으며 말 그대로 웃음이 비어져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 오래 진지하게 집중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이 핑 감돌고, 크게 감탄해 급히 밑줄을 긋는다. 동의와 분노, 연민과 슬픔의 감정 안에 머물 수 있어 기쁘지만, 그런데 때로는 그저 온전히 웃고 싶기도 하다. 따스한 사람들의 품에 안겨 안온하게 미소 짓는 것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하게 문장의 습격을 받고 ‘아, 이 사람 진짜 웃기네!’라며 깔깔대는 폭소를 상상해보게 된다. 그럴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소설은 정영문의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다. 소설의 서두에서 밝히듯이, 이 소설은 미국 텍사스에 있는 동안 벌어지는 일들을 서술한, “텍사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텍사스에 관한 이야기에서 멀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다시 텍사스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소설이라는 이름 하에 쓰고 있지만 어쩌면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빙빙 돌고 도는 이야기이자 소설에 관한 소설이다.
이름하여 메타소설이라고 한다면 무언가 진지한 고찰과 비판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하지만 친구네 집 테라스에 앉아 하늘의 별들을 가리는 상수리나무를 보고, 나무 아래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머리에 도토리를 얻어맞으면 “다른 것도 아닌 도토리들에 고의로 괜히 머리를 얻어맞는 건 기분 좋은 일이야”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마다 상수리나무 아래 서 있곤 했다는 말을 들으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쉬이 웃음이 터진 다음 이 소설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텍사스에 기원을 두고 있는 칠리 콘 카르네 스튜를 떠올리며 (국제)칠리음미협회 회원들이 콩이 들어간 칠리를 칠리로 인정할지 아닐지 고민해보다가, 콩이 사람을 자칫 우울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전 세계의 교정시설에서 콩 음식을 많이 내놓는 것으로 입증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가, 콩이 몸에 좋다는 건 알지만 먹기는 싫어서 중국 한나라의 어떤 이가 두부를 만든 것이 아닐까 깨닫는다. 이제껏 콩밥을 먹어온 사람에게 출소하자마자 두부를 먹이는 것은 어쩌면 처음에는 장난으로부터 시작된 일이지만 출소한 이는 콩만 먹다 먹은 두부가 너무 맛있어 안 좋은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때로는 좋은 일도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그 좋은 효과에 힘입어 두부 먹기가 고유한 전통문화처럼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흐름을 따라가고 나니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한 스스로가 너무 웃겨서 기분이 좋아진다.
이 소설은 이런 이야기 뭉텅이들의 연속이다. 어느 것도 확실하게 정의되지 않고, 무엇이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는 결론들에 다다르며, 또다시 시선과 생각에 잡히는 모든 것을 생각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소설에 고정된 형식은 없고 어떤 이야기도 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그러면서도 휘발되지 않고 분명히 남는 것은, 이야기의 본질에 대한 고민. 그것은 결국 듣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재미가 아닐까. 그런데 가끔은(또는 대부분) 이야기에 재미가 없고 듣다가 하품이 나오거나 잠깐 졸더라도, 그것까지도 곧 나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다른 어떤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이기에 듣고 싶은 것이 아닌지, 그럼 나는 인위적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목과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고 있잖아,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고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어”, 말할 준비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