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 가수 꿈꿨던 중3 소년…7년 뒤 세계 클래식 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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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 바리톤 김태한, 세계 3대 콩쿠르 '퀸 엘리자베스' 우승
남 의식 안해 무대서 떨지 않아
유학경험 없어도 완벽 발음 눈길
음정·박자 넘어 시·시인 분석
곡 이해하려 많이 공부한 게 도움
김태한 이어 정인호 5위 입상
국립오페라단 지원 시스템 성과
남 의식 안해 무대서 떨지 않아
유학경험 없어도 완벽 발음 눈길
음정·박자 넘어 시·시인 분석
곡 이해하려 많이 공부한 게 도움
김태한 이어 정인호 5위 입상
국립오페라단 지원 시스템 성과
“이 정도면 만족합니다. 제가 가진 걸 100% 쏟아냈거든요. 우승 못 해도, 입상(6위까지) 못 해도 괜찮습니다.”
지난 2일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보자르콘서트홀.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결선에서 마지막 경연곡(베르디의 ‘나는 죽더라도’)을 끝낸 바리톤 김태한(23)은 서상화 오페라스튜디오 교육문화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할 만큼 했다’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리고 이틀 뒤, 심사위원은 결선 진출자 12명 중 가장르 어린 김태한(2000년 8월생)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줬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 텐데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젊은 성악가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김태한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우승을 하게 돼 얼떨떨하면서도 기쁘다”며 “남을 의식하지 않는 성격 덕분에 그리 떨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은 김태한의 편이었다. 콩쿠르가 무르익을수록 그의 주가는 높아졌다. 김태한은 화려한 기교를 앞세운 경쟁자들과 달리 원곡에 충실한 정확한 표현에 매달렸다.
선곡 전략도 주효했다. 그가 결선에서 노래한 것은 바그너의 ‘오 나의 사랑스러운 저녁별’, 구스타프 말러의 ‘타는 듯한 단검으로’, 코른골트의 ‘나의 갈망, 나의 망상이여’, 베르디의 ‘나는 죽더라도’ 등 네 곡. 자신의 호소력 짙은 음색과 음악성을 부각할 수 있는 곡으로 구성했다.
현지 청중과의 소통도 먹혔다. 김태한은 마지막으로 부른 베르디의 ‘돈 카를로’를 이탈리아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불렀다. 그는 “‘돈 카를로’는 이탈리아어보다 프랑스어로 먼저 나왔다”며 “마지막 소절이 ‘플랑드르를 구해달라’는 의미인데, 플랑드르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열리는) 벨기에 땅인 점을 감안해 프랑스어로 부르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평소 음정, 박자뿐 아니라 곡을 잘 이해하기 위해 (곡과 관련된) 시나 시인에 대해서도 공부한다”고 덧붙였다.
한때 하드록에 빠져 밴드부에서 활동한 김태한은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의 권유로 성악을 시작했다. 선화예고를 거쳐 서울대 성악과에 입학해 나건용 교수에게 배웠다. 해외 유학 경험이 없는 순수 국내파인데도 이번에 완벽한 외국어 발음을 구사해 눈길을 끌었다.
세계 무대에 제대로 이름을 알린 건 이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지만, 김태한이 잠재력 있는 성악가란 건 알 만한 사람은 어느 정도 아는 얘기다. 지난해 스페인 비냐스, 독일 슈팀멘, 이탈리아 리카르도잔도나이 등 세 개 국제콩쿠르에서 특별상을 받은 것은 이번 우승의 전초전 격이었다.
서 팀장은 “김태한은 어떤 언어건, 어떤 장르건 두루 소화할 수 있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라며 “뛰어난 재능을 가진 데다 부족한 걸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성실함도 갖췄다”고 말했다.
정인호는 “이처럼 권위 있는 무대에서 내가 가진 모든 영감과 음악적 표현을 쏟아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며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음악가가 되기 위해 정진하겠다”고 했다. ‘최종 12인’에 들어간 바리톤 권경민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도전해가겠다”고 밝혔다.
김태한과 정인호는 모두 국립오페라단의 오페라스튜디오(KNO스튜디오) 출신이다. 국립오페라단은 세계 무대를 휩쓸 성악 인재들을 키우기 위해 2021년 KNO스튜디오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출범 2년 만에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 것이다.
KNO스튜디오가 매년 선발하는 성악 인재는 20여 명이다. 이들에게 오페라 코칭, 외국어 발성, 대본 분석, 연기 등을 6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가르친다. 오페라 지휘, 연출 등 오페라 무대와 관련한 전문지식과 소양도 알려준다. 잘하는 학생에겐 국립오페라단 공연 출연 기회도 준다. 월 190만원의 장학금은 덤이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 기악 위주의 클래식 음악 지원 시스템이 성악으로 확대된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KNO스튜디오의 지원 시스템은 K팝의 ‘스타 양성 시스템’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며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을 구축한 만큼 앞으로 제2의 조수미, 제2의 김태한이 꾸준히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다은/김수현 기자 max@hankyung.com
지난 2일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보자르콘서트홀.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결선에서 마지막 경연곡(베르디의 ‘나는 죽더라도’)을 끝낸 바리톤 김태한(23)은 서상화 오페라스튜디오 교육문화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할 만큼 했다’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리고 이틀 뒤, 심사위원은 결선 진출자 12명 중 가장르 어린 김태한(2000년 8월생)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줬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 텐데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젊은 성악가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김태한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우승을 하게 돼 얼떨떨하면서도 기쁘다”며 “남을 의식하지 않는 성격 덕분에 그리 떨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재능과 노력의 합작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결선 무대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콩쿠르가 열리기 전만 해도 ‘날고 기는’ 세계적인 성악가들 틈바구니에 낀 신예 김태한을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하지만 시간은 김태한의 편이었다. 콩쿠르가 무르익을수록 그의 주가는 높아졌다. 김태한은 화려한 기교를 앞세운 경쟁자들과 달리 원곡에 충실한 정확한 표현에 매달렸다.
선곡 전략도 주효했다. 그가 결선에서 노래한 것은 바그너의 ‘오 나의 사랑스러운 저녁별’, 구스타프 말러의 ‘타는 듯한 단검으로’, 코른골트의 ‘나의 갈망, 나의 망상이여’, 베르디의 ‘나는 죽더라도’ 등 네 곡. 자신의 호소력 짙은 음색과 음악성을 부각할 수 있는 곡으로 구성했다.
현지 청중과의 소통도 먹혔다. 김태한은 마지막으로 부른 베르디의 ‘돈 카를로’를 이탈리아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불렀다. 그는 “‘돈 카를로’는 이탈리아어보다 프랑스어로 먼저 나왔다”며 “마지막 소절이 ‘플랑드르를 구해달라’는 의미인데, 플랑드르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열리는) 벨기에 땅인 점을 감안해 프랑스어로 부르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평소 음정, 박자뿐 아니라 곡을 잘 이해하기 위해 (곡과 관련된) 시나 시인에 대해서도 공부한다”고 덧붙였다.
한때 하드록에 빠져 밴드부에서 활동한 김태한은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의 권유로 성악을 시작했다. 선화예고를 거쳐 서울대 성악과에 입학해 나건용 교수에게 배웠다. 해외 유학 경험이 없는 순수 국내파인데도 이번에 완벽한 외국어 발음을 구사해 눈길을 끌었다.
세계 무대에 제대로 이름을 알린 건 이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지만, 김태한이 잠재력 있는 성악가란 건 알 만한 사람은 어느 정도 아는 얘기다. 지난해 스페인 비냐스, 독일 슈팀멘, 이탈리아 리카르도잔도나이 등 세 개 국제콩쿠르에서 특별상을 받은 것은 이번 우승의 전초전 격이었다.
서 팀장은 “김태한은 어떤 언어건, 어떤 장르건 두루 소화할 수 있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라며 “뛰어난 재능을 가진 데다 부족한 걸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성실함도 갖췄다”고 말했다.
입상자 2명 배출, K성악 지원군
이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는 역대 최다인 412명이 지원했다. 이 중 12명이 서는 결선 무대에 한국인이 3명이나 올랐다. 5위에 입상한 베이스 정인호(32)는 뛰어난 연기력과 무대 장악력으로 호평받았다.정인호는 “이처럼 권위 있는 무대에서 내가 가진 모든 영감과 음악적 표현을 쏟아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며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음악가가 되기 위해 정진하겠다”고 했다. ‘최종 12인’에 들어간 바리톤 권경민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도전해가겠다”고 밝혔다.
김태한과 정인호는 모두 국립오페라단의 오페라스튜디오(KNO스튜디오) 출신이다. 국립오페라단은 세계 무대를 휩쓸 성악 인재들을 키우기 위해 2021년 KNO스튜디오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출범 2년 만에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 것이다.
KNO스튜디오가 매년 선발하는 성악 인재는 20여 명이다. 이들에게 오페라 코칭, 외국어 발성, 대본 분석, 연기 등을 6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가르친다. 오페라 지휘, 연출 등 오페라 무대와 관련한 전문지식과 소양도 알려준다. 잘하는 학생에겐 국립오페라단 공연 출연 기회도 준다. 월 190만원의 장학금은 덤이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 기악 위주의 클래식 음악 지원 시스템이 성악으로 확대된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KNO스튜디오의 지원 시스템은 K팝의 ‘스타 양성 시스템’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며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을 구축한 만큼 앞으로 제2의 조수미, 제2의 김태한이 꾸준히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다은/김수현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