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사업만 키운 40대 총수…LG그룹 가치 150조 불렸다
말없고 농구 좋아하던 모범생 … 2018년 회장에 올라
트윈타워서 근무할 때
소맥 말기도 … 동료들 “겸손하고 소탈”
만년 적자 휴대폰 사업 접고, 전기차 배터리 등에 통큰 투자
“온종일 들고 다니기에 너무 버거울 것 같네요.”
2021년 어느 날.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LG전자 애프터서비스(AS) 매니저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매니저들의 장비 가방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깨에 짊어져보니 가방은 예상보다 묵직했다. 간담회는 자연스레 가방 무게를 줄이는 이야기로 흘러갔다. 현장에서 문제를 포착해 토론하는 걸 좋아하는 구 회장의 일면이다.

구 회장의 일상이 이렇게 변한 것은 2018년 6월 29일부터다. 갑작스럽게 타계한 구본무 LG그룹 선대회장에 이어 총수 자리를 이어받은 시점이다. 당시 만 40세인 구 회장에게 LG그룹 임직원 26만 명의 시선이 집중됐다. 총수로서 연륜이 부족하다는 우려의 시선도 있었다. 그룹의 장자(長子)였지만 경영 수업 기간이 비교적 짧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구 회장은 빠르게 이 같은 우려를 씻어냈다. 고비 때마다 과감하고 냉철한 결정을 내렸다. 2021년 4월 휴대폰 사업을 접기로 결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LG그룹 기업사(史)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결단이었다.

LG화학에선 배터리사업부문을 분할하기로 했다. 기업가치만 140조원에 달하는 LG에너지솔루션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가 총수에 오른 지 5년 만에 LG그룹의 기업가치는 150조원가량 불어났다. 조용하지만 묵묵히 성과를 올리는 LG호(號)의 수장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는 평가다.

실리콘밸리서 창원까지 … 풍부한 현장경험

구 회장은 학창 시절 농구를 좋아한 모범생으로 통했다. 한 영동고 동창생은 “말이 많지 않았고 튀는 학생도 아니었다”며 “농구를 특히 좋아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는 늘 농구공을 들고 다녔다”고 기억했다. 구 회장은 영동고를 졸업한 뒤 미국 뉴욕주에 있는 로체스터인스티튜트 공과대로 유학을 떠났다.

뉴욕에서 그는 부인 정효정 씨를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식품회사 보락 정기련 회장의 장녀인 정씨는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뉴욕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오랜 기간 교제를 이어가다가 2009년 9월 화촉을 밝혔다. 당시 결혼식은 양가의 가까운 가족 80여 명만 참석해 조용히 치러졌다.
촉매를 활용해 탄소를 저감하는 기술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촉매를 활용해 탄소를 저감하는 기술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구 회장은 2004년 구본무 선대회장의 양자로 입적됐다. 단숨에 LG그룹 후계자로 발탁된 것이다. 구 회장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는 구 전 회장의 첫째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구 전 회장이 불의의 사고로 외아들을 잃자 양자로 들어갔다. 장자 승계 원칙을 고수하는 LG 가문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이를 통해 구 회장은 ㈜LG 주식 등 경영권 관련 재산을 대부분 상속받았다.

구 회장은 2004년 양자로 입적된 후 본격적으로 그룹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LG전자 재경부문 대리로 2006년 입사했다. 이듬해 과장으로 승진한 뒤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학석사(MBA) 과정에 입학했지만, 중도에 학업을 그만둔다. 대신에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에서 약 1년간 근무했다. 스타트업을 경험한 그는 2009년 말 그룹으로 다시 복귀했다. 구 회장은 LG전자 미국 뉴저지법인에서 재무와 영업을 하다가 2013년 귀국했다.

‘소맥’ 말고 … 창원 기숙사 생활도

구 회장은 LG트윈타워에서 오랜 기간 근무했다. LG전자 뉴저지법인에서 복귀한 2013년부터 지금까지 창원사업장을 거친 1년을 제외하면 줄곧 트윈타워에서 일했다.

그래서 구 회장과 함께 근무한 LG그룹 계열사 직원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한결같이 “오너 일가면서도 매우 겸손하고 소탈한 성격”이라고 평가한다. 엘리베이터나 1층 흡연장에서 마주칠 때면 구 회장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구본무 선대회장으로부터 "어디서든 아는 직원을 만나면 항상 먼저 인사하라"는 당부를 몸소 실천한 것이다.
LG 사장단 워크샵.
LG 사장단 워크샵.
식사도 트윈타워의 지하 직원식당에서 동료들과 함께했다. LG트윈스 응원을 위해 동료들과 야구장도 종종 찾았다. 상사와 동료들에겐 꼭 존댓말을 쓴다고 한다. 회식 때는 ‘소맥(소주+맥주)’을 직접 말기도 했다. 구 회장은 트윈타워에서 ‘패셔니스트’로 통했다. 프라다 구두를 즐겨 신고 이탈리아제 수제 양복을 따로 맞춰 입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경테는 스위스 브랜드인 ‘마르쿠스 마리엔펠트’를 즐겨 쓴다고 한다. 명품 안경테로 통하는 이 브랜드 제품은 개당 140만~250만원대다.

2014년 LG전자 생활가전(HA)사업본부 창원사업장에서 기획관리팀 부장으로 일했을 때는 창원 기숙사에서 지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생산 현장의 근로자들과도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창원사업장은 냉장고·세탁기·에어컨 등을 양산하는 LG전자 핵심 생산기지다.

재계 78~85년생 모임 주도 … 소주 즐겨

구자균 LS일렉트릭 회장은 2018년 구 회장에 대해 “사랑하는 조카”라며 “말수가 많지 않지만 생각이 깊고 자상한 편”이라고 말했다.

구 회장은 주량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8~1985년생 기업인들과 술잔을 종종 기울이는 것으로 전해진다. 구본무 선대회장은 손님과 만날 때 주로 위스키인 발렌타인 21년산을 마셨다. 17년산은 너무 평범하고 30년산은 좀 과하다는 생각에서다. 구 회장은 특별히 주종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될 사업만 키운 40대 총수…LG그룹 가치 150조 불렸다
2016년 8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모친상에서도 그의 모습이 포착됐다. 구 회장은 당시 김 회장의 모친인 고(故) 강태영 여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빈소를 지키던 한화그룹 3세인 김동관 한화 부회장, 김동원 한화생명 사장,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전략본부장을 진심으로 위로했다. 구 회장은 장례식장 한쪽에 정기선 HD현대 사장, 김동관 회장, 김동원 사장, 김동선 전략본부장 등과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소주잔을 기울이며 강 여사에 대한 기억을 공유한 것으로 전해진다.

‘업의 본질’ 파고들자

“업(業)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2018년 10월 29일. 구 회장은 LG화학 사업보고회에서 경영진에게 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룹 총수로서 처음 맞은 사업보고회 자리였다. 통상 LG그룹 계열사 핵심 경영진은 매년 상·하반기에 한 번씩 이 같은 회의에서 머리를 맞댄다. 취임 후 첫 계열사 경영진과 함께하는 공식적 자리였던 만큼 구 회장이 사장들과 의례적 덕담을 나누는 정도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이 같은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LG화학 청주공장.
LG화학 청주공장.
‘업의 본질’을 파악하자는 것은 구 회장의 경영철학이었다. 사업을 둘러싼 단기적 변수에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하지 말고 사업의 본질을 꿰뚫고 업무를 전개해야 한다는 의미다. LG그룹 관계자는 “미래 사업을 추진할 때는 업의 본질을 바탕으로 어느 시장에서 경쟁할 것인지를 면밀하게 검토한다”며 “투자 때는 경쟁사보다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차별화해야 한다는 것이 구 회장의 경영철학”이라고 말했다

구 회장은 선대의 경영이념과 철학도 계승했다. 그는 지난달 열린 사장단 협의회에서 ‘고객을 위한 경영 혁신은 종착역이 없는 여정이다. 여기가 끝이라고 하면 그것이 곧 발전의 한계다’고 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말을 인용해 고객가치 경영을 이어가 달라고 당부했다. '지금 씨를 뿌리지 않으면 3년, 5년 후를 기대할 수 없다'는 구본무 선대회장의 말도 인용해 미래에 철저히 대비해달라고도 했다.

의전 최소화 … 실용주의 사고

2020년 5월 중순. 구 회장은 LG전자 매장인 LG 베스트샵 강서본점을 찾았다. 그는 1~3층 곳곳을 돌면서 직원들을 격려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비스에 최선을 다해 감사하다”는 말도 전했다. 그는 영업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책임급 실무자 3~4명과 함께 매장을 찾았다. 당시 고객들이 적잖았지만 구 회장의 방문을 눈치챈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구 회장은 현장을 찾을 때 의전을 최소화하라고 당부한다. 현장에서 사진을 찍는 것도 극도로 꺼린다. 공장이나 사업 현장에 촬영 장비가 보이고 사진 기사가 왔다갔다하면 업무에 방해를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솔루블 OLED' 개발 현황에 대해 연구개발 책임자들과 논의하는 장면.
'솔루블 OLED' 개발 현황에 대해 연구개발 책임자들과 논의하는 장면.
인사 전략도 철저히 실용적이다. 구 회장은 나이,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해왔다. 2018년 신학철 미국 3M 수석부회장을 LG화학 CEO로 영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신 부회장은 LG화학이 창립 71년 만에 맞은 첫 외부 출신 CEO다.

‘콩코드 오류’ 탈피 … 휴대폰 사업 수술대에

구 회장은 과감한 결단으로 그룹의 내실을 다졌다. LG전자의 휴대폰 사업을 정리한 것은 큰 용기가 있어 가능했다. LG전자의 휴대폰 사업은 2015년 2분기부터 2021년까지 줄곧 적자를 냈다. 누적 영업적자는 5조원에 달했고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1~2%에 불과했다.

LG전자는 1995년 휴대폰 사업을 시작한 뒤 승승장구했다. ‘초콜릿폰’, ‘프라다폰’을 앞세워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스마트폰 시장 진입 시점을 놓치면서 경쟁에서 뒤처졌다. 구조조정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LG 디지털 파크 내 LG전자 HE연구소.
LG 디지털 파크 내 LG전자 HE연구소.
그럼에도 휴대폰 사업을 정리하자는 결정은 쉽지 않았다. 2021년 당시 LG전자의 휴대폰 사업을 담당하는 모바일커뮤니케이션(MC)사업부에 속한 직원만 3000명을 웃돌았다. 그동안 투입된 투자비도 수조원이 넘었다. 이런 탓에 LG전자가 MC사업부 구조조정을 주저할 것이라는 시장의 관측이 많았다. LG전자가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매몰비용 등에 연연해 ‘콩코드의 오류’에 빠졌다는 지적도 있었다.

2021년 6월 구 회장은 LG전자의 휴대폰 사업을 완전히 접었다. 이에 앞서 2019년에는 LG전자 연료전지·수처리 사업을 정리했다. 2020년에는 LG화학 편광판 사업, 2022년엔 LG전자 태양광 사업을 각각 접었다.

94조→260조 … LG그룹 몸값 훌쩍

구 회장은 휴대폰 사업 등을 정리하면서 마련한 ‘실탄’으로 신사업에 나섰다. 2021년 7월 세계 3위 자동차 부품 기업 ‘마그나’와 합작법인을 세웠다. 자동차 전자장비 사업과 전기차 배터리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LG테크콘퍼런스에서 오프닝 스피치를 하는 장면.
LG테크콘퍼런스에서 오프닝 스피치를 하는 장면.
전장사업을 담당하는 LG전자 VS사업본부는 지난해 흑자 전환했다. 이 사업본부 영업이익은 지난해 1700억원에서 올해는 2700억원으로 불어날 전망이다. VS사업본부의 수주 잔액은 올해 100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배터리 사업은 승승장구하고 있다. 2020년 출범한 LG에너지솔루션의 시가총액은 140조원으로 유가증권시장 2위에 올랐다. 현재 LG그룹 상장 계열사 시가총액 합계는 260조원으로 구 회장이 취임한 2018년 6월 29일(94조1000억원)에 비해 150조원가량 불어났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