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흰색으로 무지개를 그렸다"…91세의 '단색화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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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화 거장' 정상화 화백
갤러리현대서 대규모 전시
전시는 7월 16일까지
아르떼 회원 전용
91세 화백과 나눈 문답 전문 수록
갤러리현대서 대규모 전시
전시는 7월 16일까지
아르떼 회원 전용
91세 화백과 나눈 문답 전문 수록
정상화의 '무제 76-7-26'(1976).
“그런데 작품은 어디 있나요?”
정상화 화백(91)의 전시회에 처음 온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한다. 특유의 단색화를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인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50년간 줄곧 그랬다. 일견 이해가 간다. 그의 그림은 무심코 봤을 때 벽지와 거의 구분이 가지 않으니까.
하지만 미술계 반응은 다르다. 그를 ‘단색화 거장’이라 부르며 극진히 모신다. 한국의 생존 작가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이라는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2021년)도 열었다. 작품은 리움미술관과 일본 도쿄현대미술관, 아랍에미리트 구겐하임 아부다비 등 국내외 유수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시장에서는 작품이 수억~십수억원에 거래된다. 왜일까.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정 화백의 1970년대 작품부터 근작까지 총 40여 점을 소개하는 전시 ‘무한한 숨결’이 최근 개막했다.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만난 정 화백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대체 뭘 표현한 그림이냐고. 왜 벽지 같은 작품을 그렸고, 거기엔 무슨 의미를 담았느냐고. 간담회에서 주고받은 이야기와 2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 관련 자료를 종합해 내용을 정리했다. 기사 말미에 실린 정 화백과 기자들의 질의응답 원문은 아르떼 웹사이트에만 공개된다.
“하나 뜯어내고 메우고, 또 뜯어내고 메우고…. 참 바보스럽죠. 하지만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바보스러운 과정, 그 자체가 제 작품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도 결국 반복입니다. 다르게 보면 격자를 구획한 선은 내 실핏줄이고, 작품은 곧 내 심장이 뛰고 철렁대는 모습이지요.” 작품 세부.
1932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그는 마산중학교 2학년때 미술의 길에 들어섰다. 부친은 아들이 화가가 되는 걸 극력 반대했다. 아버지가 그림과 화구를 문 밖으로 내버리면 그걸 몰래 도로 주워오는 게 일상이었다. “수의과 대학에 원서를 넣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서울대 미대에 지원해 합격했다. 6·25전쟁과 학도병으로 참전한 친구들의 죽음을 겪었고, 인천사범학교 미술 선생이 됐다. 퇴근 후 바로 잠들어 자정에 일어난 뒤 출근 전까지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다 전업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정 화백은 1960년대 후반 아시아 추상미술의 첨단을 걷던 일본 고베로 건너갔다. 그리고 치열한 연구와 실험 끝에 1970년대 초반 지금과 같은 격자 회화 양식을 확립했다. 모티브는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을 위해 브라질에 들렀다가 인부들이 돌을 네모나게 잘라 길을 만드는 모습에서 얻었다. “어릴 적 어머니가 한복을 지으며 천에 주름을 잡고, 밥을 지으며 도마 위 무를 가지런히 자르던 모습과 겹쳐 보였습니다. 인간의 힘이지요.”
“이것도 작품이냐”는 혹평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본 뒤 정 화백의 진가를 알아본 눈 밝은 이들도 있었다. 이우환은 “세계 어디를 다녀도 이런 장인 정신을 갖고 이렇게 어려운 작업을 하는 작가는 보지 못했다”고 감탄했다. 그의 작품 속 흰색을 두고 한 일본 평론가는 말했다. “정상화의 흰색은 무지개다.” 멀리서 보면 다 똑같은 흰색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회색 등 무채색 뿐 아니라 하늘색과 분홍색 등 다양한 색이 보이는 오묘한 빛깔을 띄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런 게 작품이면 우리도 예술이나 해보자’고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사실 맞는 말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업이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인지 가려집니다. 당시 앵포르멜(비정형주의)나 그 다음 유행이었던 극사실주의를 하는 작가들이 많았습니다. 재주 좋은 사람들도 많았지요. 하지만 모두 가라앉고 지금 남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재주가 아니라 노력이 중요해요. 저도 제가 구순이 될 때까지 전시를 열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그저 계속 노력했을 뿐입니다. 매일 새로운 걸 하려고 해도, 매일 비슷한 작업이 나올 때까지요.” 작품 세부.
정 화백은 “그림은 보고 느끼는 거지 설명하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현대미술은 꼭 이해하려고 할 필요가 없고, 마음으로 느끼면 돼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면 됩니다. 하지만 누군가 내 작품 앞에 발을 멈추고 생각하게 된다면 나는 작가로서 성공한 겁니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는 6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 정 화백은 “요즘은 기력이 없어서 3~4시간 잡고 있으면 손목이 툭 떨어진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앞으로의 꿈이 뭐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아직도 재밌는 그림을 많이 그리고 싶어요. 그림 그리는 게 가장 즐거워. 화가 안 됐으면 큰일날 뻔 했어(웃음).” 전시는 7월 16일까지.
▶뭘 그린 작품들입니까.
“내 숨결을 그렸습니다. 나의 삶과 작품을 만든 계절, 그날의 날씨와 공기가 섞여 있습니다. 단순해 보여도 바르고 말리고 접고 뜯어내고 메우고…. 미술대학에서 공부한 것부터 면과 공간, 양상 등 내 몸에 들어 있는 것을 총동원해 만든 작품입니다. 평면 안에 그 모든 걸 담았습니다.”
▶힘든 작업입니다. 조수를 쓰실 법도 한데요.
“요즘엔 사실 기력이 없어서 작업을 하기가 쉽지 않아요. 옛날엔 3~5시간 작업해도 힘든 줄 몰랐는데, 손이 자꾸 떨어집디다. 그래도 조수는 안 써요. 못 쓰는 거죠. 작품을 할 때는 딸이 옆에 와도 저리 가라고 소리질러요. 그런 성품인데 조수를 옆에 두고 일을 시킨다는 건 어불성설이지요.
조수를 쓰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나쁘다 좋다는 작가 자신이 판단할 문제입니다.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할 때도 조수를 쓰는 유명한 거장들을 많이 봤어요. 하지만 조수를 써서 만든 작품이라도, 책임은 작가 자신이 져야 하지요. 참 의미심장한 얘기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쓰지 않습니다.”
▶어떻게 미술의 길에 들어서셨나요.
“마산중학교 다닐 때 그림에 빠졌어요. 어느날 미술실 앞을 지나가다가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확 끌렸지요. 학교 마치면 그림을 그렸고, 사생대회가 열렸다 하면 늘 상을 받았어요. 화가가 돼야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6·25 전쟁이 났습니다. 시대는 혼란해지고, 그림을 그려서 제대로 먹고 살기 힘든 시기가 됐어요. 그래서인지 부친은 매일같이 가락동 집 대문 밖으로 제 물감을 던져버렸어요. 저와 어머니는 맨날 그걸 주워담아 왔고요. 이해합니다. 먹을 것도 없는데 그림을 그렸으니까요. 배고파서 입에 거품을 물면서도 그렸지요.
서울대 미대 시험을 볼 때는 아버지에게 “수의과대학 시험을 보러 간다”고 했어요. 아버지가 병아리 같은 동물들을 좋아하셔서 되는 대로 둘러댄 거였지요. 합격하고 나서 “서울대 됐습니다” 하니까 참 좋아하시더군요. 한 학기 등록금을 받아서 내고, 그러다 거짓말이 들통나서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을 못 받았어요. 하하. 큰형님이 등록금을 다 대주셨지요.”
▶6·25전쟁은 작품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일단 제대로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서울로 돌아오니 폐허가 돼 있었고요. 그래도 교수나 환경보다는 본인의 역량과 노력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빈약하고 연약한 환경에서도 노력 여하에 따라서 훌륭한 예술이 꽃필 수가 있어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겪은 전쟁의 아픔은 지금 세계를 호령하는 우리 문화의 바탕이자 힘이 되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빈곤 속에서 올라 선 그 정신, 우리가 느꼈던 아픔 속에 승산이 있어요. 김창열만 봐도 그래요. 자기가 겪은 전쟁의 아픔을 끝끝내 물방울 작품으로 승화시켜나갔잖아요.” ▶미술 선생님으로 생활하실 땐 어떻게 작품 활동을 하셨나요.
“졸업식 전에 인천사범학교 선생으로 발령을 받았어요. 문공부 장관 발령장을 받았습니다. 월급은 넉넉한 편이었습니다. 캔버스를 비롯해서 못 사던 재료들을 마음껏 샀습니다. 8년을 열심히 하다가 서울예고에서 불러서 서울예고 미술과장을 7년 했어요. 직장에 갔다오면 일단 밥을 먹고 잠을 한숨 잤습니다. 일어나면 자정에서 새벽 한시 정도였지요. 그때부터 4~5시간 작업을 한 겁니다. 그렇게 비밀리에 그림을 그린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일본 고베로 떠나신 이유가 뭡니까.
“현대미술 협회에 참가하거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철폐 운동 등을 벌이다가, 앵포르멜(비정형 미술)을 더 공부하려고 일본으로 떠났어요. 당시 고베에서 하던 게 구타이(구체미술)인데 앵포르멜과 비슷한 사조였지요. 흰색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입니다. 여러 색 중에서 필요 없는 색을 빼다 보면 몇 가지가 남는데, 단색화가들은 저마다 그 색을 가지고 작업을 합니다. 그걸 모두 빼고 마지막으로 남은 게 백색이에요. 다 똑같은 흰 색은 아닙니다. 내 마음을 담아서 미묘하게 다르게 색을 냈으니까요.”
▶푸른색이나 적색, 검은 색 작품은 어쩌다 하게 되셨나요.
“고베에 있다가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서 20년간 살았는데, 이때 사람들이 얘기를 했어요. 작품이 좋긴 한데 집에 걸면 밋밋하고, 벽지와 구분이 너무 안 간다고. 그런 얘기를 받아들인 겁니다.”
▶격자무늬 추상 회화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셨나요.
“대학생 때는 구상회화만 그렸어요.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평론가나 학자들의 이야기가 그래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전문성에서 구상성이 추상으로 바뀌는 거라고.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구상회화를 그린다고 해도 어차피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게 아니고, 그럴 수도 없어요. 화가의 시각으로 단순화하고 일부 추상화해서 그리는 거지요. 구상에도 추상성이 내재돼 있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추상성이 커지면 추상화가 됩니다.
그렇게 그리다 보니 어떤 그림을 그려도 평면으로 돌아가더라는 겁니다. 그림의 본질은 평면인데, 그 안에 공간성과 면을 넣고 싶었어요. 제 그림을 보면 보시다시피 네모반듯하지요. 이 안에 면, 공간, 미술대학 시절 공부한 것과 몸이 기억하는 것, 흘러가는 모든 세상 흐름의 양상 등을 총동원해 새겼습니다. 가장 중요한건 작가성입니다. 철학적인 요소가 그림에 담겨있어야 하고 화면속의 독자적인 언어가 다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대학 시절때부터 생각해왔던 내 느낌을 지금 다 말씀드린 겁니다.” ▶처음 반응은 어땠나요.
“안 좋았어요. 전시장 와서 ‘작품 어디있냐’고 물어보고. 당시에는 지금보다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사람이 더 드물었어요. 인간이 뭔가를 한 게 아니라, 신이 남겨놓은 발자취같은 그런 고전적인 작품만 예술작품으로 알 땐데, 너희 작품은 손바닥 발바닥으로 밀어서 만든 것인데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거 아니냐. 그림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들조차 그랬어요.
사실 처음 보면 누구나 그리 느낄 만도 하지요. 그당시 유행했던 예술이 다 그랬어요. 비오는 날 길을 걸어서 남은 발자국. 먹다가 뚝뚝 떨어진 자국. 내가 잘못해 뭔가를 깨트린 자국. 그런 것들을 전부 예술작품이라고 한 게 앵포르멜이거든요.”
▶90대까지 계속 전시를 할 거라고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아뇨, 생각도 못했죠. 그런데 계속 그렸어요. 건강 하나는 타고 났지요. 사남매인데 나 말고는 전부 하늘나라로 갔고, 학교 동기들도 거의 다 죽고 없으니. 하지만 그림은 건강과 달리 타고나는 게 아닙니다. 노력을 해야 해요.”
▶가장 중요한 성공의 비결은 노력이라는 말씀이시지요.
“노력이 없으면 이뤄지는 게 없다, 이건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시간을 적절히 잘 이용하라. 급하게 하면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바보스럽더라도 계속 해서 이뤄지는 게 작품이다. 내면의 힘든 걸 계속 이겨나가면서 만들어야 한다. 이게 제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내 작품을 생각해도 그래요. 끝이 없습니다. 메워냈다 들었다를 계속 반복했는데, 그림이 참 신기합니다. 일을 하면 그만큼 결과가 따라오거든요.”
▶갤러리현대 전시는 10년만입니다.
“40년 전 현대화랑 시절부터 인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파리에서 활동할 때 박명자 회장이 작품을 보고 계약을 맺자고 했고, 1983년 현대화랑 첫 개인전을 열었지요. 배려를 많이 해 주는 의리 있는 곳입니다.”
▶디른 이들에게 특별히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그림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져주세요. 문화가 달라지고 나라가 달라집니다. 좋은 작품을 여럿 많이 보고, 비교하고, 내용을 글로도 써보고. 나를 알게 되는 것. 그게 중요합니다. 현대미술이라고 어렵게 생각할 건 없어요. 많이 보시면 됩니다. 한 작가의 작품을 오래 보라는 게 아니라, 여러 작가의 다양한 작품을 보세요. 그러다 보면 보는 눈이 생깁니다.
작가들에게는 이런 말을 하고 싶어요. 예전에는 유학을 갔다와야 작품을 잘 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한국에서도 세계적인 작가가 나올 수 있는 토양이 됐어요. 좋은 지도자가 많아졌고요. 여기서 노력하라, 이런 말을 하고 싶고, 그렇게 말하는 좋은 교육자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요즘은 작품활동 하기가 참 힘든 시기에요. 옛날만 해도 한 시대가 10년은 갔는데 이제는 5년이 돼버렸고. 좋은 것들은 선배 작가들이 다 해서 막혀버리고 새로운 것도 없고. 그래서 작가가 되려면 모험이 필요해요. 박치기하고 들어가는 그런 각오가 없으면 못 합니다.”
▶요즘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괜찮긴 하지만 작품은 많이 못하고 있어요. 이제 체력에 부담이 많이 옵니다. 하더라도 예전에 하던 작품을 마무리하는 정도고. 파리에 있을 때를 생각해 봐도 다른 작가들은 80대에 들어서면 그림을 안 그리더군요. 그게 맞다 싶어요. 80대 초반 이후로는 노력해도 소용 없어요. 다만, 80대가 되기 전까지는 계속 노력해야 돼요. 하하하.”
▶‘너무 힘들어서 그림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으신가요.
“대학때는 워낙 배고팠기 때문에 그만둘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없습니다. 항상 모든 순간이 다 좋았어요. 퇴근하면 아내가 밥상을 차려줬는데, 그걸 마다하고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붓부터 잡은 적도 있고요. 지금도 그림 이야기를 해야 밥맛이 돕니다. 그림 생각하는 것만큼 즐거운 게 없어요. 항상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화가 하길 잘했다. 선택을 정말 잘했다. 이 모난 성격에 다른 거 했으면 큰일난다. 하하하.”
▶이때까지 살면서 제일 행복했던 경험은 뭔가요.
“아들 딸 볼 때가 제일 행복했지요.”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그런데 작품은 어디 있나요?”
정상화 화백(91)의 전시회에 처음 온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한다. 특유의 단색화를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인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50년간 줄곧 그랬다. 일견 이해가 간다. 그의 그림은 무심코 봤을 때 벽지와 거의 구분이 가지 않으니까.
하지만 미술계 반응은 다르다. 그를 ‘단색화 거장’이라 부르며 극진히 모신다. 한국의 생존 작가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이라는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2021년)도 열었다. 작품은 리움미술관과 일본 도쿄현대미술관, 아랍에미리트 구겐하임 아부다비 등 국내외 유수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시장에서는 작품이 수억~십수억원에 거래된다. 왜일까.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정 화백의 1970년대 작품부터 근작까지 총 40여 점을 소개하는 전시 ‘무한한 숨결’이 최근 개막했다.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만난 정 화백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대체 뭘 표현한 그림이냐고. 왜 벽지 같은 작품을 그렸고, 거기엔 무슨 의미를 담았느냐고. 간담회에서 주고받은 이야기와 2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 관련 자료를 종합해 내용을 정리했다. 기사 말미에 실린 정 화백과 기자들의 질의응답 원문은 아르떼 웹사이트에만 공개된다.
“뜯어내고 메우고…그 바보스러운 게 나”
‘벽지 그림’을 고상하게 말하면 ‘격자형 추상회화’다. 제작 과정은 고령토를 물에 섞어 캔버스에 얇게 바르는 데서 시작된다. 3~5㎜의 두께가 될 때까지 이 작업을 3회에서 10회까지 반복한다. 흙이 마르면 캔버스 천을 틀에서 떼어낸 뒤 뒷면에 자를 대고 연필로 선을 긋는다. 이 선을 나무 끌로 체중을 실어 눌러가며 캔버스를 접는다. 이렇게 만든 균열을 아크릴 물감으로 메웠다가 다시 뜯어내 ‘길 만들기’를 반복한다. 쉽지 않은 육체 노동이지만 조수는 절대로 쓰지 않는다. 그 노동 자체가 자신의 삶과 작품세계를 온전히 담는 과정이자 결과물이라는 철학 때문이다.“하나 뜯어내고 메우고, 또 뜯어내고 메우고…. 참 바보스럽죠. 하지만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바보스러운 과정, 그 자체가 제 작품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도 결국 반복입니다. 다르게 보면 격자를 구획한 선은 내 실핏줄이고, 작품은 곧 내 심장이 뛰고 철렁대는 모습이지요.” 작품 세부.
1932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그는 마산중학교 2학년때 미술의 길에 들어섰다. 부친은 아들이 화가가 되는 걸 극력 반대했다. 아버지가 그림과 화구를 문 밖으로 내버리면 그걸 몰래 도로 주워오는 게 일상이었다. “수의과 대학에 원서를 넣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서울대 미대에 지원해 합격했다. 6·25전쟁과 학도병으로 참전한 친구들의 죽음을 겪었고, 인천사범학교 미술 선생이 됐다. 퇴근 후 바로 잠들어 자정에 일어난 뒤 출근 전까지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다 전업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정 화백은 1960년대 후반 아시아 추상미술의 첨단을 걷던 일본 고베로 건너갔다. 그리고 치열한 연구와 실험 끝에 1970년대 초반 지금과 같은 격자 회화 양식을 확립했다. 모티브는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을 위해 브라질에 들렀다가 인부들이 돌을 네모나게 잘라 길을 만드는 모습에서 얻었다. “어릴 적 어머니가 한복을 지으며 천에 주름을 잡고, 밥을 지으며 도마 위 무를 가지런히 자르던 모습과 겹쳐 보였습니다. 인간의 힘이지요.”
“아직도 재밌는 그림 많이 그리고 싶어”
'무제 12-5-13'(2012)“이것도 작품이냐”는 혹평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본 뒤 정 화백의 진가를 알아본 눈 밝은 이들도 있었다. 이우환은 “세계 어디를 다녀도 이런 장인 정신을 갖고 이렇게 어려운 작업을 하는 작가는 보지 못했다”고 감탄했다. 그의 작품 속 흰색을 두고 한 일본 평론가는 말했다. “정상화의 흰색은 무지개다.” 멀리서 보면 다 똑같은 흰색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회색 등 무채색 뿐 아니라 하늘색과 분홍색 등 다양한 색이 보이는 오묘한 빛깔을 띄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런 게 작품이면 우리도 예술이나 해보자’고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사실 맞는 말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업이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인지 가려집니다. 당시 앵포르멜(비정형주의)나 그 다음 유행이었던 극사실주의를 하는 작가들이 많았습니다. 재주 좋은 사람들도 많았지요. 하지만 모두 가라앉고 지금 남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재주가 아니라 노력이 중요해요. 저도 제가 구순이 될 때까지 전시를 열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그저 계속 노력했을 뿐입니다. 매일 새로운 걸 하려고 해도, 매일 비슷한 작업이 나올 때까지요.” 작품 세부.
정 화백은 “그림은 보고 느끼는 거지 설명하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현대미술은 꼭 이해하려고 할 필요가 없고, 마음으로 느끼면 돼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면 됩니다. 하지만 누군가 내 작품 앞에 발을 멈추고 생각하게 된다면 나는 작가로서 성공한 겁니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는 6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 정 화백은 “요즘은 기력이 없어서 3~4시간 잡고 있으면 손목이 툭 떨어진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앞으로의 꿈이 뭐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아직도 재밌는 그림을 많이 그리고 싶어요. 그림 그리는 게 가장 즐거워. 화가 안 됐으면 큰일날 뻔 했어(웃음).” 전시는 7월 16일까지.
정상화 화백과의 질의응답
정 화백은 개막 전날인 지난달 31일 기자들과 만났다. 갤러리현대 전시장에서 시작된 인터뷰는 이어진 식사 자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일각의 소문과 달리 그는 정정했다. 목소리는 떨림이 없었고, 예술에 대한 지론을 강조할 때는 손을 강하게 흔들며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그와의 질의응답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실제 발언을 최대한 그대로 실었다.▶뭘 그린 작품들입니까.
“내 숨결을 그렸습니다. 나의 삶과 작품을 만든 계절, 그날의 날씨와 공기가 섞여 있습니다. 단순해 보여도 바르고 말리고 접고 뜯어내고 메우고…. 미술대학에서 공부한 것부터 면과 공간, 양상 등 내 몸에 들어 있는 것을 총동원해 만든 작품입니다. 평면 안에 그 모든 걸 담았습니다.”
▶힘든 작업입니다. 조수를 쓰실 법도 한데요.
“요즘엔 사실 기력이 없어서 작업을 하기가 쉽지 않아요. 옛날엔 3~5시간 작업해도 힘든 줄 몰랐는데, 손이 자꾸 떨어집디다. 그래도 조수는 안 써요. 못 쓰는 거죠. 작품을 할 때는 딸이 옆에 와도 저리 가라고 소리질러요. 그런 성품인데 조수를 옆에 두고 일을 시킨다는 건 어불성설이지요.
조수를 쓰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나쁘다 좋다는 작가 자신이 판단할 문제입니다.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할 때도 조수를 쓰는 유명한 거장들을 많이 봤어요. 하지만 조수를 써서 만든 작품이라도, 책임은 작가 자신이 져야 하지요. 참 의미심장한 얘기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쓰지 않습니다.”
▶어떻게 미술의 길에 들어서셨나요.
“마산중학교 다닐 때 그림에 빠졌어요. 어느날 미술실 앞을 지나가다가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확 끌렸지요. 학교 마치면 그림을 그렸고, 사생대회가 열렸다 하면 늘 상을 받았어요. 화가가 돼야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6·25 전쟁이 났습니다. 시대는 혼란해지고, 그림을 그려서 제대로 먹고 살기 힘든 시기가 됐어요. 그래서인지 부친은 매일같이 가락동 집 대문 밖으로 제 물감을 던져버렸어요. 저와 어머니는 맨날 그걸 주워담아 왔고요. 이해합니다. 먹을 것도 없는데 그림을 그렸으니까요. 배고파서 입에 거품을 물면서도 그렸지요.
서울대 미대 시험을 볼 때는 아버지에게 “수의과대학 시험을 보러 간다”고 했어요. 아버지가 병아리 같은 동물들을 좋아하셔서 되는 대로 둘러댄 거였지요. 합격하고 나서 “서울대 됐습니다” 하니까 참 좋아하시더군요. 한 학기 등록금을 받아서 내고, 그러다 거짓말이 들통나서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을 못 받았어요. 하하. 큰형님이 등록금을 다 대주셨지요.”
▶6·25전쟁은 작품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일단 제대로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서울로 돌아오니 폐허가 돼 있었고요. 그래도 교수나 환경보다는 본인의 역량과 노력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빈약하고 연약한 환경에서도 노력 여하에 따라서 훌륭한 예술이 꽃필 수가 있어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겪은 전쟁의 아픔은 지금 세계를 호령하는 우리 문화의 바탕이자 힘이 되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빈곤 속에서 올라 선 그 정신, 우리가 느꼈던 아픔 속에 승산이 있어요. 김창열만 봐도 그래요. 자기가 겪은 전쟁의 아픔을 끝끝내 물방울 작품으로 승화시켜나갔잖아요.” ▶미술 선생님으로 생활하실 땐 어떻게 작품 활동을 하셨나요.
“졸업식 전에 인천사범학교 선생으로 발령을 받았어요. 문공부 장관 발령장을 받았습니다. 월급은 넉넉한 편이었습니다. 캔버스를 비롯해서 못 사던 재료들을 마음껏 샀습니다. 8년을 열심히 하다가 서울예고에서 불러서 서울예고 미술과장을 7년 했어요. 직장에 갔다오면 일단 밥을 먹고 잠을 한숨 잤습니다. 일어나면 자정에서 새벽 한시 정도였지요. 그때부터 4~5시간 작업을 한 겁니다. 그렇게 비밀리에 그림을 그린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일본 고베로 떠나신 이유가 뭡니까.
“현대미술 협회에 참가하거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철폐 운동 등을 벌이다가, 앵포르멜(비정형 미술)을 더 공부하려고 일본으로 떠났어요. 당시 고베에서 하던 게 구타이(구체미술)인데 앵포르멜과 비슷한 사조였지요. 흰색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입니다. 여러 색 중에서 필요 없는 색을 빼다 보면 몇 가지가 남는데, 단색화가들은 저마다 그 색을 가지고 작업을 합니다. 그걸 모두 빼고 마지막으로 남은 게 백색이에요. 다 똑같은 흰 색은 아닙니다. 내 마음을 담아서 미묘하게 다르게 색을 냈으니까요.”
▶푸른색이나 적색, 검은 색 작품은 어쩌다 하게 되셨나요.
“고베에 있다가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서 20년간 살았는데, 이때 사람들이 얘기를 했어요. 작품이 좋긴 한데 집에 걸면 밋밋하고, 벽지와 구분이 너무 안 간다고. 그런 얘기를 받아들인 겁니다.”
▶격자무늬 추상 회화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셨나요.
“대학생 때는 구상회화만 그렸어요.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평론가나 학자들의 이야기가 그래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전문성에서 구상성이 추상으로 바뀌는 거라고.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구상회화를 그린다고 해도 어차피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게 아니고, 그럴 수도 없어요. 화가의 시각으로 단순화하고 일부 추상화해서 그리는 거지요. 구상에도 추상성이 내재돼 있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추상성이 커지면 추상화가 됩니다.
그렇게 그리다 보니 어떤 그림을 그려도 평면으로 돌아가더라는 겁니다. 그림의 본질은 평면인데, 그 안에 공간성과 면을 넣고 싶었어요. 제 그림을 보면 보시다시피 네모반듯하지요. 이 안에 면, 공간, 미술대학 시절 공부한 것과 몸이 기억하는 것, 흘러가는 모든 세상 흐름의 양상 등을 총동원해 새겼습니다. 가장 중요한건 작가성입니다. 철학적인 요소가 그림에 담겨있어야 하고 화면속의 독자적인 언어가 다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대학 시절때부터 생각해왔던 내 느낌을 지금 다 말씀드린 겁니다.” ▶처음 반응은 어땠나요.
“안 좋았어요. 전시장 와서 ‘작품 어디있냐’고 물어보고. 당시에는 지금보다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사람이 더 드물었어요. 인간이 뭔가를 한 게 아니라, 신이 남겨놓은 발자취같은 그런 고전적인 작품만 예술작품으로 알 땐데, 너희 작품은 손바닥 발바닥으로 밀어서 만든 것인데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거 아니냐. 그림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들조차 그랬어요.
사실 처음 보면 누구나 그리 느낄 만도 하지요. 그당시 유행했던 예술이 다 그랬어요. 비오는 날 길을 걸어서 남은 발자국. 먹다가 뚝뚝 떨어진 자국. 내가 잘못해 뭔가를 깨트린 자국. 그런 것들을 전부 예술작품이라고 한 게 앵포르멜이거든요.”
▶90대까지 계속 전시를 할 거라고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아뇨, 생각도 못했죠. 그런데 계속 그렸어요. 건강 하나는 타고 났지요. 사남매인데 나 말고는 전부 하늘나라로 갔고, 학교 동기들도 거의 다 죽고 없으니. 하지만 그림은 건강과 달리 타고나는 게 아닙니다. 노력을 해야 해요.”
▶가장 중요한 성공의 비결은 노력이라는 말씀이시지요.
“노력이 없으면 이뤄지는 게 없다, 이건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시간을 적절히 잘 이용하라. 급하게 하면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바보스럽더라도 계속 해서 이뤄지는 게 작품이다. 내면의 힘든 걸 계속 이겨나가면서 만들어야 한다. 이게 제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내 작품을 생각해도 그래요. 끝이 없습니다. 메워냈다 들었다를 계속 반복했는데, 그림이 참 신기합니다. 일을 하면 그만큼 결과가 따라오거든요.”
▶갤러리현대 전시는 10년만입니다.
“40년 전 현대화랑 시절부터 인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파리에서 활동할 때 박명자 회장이 작품을 보고 계약을 맺자고 했고, 1983년 현대화랑 첫 개인전을 열었지요. 배려를 많이 해 주는 의리 있는 곳입니다.”
▶디른 이들에게 특별히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그림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져주세요. 문화가 달라지고 나라가 달라집니다. 좋은 작품을 여럿 많이 보고, 비교하고, 내용을 글로도 써보고. 나를 알게 되는 것. 그게 중요합니다. 현대미술이라고 어렵게 생각할 건 없어요. 많이 보시면 됩니다. 한 작가의 작품을 오래 보라는 게 아니라, 여러 작가의 다양한 작품을 보세요. 그러다 보면 보는 눈이 생깁니다.
작가들에게는 이런 말을 하고 싶어요. 예전에는 유학을 갔다와야 작품을 잘 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한국에서도 세계적인 작가가 나올 수 있는 토양이 됐어요. 좋은 지도자가 많아졌고요. 여기서 노력하라, 이런 말을 하고 싶고, 그렇게 말하는 좋은 교육자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요즘은 작품활동 하기가 참 힘든 시기에요. 옛날만 해도 한 시대가 10년은 갔는데 이제는 5년이 돼버렸고. 좋은 것들은 선배 작가들이 다 해서 막혀버리고 새로운 것도 없고. 그래서 작가가 되려면 모험이 필요해요. 박치기하고 들어가는 그런 각오가 없으면 못 합니다.”
▶요즘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괜찮긴 하지만 작품은 많이 못하고 있어요. 이제 체력에 부담이 많이 옵니다. 하더라도 예전에 하던 작품을 마무리하는 정도고. 파리에 있을 때를 생각해 봐도 다른 작가들은 80대에 들어서면 그림을 안 그리더군요. 그게 맞다 싶어요. 80대 초반 이후로는 노력해도 소용 없어요. 다만, 80대가 되기 전까지는 계속 노력해야 돼요. 하하하.”
▶‘너무 힘들어서 그림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으신가요.
“대학때는 워낙 배고팠기 때문에 그만둘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없습니다. 항상 모든 순간이 다 좋았어요. 퇴근하면 아내가 밥상을 차려줬는데, 그걸 마다하고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붓부터 잡은 적도 있고요. 지금도 그림 이야기를 해야 밥맛이 돕니다. 그림 생각하는 것만큼 즐거운 게 없어요. 항상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화가 하길 잘했다. 선택을 정말 잘했다. 이 모난 성격에 다른 거 했으면 큰일난다. 하하하.”
▶이때까지 살면서 제일 행복했던 경험은 뭔가요.
“아들 딸 볼 때가 제일 행복했지요.”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