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순 칼럼] 尹정부, 미래 아젠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다시 ‘노무현 어록’을 들춰봐도 그는 다변이었다. 표현도 풍성했다. 청와대 담당 3년7개월 내내 그의 말을 쫓느라 바빴다. 그의 어록 중 의미 있게 기억나는 게 있다. “정부와 언론이 제대로 아젠다 경쟁을 하자”는 말이다. 춘추관 기자들과 어떤 간담회에서 “가슴에 밤송이 가시만 가득 담아두지만 말고”라며 그랬다. 비판은 웬만큼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우리 정부’라는 말도 자주 썼다.

언론뿐 아니라 학계·산업계 등 민간과 정부의 아젠다 선점·주도 경쟁은 중요하다. 건실한 아젠다 경쟁은 경제성장과 나라 발전을 이끄는 힘이 된다. 물론 사회는 다원화돼 가고, 미래·혁신의 아젠다 역시 다분야에 걸쳐 복합적이다. 언론과 정부로 보면 각각 독자와 국민을 상대로 혁신·지속성장·균형발전 등의 아젠다 세일즈를 벌이는 셈이다. 경계의 대상은 늘 선동과 왜곡된 프로파간다(선전)다. 언론이든 정권이든 그릇된 아젠다 설정은 사회를 퇴행으로 내몬다.

아젠다 경쟁의 중대성 측면에서 최근 보건복지부의 1급 문책 인사를 다시 보게 된다. 전격 날아간 보건의료정책실장은 ‘관료사회의 꽃’이라는 1급 요직이다. 앞서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이 전격 경질된 터여서 더 관심사가 됐다. 그의 직위해제는 간호법 파동에서 제 역할을 못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산업부 차관은 탈원전 정책 폐기에 소극적이었던 게 요인이었다고 한다.

아젠다전에서 선수교체는 자연스럽다. 그 경쟁에서 빛나야 정권이 안정되고 연장도 된다. 문제는 직접 국민 선택을 받은 대통령이 나서도 공무원이 움직이지 않으면 헛일이라는 점이다. 아젠다 선점만으로 정부가 특정 아젠다에서 이긴 게 아니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노동·연금·교육개혁이 그렇다. 적기에, 최적 성과를 내지 못하면 먼저 장악하고도 ‘정부 패’가 된다. 공무원들을 일이 되는 방향으로, 조기에 성과가 나도록,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게 중요하다. 국민들도 예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는 복잡성이 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이해관계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권위적 관료주의에서 엘리트 공무원들이 일방적으로 방향 잡고, 로드맵 제시하고, 재정과 차관 배분해주며 따라오라고 족치는 개발 시대가 아닌 것이다. 더욱이 이제는 공공부문의 맨파워도 민간에 밀린다. 관공서들의 세종 이전으로 서울에서 멀어진 게 공직 수준 저하를 가속화했다. ‘공직 엑소더스’도 그 결과다.

윤석열 정부의 구조개혁은 용감한 장수와 지혜로운 작전참모를 필요로 한다. 경질된 두 고위직은 이 전쟁에서 제 역할을 못 했다. 심판자인 국민은 간호사·의사 업무영역 재정비가 지금 절실한 의료 아젠다라고 여기지 않는다. 설령 다수 야당이 법을 발의해도 행정력을 총동원해 막고 체감형 아젠다를 대안으로 제시해야 한다. 의료 사각지대 없애기, 의사 증원, 의료재정 확충, 바이오와의 연계를 통한 의료산업 혁신 등 긴요한 아젠다가 널렸다. 주무 부처가 적시 아젠다로 여론을 선도하지 못하니 선수가 바뀌는 것이다.

산업부 2차관도 같다. 전 정권은 탈원전을 아젠다로 만들어 온갖 무리수로 끌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원상 복귀가 큰 과제다. 모처럼 민관 공감의 아젠다인데 속도를 못 낸다. 산업계에선 더 못 버틴다는 하소연이 넘치고 중간평가 성격의 총선도 다가온다. 이런 절박한 시기에 노무현 화법으로 보면 ‘우리 정부’ 선수 같지 않은 차관이었다. ‘3대 개혁’ 아젠다에서도 쫓기는 판에, 여기서도 조기 성과를 못 내면 무능 정부가 된다.

공무원들은 그럴 것이다. ‘괜히 무리했다가 정권이 바뀌면?’ ‘또 영혼 없는 존재가 돼야 하나’. 사실 이 문제를 잘 풀어야 한다. 안 그래도 밖에서 보면 한국은 5년마다 새 나라가 세워지는 것처럼 왔다 갔다 한다. 낡은 이념과 진영논리에 매몰된 한국 정치의 구조적 취약점이다. 권한이자 책무인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헌법 제7조), 신분을 보장하는 직업공무원제(공무원법), 복지부동을 깨는 효율적 인사라는 3각 함수를 어떻게 푸느냐가 관건이다. ‘헤테로(이질)문화’ 확대를 통한 공직 순혈주의 깨기도 도움 된다. 여기서 최적의 답을 낼 때 정부는 미래 지향적 아젠다를 설득하고 실행할 수 있다. 두 공무원 낙마는 복지부동에 대한 경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젠다전에서 지지 않으려는 윤석열 정부의 자구책이다. 아젠다 돌파형이 중용될까, 후속 인사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