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유감(遺憾)에 대한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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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 가사나 드라마 대사 중에는 ‘어쩜 우리 마음을 저렇게 잘 표현했을까’ 하는 것들이 적잖다. 엘튼 존의 노래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처럼 ‘미안하다’는 참으로 하기 싫은 말이다. 그룹 시카고 역시 ‘Hard to Say I’m Sorry’라고 했다.
영어 sorry는 원시 게르만어 ‘sarig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통스럽다’는 뜻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과하는 마음은 다 마찬가지다. 패배자가 된 것 같아 자존심 상하고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돌려 말하는 법을 찾았다.
지금은 상왕으로 물러앉은 아키히토 전 일왕이 1990년 국빈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 환영 만찬 자리에서 한 말이다. “일본에 의해 초래된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이 겪으셨던 고통을 생각하며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 일왕의 지위와 일본인들의 정서를 감안해 고르고 고른 표현이 사전에도 없는 ‘통석의 염’인데, 우리 국민에게는 진정성 있는 과거사 사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즉위 때부터 방한을 원했던 일왕은 결국 한국에 오지 못했다.
요즘 정치권에서 사과의 완곡어법으로 자주 쓰이는 단어가 ‘유감(遺憾)’이다. 그런데 이 말의 의미를 보면 사과로 쓸 수 없는 말이다. ‘마음에 차지 않아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이다. ‘유감 있다’ ‘유감을 품는다’라고 할 때 쓰는 말이 ‘유감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잘못 쓰이고 있는 것이다.
언어의 사회성이란 이름으로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말의 TPO(때·장소·상황)가 있는 법이다. ‘천안함 막말’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자 발언의 장본인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이 쓴 표현이 “깊은 유감의 말씀”이다. 우리 군의 명예에 대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그는 공개 석상에서 ‘유감’ 운운하며 끝내 ‘사과’란 표현을 회피했다. 다른 나라를 향해 무슨 외교 성명이라도 발표하는 듯 말이다. 어느 TV 드라마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미안할 때는 미안하다고 말하세요. 자존심 세우면서 사과하는 방법은 없어요.” 권 대변인은 최원일 전 함장을 비롯한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장병과 유족들을 향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또박또박 말해야 했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
영어 sorry는 원시 게르만어 ‘sarig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통스럽다’는 뜻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과하는 마음은 다 마찬가지다. 패배자가 된 것 같아 자존심 상하고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돌려 말하는 법을 찾았다.
지금은 상왕으로 물러앉은 아키히토 전 일왕이 1990년 국빈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 환영 만찬 자리에서 한 말이다. “일본에 의해 초래된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이 겪으셨던 고통을 생각하며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 일왕의 지위와 일본인들의 정서를 감안해 고르고 고른 표현이 사전에도 없는 ‘통석의 염’인데, 우리 국민에게는 진정성 있는 과거사 사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즉위 때부터 방한을 원했던 일왕은 결국 한국에 오지 못했다.
요즘 정치권에서 사과의 완곡어법으로 자주 쓰이는 단어가 ‘유감(遺憾)’이다. 그런데 이 말의 의미를 보면 사과로 쓸 수 없는 말이다. ‘마음에 차지 않아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이다. ‘유감 있다’ ‘유감을 품는다’라고 할 때 쓰는 말이 ‘유감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잘못 쓰이고 있는 것이다.
언어의 사회성이란 이름으로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말의 TPO(때·장소·상황)가 있는 법이다. ‘천안함 막말’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자 발언의 장본인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이 쓴 표현이 “깊은 유감의 말씀”이다. 우리 군의 명예에 대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그는 공개 석상에서 ‘유감’ 운운하며 끝내 ‘사과’란 표현을 회피했다. 다른 나라를 향해 무슨 외교 성명이라도 발표하는 듯 말이다. 어느 TV 드라마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미안할 때는 미안하다고 말하세요. 자존심 세우면서 사과하는 방법은 없어요.” 권 대변인은 최원일 전 함장을 비롯한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장병과 유족들을 향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또박또박 말해야 했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