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 빚, 대신 갚으라니…" 부부의 세계서 알아야 할 '별산제'
부부일지라도 각자의 재산은 개인 소유로 인정
대출도 각자 분담, 빚 대신 갚을 필요 없지만
식료품비·월세 등 가사와 관련된 채무는 예외
직장인 김모씨는 최근 낯선 번호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아내가 김씨 몰래 수천만원대 대출을 받은 사실을 알게 된 것. 김씨는 “채권자들이 아내의 빚을 대신 갚으라고 요구했다”며 “맞벌이 부부로 살면서 재산을 각자 관리하는데 빚에 대한 책임은 공동으로 져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맞벌이 늘며 주목받는 별산제

각자 재산을 관리하는 맞벌이 부부가 늘고 있는 가운데 ‘부부별산제’가 주목받고 있다. 부부별산제는 부부 중 한쪽이 자기 이름으로 소유하거나 획득한 재산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개인의 권한을 인정하는 제도다. 채무, 증여, 개인 회생, 파산절차 등 모든 금전적 관계에 별산제가 적용되지만 이를 간과하고 있는 부부가 상당수다.

한국은 혼인 중 부부별산제를 취하고 있다. 민법 제830조에 따르면 부부의 일방이 혼인 전부터 가진 고유재산과 혼인 중 자기 명의로 취득한 재산은 그 일방의 재산이 된다. 부부가 자기 명의로 취득한 재산을 각자 관리, 사용, 수익하는 것이 원칙이다. 혼인 생활 중 부부가 함께 기여해 취득한 재산일지라도 명의를 가지지 못한 쪽의 재산권은 보호받지 못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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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채무 관계도 각자 분담해야 한다. 별산제에 따르면 부부일지라도 빚을 만든 개인이 책임져야 할 몫이다. 빚을 갚아주겠다고 약속하거나 보증하지 않는 한 배우자가 대신 갚아줄 필요는 없다. 예외는 있다. 부부의 일상적인 가사와 관련한 채무는 한쪽이 진 빚이라도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 일상적인 가사란 주로 부부의 공동생활에 통상적으로 필요한 식료품, 일용품, 의복 및 침구류 구입과 월세 지급 등 의식주에 관한 사무, 교육비·의료비나 자녀 양육비 지출에 관한 사무 등이 그 범위에 속한다.

민법 제832조에 따르면 ‘부부의 일방이 일상 가사에 관해 제3자와 법률행위를 한 때에는 다른 일방도 이로 인한 채무에 대해 연대책임을 부담한다’고 명시돼 있다.

가사로 인한 채무는 공동 책임

민법 제832조에서 말하는 ‘일상의 가사에 관한 법률행위’에 대한 대법원 판례도 있다. 가정생활을 꾸리기 위해 타당한 범위 내에서 진 빚이라면 부부의 연대책임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부부의 공동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통상의 사무에 관한 법률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구체적인 범위는 부부공동체의 사회적 지위나 재산, 수입, 능력 등 현실적 생활상태뿐만 아니라 그 부부의 생활 장소인 지역사회의 관습 등에 의해 정해지나, 당해 구체적인 법률행위가 일상의 가사에 관한 법률행위인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그 법률행위를 한 부부공동체의 내부 사정이나 그 행위의 개별적인 목적만을 중시할 것이 아니라 그 법률행위의 객관적인 종류나 성질 등도 충분히 고려해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판시한 바 있다. (대법원 2007다77712 판결)

개인파산 절차에도 별산제가 적용된다. 파산관재인이 채무인의 배우자 명의 재산을 확인하고 이 중 절반을 채무인의 재산으로 보고 지급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혼인 전부터 배우자가 보유한 재산이었거나 구체적인 수입 등 취득자금 출처를 명확히 밝히면 문제 삼기 어렵다. 배우자 명의의 재산이 실질적으로는 채무인의 소득으로 마련됐더라도 취득 과정에서 배우자가 부담한 금액과 혼인 기간 배우자가 재산을 증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사실 등 기여분을 적극적으로 소명하면 해당 재산을 지켜낼 가능성이 크다.

무심코 증여하면 세금 폭탄 주의

별산제가 ‘증여세 폭탄’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부부 각자의 재산을 인정하고 있어서다. 부부재산의 형성 및 운용 형태에 따라 증여세가 부과될 수 있다. 부부간에는 10년 동안 6억원까지 증여가 있더라도 증여세가 과세되지 않으나 재산 이전 누적 규모가 6억원을 넘으면 과세 대상이다. 6억원 미만을 증여한 후 부동산 등 별도로 이전한 재산 규모를 합해 6억원이 넘는 경우에도 증여세가 과세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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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부부간 자금 이체는 자금의 증여일 수도 있지만 단순한 공동생활의 편의, 일방 배우자 자금의 위탁 관리, 가족을 위한 생활비 지급 등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어 자금을 이체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바로 증여로 볼 수는 없고, 과세관청이 해당 자금 이체를 증여로 추정할 수 있는 사실을 추가로 입증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생활공동체인 부부간에 재산을 운용하는 형태는 매우 다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부부간 자금 이체를 증여로 추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 2015두41937 판결)

법조계 관계자는 “배우자 중 재테크를 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고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재산을 운용하는 등 자금을 위탁 관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에도 자금 이체에 시차가 있다거나 자금 규모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증여로 판단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며 “부부재산 운용 형태에 따라 세금이 매겨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 부부재산을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혼 땐 별산제 원칙 깨져

이혼하게 되면 별산제 원칙은 깨진다. 부부가 혼인 생활 중에 형성한 공동 재산은 명의와 상관없이 재산분할 대상으로 본다. 혼인 전에 취득한 특유재산일지라도 관리를 함께했거나 재산이 생긴 후 오랫동안 혼인상태가 유지됐다면 기여가 있다고 보고 분할 대상으로 여긴다. 재계 총수들의 이혼 소송이 하급심을 거쳐 대법원까지 오랜 시간 동안 법정 공방을 이어가는 이유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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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전부터 별도의 계약서를 만들어 '이혼할 때 재산분할을 안 받겠다'는 등 혼전 계약서(프리넙) 조언을 받는 예비부부도 늘고 있다. 법원이 혼인 전 계약은 물론 혼인 후 합의한 계약도 인정하지 않지만 관련 내용을 명시적으로 기록하고 별산제 원칙을 더 굳건하게 하기 위해 변호사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상훈 트리니티 대표 변호사는 "특유재산이라고 하더라도 부부가 장기간 동거하면서 그 재산의 유지나 가치증가에 기여한 부분이 인정된다면 재산분할 대상으로 삼는 것이 맞다"며 "부부 공동생활의 특질에도 부합하고 가사를 전담하는 배우자의 입장에서도 합리적이라고 보인다"고 말했다.

권용훈 기자 fac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