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득점왕 꿈꾸며 간 남미…"거기서 축구인생 끝날 줄은"
밥 굶어도 축구 못끊던 10대때 “한국의 호나우두 될 것”
아버지가 멕시코로 발령나며 새 축구 배우기 위해 이민
속도
·힘 밀리며 좌절 지금은 사랑 전하는 배우 꿈꿔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 걸까. 생애주기별 ‘숙제’에 발목 잡힌 대한민국 청년들. 대입, 취업, 연애, 결혼까지. 하나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낙오된다? “이번 생은 망했다”고 생각하는 대한민국 청년들이 그 어디서도 말할 수 없었던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툭 튀어나온 이빨, 짧게 깎은 까까머리. 어릴 적 최한규 씨(29)는 브라질 축구선수 호나우두와 닮았다는 얘기를 왕왕 들었다. 그는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득점왕을 하는 등 전성기를 누리던 자신의 우상 호나우두의 외모뿐만 아니라 축구 실력까지도 닮고 싶어 했다.
'삼바축구 전설' 호나우두.
'삼바축구 전설' 호나우두.
최씨는 매일 다섯 끼를 먹을 만큼 밥을 많이 먹었지만, 밥보다 축구를 더 사랑했다. 밥은 굶어도 축구 연습만큼은 꼭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곤 했다. 축구가 전부인 유년시절을 보냈다.

축구선수로서 그의 앞날은 창창해 보였다. 지역 유소년 리그에서 매 시즌 두 자릿수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다. 대회 MVP도 여러 번 차지했다. 중학교 진학 후엔 지역 명문 구단 U-15 팀에 입단할 기회도 주어졌다.

변화는 난데없이 찾아왔다. 어느 날 최씨 아버지는 가족 모두가 남미로 이민을 가야 한다고 했다. 직장에서 해외 발령이 난 것이다. 최씨는 구단 기숙사에서 머물러 있을 수도 있었지만,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축구를 경험해보는 것도 성장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구단 입단과 이민의 갈림길에서 최씨는 유학을 하기로 했다.

팀 전술 중심의 축구에 익숙했던 그는 개인기 위주의 남미 축구에 적응하지 못했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키가 작고 몸집도 작아 몸싸움에 밀렸다. 만년 벤치 신세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견딜 수 없어 단체 훈련 전후로 기본기 훈련에 집중했다. 그래도 신체적인 격차를 극복하기 어려웠다. 좌절의 연속이었다.

요즘 최씨는 당시 이민을 하지 않고 원래 있던 곳에 머물렀다면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해보곤 한다. 지금쯤 프로팀 선수로 활약하고 있을까?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가 됐을까?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아주 극소수만이 성공하는 스포츠 세계. 환경이 바뀌지 않았더라도 아마 그는 언젠간 축구선수라는 꿈을 포기했으리라는 걸 잘 안다. 그토록 사랑했던 축구를 관둬야 하는 현실을 견디기 어려워 자신이 아닌, 외부 탓을 꽤 오랜 시간 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

성인이 된 최씨는 인생에 축구 외에 또 다른 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꿈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아픈 일인지 알기에 여전히 도전이 두렵다. 그래도 최씨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기로 했다. 최씨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배우가 되기 위해 늦게나마 연기를 배우고 있다.
Getty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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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대학 졸업 후 아르바이트로 간간이 먹고사는 29세 최한규입니다. 고등학생 때까지 축구를 했습니다. 운동을 그만두고서는 하고 싶은 일이 마땅히 없어서 우선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늘 누군가를 웃기고 즐겁게 하는 일이 좋았던 것 같아요. 개그 욕심이 넘쳐서 개그맨이 돼야 하나 생각도 해봤는데, 사람을 웃기고 울리는 일을 동시에 하고 싶어서 배우라는 꿈을 품게 됐습니다.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매달 60만원씩 연기학원 수업료를 내고 있습니다.”

▷이민을 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회사에서 발령을 받으셨습니다. 미국 밑에 있는 멕시코라는 나라로 갑자기 가야 한다며 거기서 새로운 축구를 접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셨습니다. 그 당시엔 월드컵에서 뛰는 세계적인 축구선수가 진심으로 되고 싶었기 때문에 다양한 축구 스타일을 경험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잠깐 고민해보고는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원래 뛰던 팀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선택지도 있었지만요.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도 당시 제게는 중요했습니다.”

남미의 축구는 어떻게 달랐나요.
“15세 무렵 이민을 가 멕시코 북부 지역에 있는 타마울리파스주 소속 ‘Jaiba Brava’ 라는 팀에 입단했습니다. 당시 팀은 프로 3부 리그에 있었고, 저는 2군 훈련생으로 시작했습니다. 수비수와 공격수 사이에서 뛰면서 패스 길을 찾고 공격 전개를 진두지휘하는 미드필더로 경기에 나서곤 했어요. 원래 뛰던 팀에선 팀 전술에 따르는 축구가 강조되곤 했어요. 개인기는 어디까지나 팀에 도움이 되는 선에서만 선보일 수 있었어요. 공을 오래 끌 바엔 앞쪽 빈 곳으로 공을 보내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배웠습니다. 남미 축구는 철저히 개인 기량 위주예요. 선수들도 홀로 돋보이기 위해 몸부림쳐요. 훈련을 매주 세 번, 3시간씩 한다고 하면 전술 훈련은 30분 정도밖에 안 돼요. 감독은 나머지 시간을 기본기 연습과 미니경기에 할애했습니다.”
축구 꿈나무 시절. 본인 제공
축구 꿈나무 시절. 본인 제공
▷축구를 그만두기까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당시 이민을 하기로 한 선택을 후회하진 않나요.
“시야가 좋고 축구 지능이 좋아도 속도와 힘에서 늘 밀렸어요. 공 잡을 기회도 많이 주어지지 않죠. 다들 저마다의 축구를 하기 바쁘니까요. 몇 안 되는 기회를 살려서 재치 있는 플레이를 보여줘야 하는데, 잘해야 한다는 심리적인 부담감도 같이 커지면서 나락으로 빠졌던 것 같아요. 나중엔 오기가 생겨서 단체 훈련 한두 시간 전에 미리 가서 개인기 훈련을 했는데 피지컬 차이를 여전히 극복하기 어려웠어요. 주변에서 키는 클 것이라고, 너무 섣불리 운동을 그만두지 말라고 했는데…. 당시엔 좌절감이 커서 얼른 다른 길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키도 170㎝까지밖에 안 자랐으니 억울하지 않아요.”

축구를 포기하고 어떤 길을 걸어왔습니까.
“당연히 축구선수로 평생 살 줄 알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유년기를 다 바친 축구였는데, 목표가 없어지니까 허탈하기도 하고 뭘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어요. 불안한 마음에 우선 나중에라도 하고 싶은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대학부터 나오기로 결심했습니다.”

▷배우라는 꿈을 품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학예회 때 늘 무대에 오르곤 했어요.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것이 언제나 즐거웠습니다. 친구들에게 농담할 때도 의도한 대로 웃음이 빵 터지면 엄청난 쾌감을 느꼈어요. 대학 생활을 하면서는 사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덮어두고 살았어요. 막상 졸업하고 밥벌이를 해야 할 때가 되니까 발등에 불이 떨어졌죠. 다른 친구들처럼 취업 준비를 하긴 싫은데…
고민 끝에 제 마음이 시켜서 하는 게 맞다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어요. 사람들을 웃기면서도 동시에 울릴 수 있는 힘을 지닌 배우가 된 제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뛰었어요.”

▷조금은 늦은 나이에 배우의 길에 들어섰는데, 배우 생활도 스포츠계 못지않게 불확실성이 많을 텐데 두렵진 않은가요.
“나이보단 연기 경력이 없는 제 배경이 걱정입니다. 경쟁도 치열하고요. 배우 지망생은 넘쳐나는데 배역은 언제나 한정돼 있으니깐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여서 아직 조급함은 적어요. 또 대단한 성과를 내야겠다는 욕심보단 이렇게 꿈을 향해 달려가는 시기도 하나의 ‘직업’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랜 무명 생활까지도 내다보고 이 길에 들어섰으니까 차근차근 기대하는 마음으로 도전해보고자 해요.”
스물 아홉 살이 된 그는 연기자가 되는 꿈을 꾼다. 본인 제공
스물 아홉 살이 된 그는 연기자가 되는 꿈을 꾼다. 본인 제공
▷어떤 배우가 되고 싶습니까.
“거창하고 낯간지럽지만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오늘날 현대인이 마주하는 문제는 사랑이 없어서라고 감히 생각하거든요. 사랑을 통해 느끼는 위로, 재미, 슬픔 등을 제 연기를 통해 관객이 느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런 수준의 배우가 되기 위해선 우선 일상에서부터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는 걸 알아요. 좋은 사람에게서 좋은 연기가 나오니깐요. 하루하루 충실히 살다 보면 재능을 꽃피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해련 기자 haery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