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오디오와 소설가의 방
▲Casa Brutus(2017)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였다. 저녁이 되어 식사를 쏜살같이 마친 후 두 군데를 항상 들렀다. 바로 레코드점과 서점이었다. 이후엔 자율학습이 있어 학교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식당과 레코드점 그리고 서점을 빠르게 다녔다. 가능한 동선을 매우 간결하게 짜고 시간을 철저히 지켜야 가능했다. 주로 식사는 학교 기숙사 식당에서 해결하고 레코드점으로 가서 기다리던 신보가 나왔는지 확인했는데, 신보가 마침 도착이라도 한 날이면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으로 뛰어가다시피 했다.

또 하나는 서점에 들르는 일이었다. 당시 발간되던 음악 잡지를 보기 위해서다. 신보와 관련된 뉴스나 특집기사 등은 그 어떤 교과서보다 텍스트가 두 배는 더 빨리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은 오디오 잡지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부분은 재미가 없었지만 음악 애호가의 오디오 소개, 탐방 기사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제대 이후 아르바이트로 조금씩 돈을 모아 오디오를 살 때 바로 그 때 탐방 기사에 나왔던 오디오가 생각나 인피니티 스피커를 구입했다. 당시 보았던 잡지 한편의 사진 한 장은 이렇게 치명적으로 나를 오디오의 세계로 이끌었다.

입문하던 시절 동기부여를 해준 것은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한 전문 기사가 아니었다. 단지 잘 찍은 사진 한 장이었다. 아니, 잘 찍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진이나 그림, 글엔 찍고 그리고 쓰는 사람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묻어나는데 그 사람의 열정이 투영되어 있느냐가 관건이다. 당시 오디오 잡지의 사진과 기사는 광고를 위해 찍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오랫동안 한 음악 애호가가 오랫동안 소중히 수집해온 음반 라이브러리와 손때가 뭍은 오디오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 속엔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인생과 내면이 조금이나마 스며들어 잡지 밖으로 아우라를 내뿜었다.

잊고 있던 과거의 이런 체험은 종종 매체를 통해 소개되는 유명인의 오디오 시스템에서 다시 떠오른다. 예를 들어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오디오 시스템이다. 대학 졸업 후 재즈 카페를 운영하다가 글을 쓰게 된 이력을 가진 그는 무척이나 자유롭고 때론 일본 문학 외부에 존재한다. 그런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음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오래된 재즈 레코드, 그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빈티지 오디오, 축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글을 쓰는 그의 모습이 연상된다.
하루키의 오디오와 소설가의 방
▲Switch(2019)

하루키의 음반 컬렉션이야 이미 소설이나 에세이 속에서도 종종 언급되어 알만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수천 장의 재즈, 클래식 등 주로 엘피(LP)를 수집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잡식성이지만 재즈를 가장 좋아하며, 특히 1950~60년대 재즈의 벨 에포크 시대 엘피 컬렉터다. 그렇다면 오디오는 어떤 것을 사용할까?
처음 시스템 사진을 보곤 깜짝 놀랐다. 그저 글을 쓰는 데 배경음악 정도로 사용하는 오디오가 아니다. 정말 오디오에 진심인 사람의 시스템이다. 일본 잡지에서 소개된 그의 시스템 목록은 오디오 마니아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스피커는 탄노이 Berkeley에 더해 JBL의 여러 유닛을 하나의 인클로저 안에 세팅해 즐기고 있다. 예를 들어 저역엔 JBL D130, 중역은 2440에 HL89 일명 하츠필드 혼을 사용했고, 고역은 2420을 달았다. 캐비닛은 4530으로 최신 하이파이 스피커의 디자인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 없는 디자인과 소리를 내주는 인클로저. 백로드 혼 방식에 커다란 후드에서 나오는 박력 넘치는 저역이 상상된다. 역시 20세기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흘러가는 당시 재즈엔 안성맞춤일 듯하다.

앰프는 의외로 현대적인 모델들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하이엔드 오디오 메이커 아큐페이즈 E-407일 일단 눈에 들어온다. 아큐페이즈라고 하면 국내에서도 유명하고 현재도 여러 오디오 마니아들로부터 꾸준히 호평받는 메이커. 현역 엔지니어들도 감탄할 만큼 꼼꼼한 정밀 공학을 기반으로 집요하게 그 기술과 음질을 진화시켜오고 있다. 그들이 내건 캐치프레이즈 ‘기술을 통해 세상을 풍요롭게’라는 말이 머리는 물론 가슴으로 와 닿는 브랜드다.

또 하나의 앰프는 진공관 앰프다. 바로 옥타브 V40SE라는 진공관 인티앰프. 옥타브라고 하면 진지한 오디오 마니아가 아니라면 모를 수도 있지만, 굴지의 독일 진공관 전문 브랜드다. 비틀즈의 멤버들이 거의 분열 상태에서 ‘White’ 앨범을 발매했고 카네기 홀에선 피아니스트 호로비츠의 전설적인 공연 실황으로 한 해를 마무리했던 1968년. 국내에선 펄 시스터즈의 ‘님아/커피 한잔’이 공개되었던 해에 옥타브는 태어났다. 하루키는 왜 자국의 진공관 브랜드를 마다하고 옥타브를 선택한 것일까?
하루키의 오디오와 소설가의 방
스피커와 앰프에 이어 턴테이블도 두 조를 운영하고 있다. 하나는 토렌스의 명기 중 하나인 TD520이다. 벨트 드라이브 방식에 매우 넓은 플린스를 갖추고 있는 대형기. 필자 또한 좋아하는 턴테이블인데, 널찍한 베이스 위에 12인치 SME3012 톤암을 세팅한 버전이 많다. 하루키 또한 SME 톤암을 사용하고 있고 카트리지는 덴마크 오토폰의 SPU 계열을 사용한다. 또 하나는 럭스만이다. PD-171A라는 모델로 아마도 하루키가 운용하는 제품 중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제품이 아닐까? 9인치 젤코 톤암을 장착해 아마도 서브시스템으로 즐기는 듯하다.

오디오 잡지나 때론 TV 프로그램을 보면 온갖 값비싼 기기들로 휘황찬란한 시스템을 운용하는 애호가가 많이 나온다. 하지만 구입한 지 얼마 안 되는 제품들로 가득하고 손때 하나 묻지 않아 보이는 것들에선 왠지 그의 것이 아닌 듯 그의 삶에 녹아들지 않아 보인다.
반면 하루키의 시스템을 보면 뭔가 그의 삶과 음악 그리고 그가 오랜 시간 써내려가며 우려낸 삶의 면면들이 겹쳐진다. 때론 문장 속에 오글거리면서 언급되었던 단락 하나하나가 그의 음반과 오디오 한편에서 살아날 것 같다. 단지 최고가가 아닌 그 사람의 내면과 일상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오디오 시스템. 가짜와 허세, 허영이 판치는 세상에 이런 진심은 어느 누군가에게 신신한 감흥을 전해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