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오디오와 소설가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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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코난의 맛있는 오디오
![하루키의 오디오와 소설가의 방](https://img.hankyung.com/photo/202306/01.33688462.1.jpg)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였다. 저녁이 되어 식사를 쏜살같이 마친 후 두 군데를 항상 들렀다. 바로 레코드점과 서점이었다. 이후엔 자율학습이 있어 학교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식당과 레코드점 그리고 서점을 빠르게 다녔다. 가능한 동선을 매우 간결하게 짜고 시간을 철저히 지켜야 가능했다. 주로 식사는 학교 기숙사 식당에서 해결하고 레코드점으로 가서 기다리던 신보가 나왔는지 확인했는데, 신보가 마침 도착이라도 한 날이면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으로 뛰어가다시피 했다.
입문하던 시절 동기부여를 해준 것은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한 전문 기사가 아니었다. 단지 잘 찍은 사진 한 장이었다. 아니, 잘 찍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진이나 그림, 글엔 찍고 그리고 쓰는 사람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묻어나는데 그 사람의 열정이 투영되어 있느냐가 관건이다. 당시 오디오 잡지의 사진과 기사는 광고를 위해 찍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오랫동안 한 음악 애호가가 오랫동안 소중히 수집해온 음반 라이브러리와 손때가 뭍은 오디오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 속엔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인생과 내면이 조금이나마 스며들어 잡지 밖으로 아우라를 내뿜었다.
잊고 있던 과거의 이런 체험은 종종 매체를 통해 소개되는 유명인의 오디오 시스템에서 다시 떠오른다. 예를 들어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오디오 시스템이다. 대학 졸업 후 재즈 카페를 운영하다가 글을 쓰게 된 이력을 가진 그는 무척이나 자유롭고 때론 일본 문학 외부에 존재한다. 그런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음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오래된 재즈 레코드, 그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빈티지 오디오, 축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글을 쓰는 그의 모습이 연상된다.
![하루키의 오디오와 소설가의 방](https://img.hankyung.com/photo/202306/01.33688460.1.jpg)
처음 시스템 사진을 보곤 깜짝 놀랐다. 그저 글을 쓰는 데 배경음악 정도로 사용하는 오디오가 아니다. 정말 오디오에 진심인 사람의 시스템이다. 일본 잡지에서 소개된 그의 시스템 목록은 오디오 마니아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스피커는 탄노이 Berkeley에 더해 JBL의 여러 유닛을 하나의 인클로저 안에 세팅해 즐기고 있다. 예를 들어 저역엔 JBL D130, 중역은 2440에 HL89 일명 하츠필드 혼을 사용했고, 고역은 2420을 달았다. 캐비닛은 4530으로 최신 하이파이 스피커의 디자인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 없는 디자인과 소리를 내주는 인클로저. 백로드 혼 방식에 커다란 후드에서 나오는 박력 넘치는 저역이 상상된다. 역시 20세기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흘러가는 당시 재즈엔 안성맞춤일 듯하다.
앰프는 의외로 현대적인 모델들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하이엔드 오디오 메이커 아큐페이즈 E-407일 일단 눈에 들어온다. 아큐페이즈라고 하면 국내에서도 유명하고 현재도 여러 오디오 마니아들로부터 꾸준히 호평받는 메이커. 현역 엔지니어들도 감탄할 만큼 꼼꼼한 정밀 공학을 기반으로 집요하게 그 기술과 음질을 진화시켜오고 있다. 그들이 내건 캐치프레이즈 ‘기술을 통해 세상을 풍요롭게’라는 말이 머리는 물론 가슴으로 와 닿는 브랜드다.
![하루키의 오디오와 소설가의 방](https://img.hankyung.com/photo/202306/01.33688461.1.jpg)
오디오 잡지나 때론 TV 프로그램을 보면 온갖 값비싼 기기들로 휘황찬란한 시스템을 운용하는 애호가가 많이 나온다. 하지만 구입한 지 얼마 안 되는 제품들로 가득하고 손때 하나 묻지 않아 보이는 것들에선 왠지 그의 것이 아닌 듯 그의 삶에 녹아들지 않아 보인다.
반면 하루키의 시스템을 보면 뭔가 그의 삶과 음악 그리고 그가 오랜 시간 써내려가며 우려낸 삶의 면면들이 겹쳐진다. 때론 문장 속에 오글거리면서 언급되었던 단락 하나하나가 그의 음반과 오디오 한편에서 살아날 것 같다. 단지 최고가가 아닌 그 사람의 내면과 일상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오디오 시스템. 가짜와 허세, 허영이 판치는 세상에 이런 진심은 어느 누군가에게 신신한 감흥을 전해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