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히로가 이름을 불러준 순간, 하쿠는 날아올랐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arte] 신지혜의 영화와 영감
# “너의 이름은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야!”
엄마랑 아빠랑 차를 타고 이사한 집으로 가던 치히로.지름길이 아닐까 하는 곳으로 들어섰다가 터널 하나를 지나게 되고 터널 너머의 세상에서 부모님이 돼지로 변해 버린다. 치히로는 너무나 놀랐고 무섭지만 부모님을 인간으로 되돌려 함께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그 때 나타난 소년은 치히로를 도와주며 말한다.
“너의 이름을 잊지 마.”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하지만 요괴들의 온천장을 운영하는 유바바는 바로 치히로의 이름을 ‘빼앗는다’.
“흥. 온천장에서 일하기에는 너무 거창한 이름이군. 이제부터 너의 이름은 ‘센’이다.”
치히로 라는 글자에서 획을 이리 저리 빼더니 ‘센 (千)’만 남겨 놓은 유바바는 그렇게 말한다. 그렇게 이름의 일부를 빼앗겨버리고 온천장에서 일하게 된 치히로이지만 씩씩하고 성실하게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한다. 물론 부모님 생각을 마음에 꼭 품은 채로.
유바바의 온천장에서 치히로는 여러 사람과 요괴를 만나지만 누구에게나 성심으로 대하고 그 단단하고 맑은 마음은 점점 더 단단하고 맑아진다.
그렇게 ‘이(異) 세계’에서 모험을 하게 된 치히로는 씩씩하고 용감하지만 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눈물이 차오르기도 하고 이렇게 일상에 젖어들다가 자신이 ‘센’으로 그냥 남아 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되었겠지. 돼지로 변해 버린 부모님은 잘 지내고 있을까.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커다란 걱정이 치히로의 어린 마음을 내리 눌렀을 것이다.
하지만 치히로에겐 곁에서 다정하게 대해 주고 함께 해 주는 린 언니가 있고 일을 가르쳐 주고 공간을 제공해 주는 가마 할아버지가 있다. 무엇보다 자기자신, 본연의 ‘치히로’의 모습을 잊지 말라던 하쿠 또한 힘이 된다.
그나저나 소년의 모습을 한 하쿠는 무슨 사연이 있어서 유바바의 일을 돕는 걸까. 궁금하지만 함부로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다. 분명 치히로가 이름의 일부는 빼앗긴 채 센이 된 것처럼 하쿠에게도 사연이 있을 것이다.
드디어 치히로는 하쿠의 이름을 불러준다.
“너의 이름은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야!”
자신의 이름을 들을 하쿠는 본체를 되찾는다.
강의 신, 하쿠는 그렇게 자기자신을 되찾아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른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 에번은 내 이름을 맨 먼저 사랑했습니다.
“들에 홀로 서 있는 오동나무, 환하고 아름답네.”그녀의 이름을 들은 에번은 그렇게 말했다. 에번은 아마도 누군가의 이름을 들으면 그 이름을 표기하는 한자를 떠올리고 그 한자를 풀이하며 그 사람의 이름의 의미를 가만히 생각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에번이 누군가의 이름을 들으면서 한자를 머릿속에 그리고 그 의미를 머릿속에 남기는 이 과정은 누군가를 들여다보고 이해하려는 가장 큰 노력으로 보인다.
에번은 말한다.
“이름의 발음은 그 이름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아. 그건 한자만이 알려줄 수 있지.”
에번에 아케미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는 단번에 ‘들에 홀로 서 있는 오동나무’를 떠올렸고, 그 환하고 아름다운 뜻에 끌려 그 이름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저 낭만적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라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나니 에번의 마음이 그려진다. 아마도 에번은 사랑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면 언제나 아름다운 오동나무를, 그리고 오동나무의 의미를 떠올리며 그 이미지를 품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을까.
이름은 그런 것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이름은 (개체의 것이든 종의 것이든) 그만큼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저런 것을 다 떠나서 생각해 봐도 누군가의 이름을 들으면 (혹은 어떤 종의 대표 이름을 들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지 않은가. 그 이미지는 시간과 경험을 통해 타인에게 전달된 느낌이며 분위기이자 고정된 관념이다. 그렇게 누군가의, 무언가의 이름은 개체 또는 종의 특성을 규정짓는다.
켄 리우 소설집 <종이동물원>에 수록된 ‘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의 이야기다. 켄 리우 소설 <종이동물원> 표지
# 네 이름은 이제 아브라함이라 불리리라
아브람은 어느 날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자신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받고 주저 없이 식솔을 거느리고 자신의 터전을 떠난다. 그 때 아브람은 신으로부터 새 이름을 받는다.“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리니, 네 이름은 이제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라 불리리라.”
뿐만 아니라 아내 사래의 이름 또한 바뀐다. ‘열국의 어머니’라는 뜻을 가진 사라로 말이다.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아브라함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질 신의 원대한 약속을 믿었다.
# 이름. 누군가의 정체성의 기초가 되어주는 것. 자기자신을 (스스로와 타인에게) 인지하게 하는 것.
자, 이제 당신이 답할 차례다.
너의 이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