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 칼럼] 이래도 김정은이 '계몽군주'인가
북한 김씨 왕조 구축사는 끝없는 피비린내 나는 숙청사다. 해방 직후 소련군을 등에 업고 북한에 들어온 김일성은 지지 기반이 약했다. 정권 초반 북한은 소련파, 연안파, 갑산파, 국내파 등 계파들의 연합정권 성격을 띠었는데, 김일성은 정적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다. 남로당 계열 간부들을 ‘미제의 간첩’이란 명목으로 처형한 뒤 ‘수령의 권위 도전’과 ‘군벌주의’ 등 죄목을 걸어 다른 계파의 목을 모조리 쳤다.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한 그는 1970년대 들어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내세웠다. 이때 ‘백두혈통’이라는 상징조작을 통해 극장국가의 근간을 만들었다. 김정일은 ‘심화조 사건’이라는 대규모 숙청 작업을 벌였다. 자신의 권력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만한 인물들에게 간첩 누명을 씌워 2만5000여 명을 제거했다. 김정은은 잘 알려진 대로 고모부를 고사총으로 처형했고, ‘김정일 운구 7인방’도, 장성택 숙청을 함께 논의한 ‘삼지연 8인방’도 대부분 없앴다.

김씨 3대가 피의 숙청을 벌이며 폭압적 전제왕국을 구축하는 동안 주민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김일성은 ‘흰 쌀밥에 고깃국’ 유훈을 남겼지만, 1994년부터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 시작돼 5년간 굶어 죽은 사람이 200만~300만 명에 달했다. 최근엔 제2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다. 북한 식량난이 심각해 일부 지역에서 굶어 죽는 주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아사자 발생이 예년의 3배에 달한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2019~2021년 북한 주민의 41%가 영양실조에 시달렸다고 한다(유엔 발표). 고난의 행군 시절 회자된 ‘맨밥에 된장 찍어 먹어도…’라는 표현이 노동신문에 등장했다. ‘꽃제비’(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아이)들도 다시 나타났다. 김정은은 지난 3월 “올해 알곡고지를 기어이 점령해야”라고 다그쳤다. 대체 어느 시절 얘기인가. 그런데도 북한이 코로나 이후 가장 먼저 수입한 것이 김정은 혈족이 탈 백마였다. 북한이 지난해 쏜 미사일 비용(최소 2억달러에서 5억6000만달러)이면 식량 부족분의 60% 이상 충당할 수 있지만, 김정은은 주민들이 굶어 죽든 말든 상관없다. 북한은 전국 11곳에 정치범수용소를 운영하며 공개처형과 고문, 생체실험을 자행하고 있다.

북한 경제력은 1970년 전후 한국에 추월당한 이후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북한은 2021년과 작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하면서 남북한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28배까지 벌어졌다. 지난해 북한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20년째 그대로인 35조9000억원에 머물며 한국(2071조7000억원)의 58분의 1에 그쳤다. 북한의 1인당 하루 식품 에너지 공급량은 한국의 68%에 그쳤다(2019년 기준). 발전량은 한국의 2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면 진작 정권이 사라졌을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도 열 살짜리 어린 딸을 내세워 백두혈통 충성을 유도하고 있다. 음습한 디스토피아 국가의 비극이자 희극이다.

이런 참혹한 현실을 보고도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김씨 왕조를 떠받드는 독버섯이 깊숙이 침투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서울 한복판에서 버젓이 ‘백두칭송위원회’ 결성을 선포하고 기자회견을 열어 김정은에게 경의를 표하고, 서울 방문 환영식까지 열었다. 북한 주민들과 같이 꽃술을 들고 김정은을 연호했다. 초현실적 기이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범야권 인사는 김정은을 계몽군주라고 칭송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김정은에게 “생명 존중 의지에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김정은부터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

간첩단이 민주노총, 진보당, 전교조까지 파고들었다. ‘태양절 110주년을 맞이하여’라며 김일성을 찬양하고, ‘김정일 동지 탄생 80돌을 축하드린다’며 치켜세웠다. “경애하는 최고 영도자 김정은 동지 만세! 아름찬 투쟁의 역사 조선노동당 만세!” “대를 이어 충성”이라고 적은 충성맹세문을 북한에 여러 차례 보냈다. 김정은을 총회장으로 떠받들고, 영업1부를 자처한 민주노총은 화물연대 총파업 지령을 받고 이행했다. 전 진보당 대표 충성문엔 ‘난 총회장님의 충실한 전사’라는 표현도 있다. 윤석열 정부 퇴진 차원이 아니라 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하는 세력이다. 이들에게 권고하고 싶다. 망상에 젖어 있지 말고 북한에 가 거대한 극장국가의 일원으로 직접 살아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