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을 읽지 않는 당신에게.” 그렇게 써두고 보니 이 편지의 수신인이 누구일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출판인으로서 자조 조금 섞어 말하자면, 이 수신처의 광범위함이란 스팸 메시지에 비견할 만치 불특정 다수(!)를 향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발신량 면에서라면 차라리 ‘시를 잊은 그대(들)에게’ 보내는 편이 훨씬 경제적일지 모르겠다.
사전에만도 동음이의어가 최소 셋이니까 여기서 말하고픈 시론의 범위를 미리 좁혀두건대, 한 시대의 여론(時論)이 아니고, 시험 삼아 해보는 의론(試論)도 아니고, ‘시(詩)에 대한 이론 또는 그 평론’을 뜻하는 시론 얘기다. 더 좁히자면 비평도 말고 시(쓰는 이)의 이론, 그 시론(詩論)이다. 시론은 물론 시인이 쓴다. 무엇을, 또 어떻게 쓰는가를 포괄하여 왜 쓰는가에 닿는 글. 요컨대 왜 시를 쓰는지에 대해 쓰는 글. 그러면 결국 이런 물음이 남는다. 그런 글을 뭐하러 쓰는 거지?

쓰는 이가 아니고서 그 편을 대변하기는 힘들 듯하니, 읽는 이로써 질문을 이렇게 살짝 변용해본다. 왜 시론을 읽는가. 그런데 글쎄…, 떠오르는 건 여전히 마뜩잖은 답변뿐이다. 시론은 둘째 치고, 애초에 시를 뭐하러 읽느냐 물어도 빙빙 돌게 생긴 마당에. 그 ‘뭐하러’가 효용을 묻는 것이라면, 글쎄요, 시란 ‘아름답고 쓸모없는’ 게 아닐까요….

아무려나 시집 제목을 빌려 답변을 대신하는 것도 유용한 편법이겠으나, 또 이런 직업정신이 발동하고 만다. 출판인에게 어떤 책을 왜 읽느냐는 물음은 예컨대 고객의 소리, CS, 클레임의 일종일 수 있다는 거다. 그럼 이제 또 공식 답변을 준비해두는 것은 직업윤리의 일환인 셈인데….

일단 힌트나마 얻기 위해 펼친 책이 이것이다. 이수명 시인의 첫 시론집 <횡단>. 시론집의 ‘시론 1’ 꼭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시론은 쓰일 수 없는 것이다. 시는 논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집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이게 뭔가 싶은 순간, 재빨리 곁눈질한 다음 단락은 이렇다. “시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서 오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며, 그것은 시인의 경우라도 마찬가지다.”(25쪽)

이쯤에서 다시 의심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시를 왜 읽냐(혹은 쓰냐)는 물음에 ‘그건 시인도 모릅니다’라고 답하겠단 것인가. 그런데 분명한 것은, 결론도 쓸모도 확실한 무엇도 없다고 자꾸 말하는 이 (불분명한) 문장들을 좇다보면 어느 순간 기묘한 편안함이 오고, 그것이 정확하다는 점이다. 단단한 ‘있음’ 대신 출렁이는 ‘없음’이 주는 안락이랄까.
시론을 읽지 않는 당신에게
제목이 된 두 글자 ‘횡단’, 그러니까 ‘가로지른다’는 데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둘이다. 위와 아래를 나누는 취소선, 동시에 멀리 떨어진 (듯 보이는) 이 항과 저 항 사이를 잇는 연결선. 그 착안에 ‘책머리에’를 참조하면 이렇다.

“시에 대한 사유와 읽기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나는 예측할 수 없는 여러 지대를 횡단했다. 시의 불가능과 현대시의 불가피함 사이를, 첨예화되는 감각과 변전하는 도모 한가운데를, 문학의 발생과 전환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길이 없는 곳에서 횡단하고 있었다는 고백을 해야만 한다.”(12쪽) 그러니까 이 횡단은 다시 둘 중 하나다. 무단횡단이거나, 없는 길의 개척이거나. 수사를 동원하자면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부정(否定)의 방식으로 부정(不定)으로 나아가는 일, 모든 ‘기존’을 깨어 ‘미지’를 열어내려는 시도다.
시론을 읽지 않는 당신에게
이쯤에서 문득 ‘휴대용 횡단보도’라는 (실존) 발명품을 떠올렸는데, 흑백 횡단보도 무늬를 인쇄한 긴 천을 둘둘 말아 들고 다닌다는 발상이다. 건널목이 없는 차도가 있다면 이 천을 깔고 안전하게(?) 건너면 된다. 다소 황당무계한 이 발명품은 일본에서 (심지어 연마다 여러 에디션으로) 발행한 <101 Unuseless Japanese Inventions>이라는 책에 실려 있다.

일본어로 이상한 도구(珍道具)라 불리는 이 물건들에는 뜻밖의 조건이 달려 있는데, “정확히 유용하지는 않지만 전혀 쓸모가 없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책의 제목부터 이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101가지 ‘쓸모없지 않은(unuseless)’ 발명품들.

그러니까 지금, (주제가 건넘이니 이쯤의 비약은 허락되리라는 믿음에서) 휴대용 횡단보도와 시론을 유비해보려는 중이다. 이고 지고 지니고 다니는 그 무엇의 쓸모를 당최 모를 듯해도, 도무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갈 도리가 보이지 않을 때, 고난의 길이랄지 순례의 길이 교차로 없이 로터리 없이 막막한 종주(縱走)로 이어질 때, 유사시를 위해 품어온 ‘가로지름’, 길이 있을지 모르니까. 마침내 ‘건너가게’ 해줄 글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다시 지금, 시론을 읽지 않는 당신에게, 그런 긴 편지를 발신하려는 중이다. 쓸모없음에 앞선 없음의 쓸모에 대해. 모든 종속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쓰고 또 쓰는”(41쪽) 어떤 시인의 오늘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