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이달 6일부터 사흘 일정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다. 한 달 새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브렛 맥거크 국가안보회의(NSC) 조정관, 아모스 호흐슈타인 백악관 선임고문 등이 사우디를 찾았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12일 브라질을 찾아 100억유로 상당의 각종 투자 선물 꾸러미를 내밀었다. 그는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유럽이 브라질로, 라틴 아메리카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울타리 앉아서 관전

美-中·러 사이에서 줄타기…존재감 키우는 '글로벌 사우스'
미국 고위급 인사들의 사우디 줄 방문을 두고 뉴욕타임스(NYT)는 8일 “중국, 러시아와 경쟁하려면 사우디가 필요하다는 냉엄한 신(新)지정학적 현실을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사우디를 비롯해 인도와 인도네시아, 브라질, 튀르키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급부상하고 있다.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다. 이들 국가는 미국과 중국·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올해 들어 ‘스윙 국가’이자 ‘펜스 시터(fence-sitter)’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다.

포린폴리시는 6일 “글로벌 사우스 중에서도 스윙 국가 여섯 곳이 지정학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라며 “향후 미국의 외교 정책은 이들 국가를 중심으로 짜여질 것”이라고 전했다.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더욱 짙어진 미·중 간 디커플링(탈동조화) 국면이 글로벌 사우스의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는 분석이다.

글로벌 사우스는 원래 선진국을 뜻하는 ‘글로벌 노스’와 대비해 신흥국을 일컫는 용어로 통칭돼 왔다. 포린폴리시는 “글로벌 노스에는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 러시아 한국 일본 등이 포함됐었다”며 “하지만 러시아를 제외한 글로벌 노스는 미국과 대체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정학적 역학 구도에서 입장과 영향력이 크게 변화하지 않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와 관련, 알렉산데르 스투브 핀란드 재무장관은 지난달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에서 “2022년은 세계 질서가 3각 구도로 재편된 해”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노스 대 글로벌 사우스의 전통적인 이분법에서 벗어나 “글로벌 웨스트(미국 유럽과 그 동맹국 약 50개), 글로벌 이스트(러시아 중국 이란 등 약 20개국), 글로벌 사우스(인도 사우디 등을 위시한 125개국)의 3각 구도가 형성됐다”는 분석이다.

그는 “러시아의 침략 전쟁은 ‘신냉전이 끝났다’는 서방의 착각을 보란 듯이 비웃고 세계 각국을 어느 한쪽 편에 서도록 강요했다”며 “하지만 글로벌 사우스는 당분간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을 것이다. 펜스에 앉아있는 것 자체만으로 목표를 달성하고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는 한 가지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편저편 드나들기

인도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4자 안보 협력체인 쿼드(QUAD) 회원국이면서 미국이 창립한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에도 참여하고 있다. 안보와 경제 양 측면에서 미국의 대(對)중국 견제 대열에 적극 동참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인도는 또 중국이 이끄는 신흥국 협의체 브릭스(BRICS·중국 러시아 브라질 인도 남아공)의 일원이기도 하다.

미국과 중·러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펼치는 국가는 인도만이 아니다. IPEF에 참여하고 있는 14개 회원국 가운데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정상들은 지난해 6월 중국이 브릭스 외연 확대를 위해 주최한 ‘브릭스+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이달 초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브릭스+ 외교장관회의에서는 사우디를 비롯해 글로벌 사우스로 분류되는 15개국의 외교장관이 동참했다.

○미·중 갈등으로 이득 커질 것

지난달 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사우디 제다와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열린 일본 히로시마를 연달아 방문한 이유는 글로벌 사우스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로이터통신은 “글로벌 사우스의 위상이 드러난 상징적인 장면이었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의 구애에도 글로벌 사우스는 딴전을 피웠다”고 했다.

글로벌 사우스 여섯 곳의 부상 배경으로는 △미·중 양극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이들 중견국가에 자유로운 선택지가 많아진 점 △권력이 지역화된 상황에서 이들 국가가 각 지역의 리더인 점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워 외교정책에서 더욱 강경한 거래적 접근법을 취할 수 있는 점 등이 꼽힌다.

이들 국가의 중요성은 앞으로 미·중 갈등을 지렛대 삼아 더욱 커질 전망이다. 많은 서방 국가와 기업이 공급망의 탈(脫)중국을 모색하면서 글로벌 사우스가 새로운 거점으로 떠올랐다는 점에서다. 기후 위기 해결을 위한 대응 국면도 글로벌 사우스가 세력을 키우는 동인이 될 것이란 관측이다. 이들이 기후 위기의 주요 공여국인 동시에 친환경 전환을 위한 광물 보유국이기 때문이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